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새생활교회 당회장 박주동 목사

예배/말 씀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 열왕기하 6장 8-23절 … 박주동 목사

예배하는 사람 2025. 12. 15. 19:56

박주동 목사

 

 

251214말씀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 열왕기하 6장 8-23절 …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6장 8절부터 23절까지 말씀입니다.
그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그 신복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알려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냄에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의 성읍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 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업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 네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까 하니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심에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옴에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함에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오, 이는 그 성업도 아니니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심에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
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하니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들이 자인들 어찌 치리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게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심에 놓아 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아멘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가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주 앞에 경배해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우리 심령에 있어서 우리가 그 은혜를 들고 주님 앞에 나오게 해 주시고 주께 우리 심령에서부터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 할지라도 형식적인 예배에 떨어지지 않게 도와주시고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또 새로워지게 해 주시고 그 새로운 심령으로 우리 주님 앞에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 심령에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다시 한 번 저희가 누리고자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말씀 통해서 우리 각 사람에게 예배하신 주의 은혜를 내려주시고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경배해 드리는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네 이 말씀의 배경은 기본적으로는 북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사건이죠.
북이스라엘 이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이렇게 나눠져 있었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북이스라엘에는 이제 그 당시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에 남과 북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그래서 북쪽에 10개의 지파를 중심으로 해서 북이스라엘이 형성이 되고 남쪽에 이제 남유다가 형성이 되는데 그 이후로 북 이스라엘의 왕들이 총 몇 명이 이렇게 등장하게 됩니까?
19명 등장합니다. 그렇죠 남 유다에 몇 명 등장합니까?
19명 북 이스라엘에 19명, 남유다의 19명인데 남유다에는 이제 그 사이에 여왕이 한 분 등장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의 딸이었죠.

아달리아가 잠깐 이제 나라를 다스린 적이 있는데 그 여왕은 이제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역사가들이 이제 뺍니다.

그래서 위에 19명 아래에 19명 그래서 남유다 같은 경우에는 이제 몇 명의 왕들이 다윗의 어떤 정치적인 어떤 그런 면모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따라서 이스라엘을 통치하려고 했던 그런 모습이 이제 남 유다에서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었는데,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했던 북이스라엘의 19명의 왕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그래서 어떤 다윗의 어떤 하나님이죠 그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이제 속에서도 하나님을 그래도 조금 이제 섬기려고 했던 예우 같은 사람이 있고 또 훨씬 이제 말하자면 어떤 정도를 넘어서는 그렇죠 아합과 같은 그런 왕이 또 등장해 가지고 이스라엘이 하나님도 그래도 계속해서 섬겨가는데 그래서 이 혼합적인 어떤 종교 수준에서 나중에는 아예 그냥 우상을 섬겨버리는 그렇죠 노골적으로 그런 모습까지 나타나는데 아합 시대 때만 해도 벌써 그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합을 이어서 여브라함이 왕이 돼요 되는데 요브람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종교적인 어떤 개혁도 조금씩 단행을 하고 신앙으로 조금 돌아오려고 하는 그런 모습은 있었습니다.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여로보암이 갔던 길 그렇죠 그 어떤 우상을 숭배하는 그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이제 그런 모습을 보게 되고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어떤 영적인 실상이 그 당시에 이제 그리 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기본적으로 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여환기서를 보게 되면 북이스라엘의 역사가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역대기에는 북 이스라엘의 역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나 열왕기에서 북 이스라엘의 역사가 많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열환기를 이렇게 읽다 보면은 왕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짤막짤막하게 어떤 요약하는 어떤 느낌으로 막 지나가는 걸 느끼고 그렇죠 주로 어떤 이야기들이 막 길게 길게 나옵니까?
주로는 선지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죠.

그래서 북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그 전체 나라의 하나님의 통치가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 그 시대에도 내려지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유다 같은 경우도 물론 왕들을 옆에서 보좌했던 도왔던 선지자들이 있어요.
그런데 남 유다의 역사를 보면은 그래도 왕들을 중심으로 한 어떤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요.
히스기야와 나중에 요시아와 같은 왕들 이렇게 이야기를 보면은 그 왕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잘 섬겼는가 그래서 마치 왕들이 하나님의 뜻을 듣고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에게 그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어떤 선지자적 사역도 왕들이 다 해버리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죠 다윗 시대 때 그렇게 했던 것처럼 솔로몬이나 그래서 왕적 하나님의 통치가 남유다는 그렇게 왕과 제사장과 그런 또 옆에서 함께 했던 선지자를 통해서 드러났고 북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거의 엘리네아나 엘리사를 중심으로 한 선지자적 사역이 주였구나 하는 것을 이렇게 보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그 전체 나라를 아 그런 방식으로 통치하셨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이제 과정 속에서 북이스라엘의 여호람 시대 때에 일어났던 한 사건이 여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이제 북이스라엘의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아까 말씀드린 그런 하나님의 통치의 어떤 대행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여기서 보면 마치 왕이 선지자를 자기의 아버지처럼 이렇게 그 어떤 위치가 그렇게 높여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동시에 그 당시에 이스라엘의 왕이 그만큼 영적인 어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영적인 권위 자체가 추락해 있는 그런 것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말하자면 영적으로 볼 때는 어린아이와 같은 거죠.

그런 모습 서로 이렇게 하나님의 어떤 통치의 대행자로서 사실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이야기하고 논의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그런 어떤 모습이 사실 나타나야 되는데 전혀 이렇게 그런 모습이 없고 말하자면 주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선지자와 이렇게 대화하고 논의하는 그런 모습이 없고 선지자가 어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보여주거나 말씀하면 그걸 그냥 이제 그대로 이렇게 받아서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뭔가를 이렇게 하기는 하는데 그 하나님의 뜻을 전체적으로 헤아리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행동만 이렇게 그렇죠 하는 그런 어떤 이제 모습도 보게 되는데 하여튼 이러한 시대에 이제 엘리사가 사마리아 위에 한 20kg 정도 떨어진 곳에 도단이라는 곳에 이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도단 성읍에 이렇게 살고 있었는데 음 사마리아는 당시 북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했던 곳이고 그 위에 한 20킬로 정도 북쪽 그러니까 위에 이스라엘을 보면은 갈릴리 호수 있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약간 더 아래쪽입니다. 아래쪽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들 볼 때는 약간 이쪽인 거죠.
이쪽에 나사렛도 있고 그 밑에 또 도단도 이렇게 있게 되는데 나중에 한번 이제 지도를 한번 찾아보면 좋겠죠.
그래서 도단성에 있었는데 아람은 이제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어떤 면에서는 압박하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주된 이유가 뭐냐 하면 이쪽에 그 결국 이제 사마리아가 사마리아의 입장에서 동쪽으로는 국제적인 무역로가 있었어요.
왕의 대로라고 있었고 또 서쪽으로 해변가로 해서 그렇죠 그쪽도 저 위쪽에서부터 쭉 밑에까지 내려오는 애굽까지 이어지는 또 국제적인 도로 두 개의 큰 도로가 있는데 그 중간에 사실 사마리아가 있기 때문에 다메속은 어디에 있었냐 아람은 어디 있었냐 하면은 저쪽에 다메섹 쪽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약간 여러분들 그쪽에서 보면 북 북동쪽이죠.
북동쪽 약간 북동쪽으로 이렇게 있었습니다. 이제 그 아래쪽으로 모압과 앞문이 있었고 그 밑에 이제 또 에돔이 있고 그랬는데 어 그 어 국제적인 교역로를 차지 확실하게 확보하고 차지하려고 하는 어떤 그런 어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이고 어떤 경제적인 그런 야심을 아람은 포기할 수 없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아람이 북이스라엘을 결국 침공해서 어 정치적으로 압박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거를 다 얻어내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예 그러면서 이제 아람이 북이스라엘을 계속해서 공략해서 오게 되는데 그 당시에 이제 아람이 여러 이제 방식으로 군사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공략을 했어요.
근데 공략하는 곳마다 뭔가 이상하게 잘 안 되는 거예요.

지 어떻게 뭔가 우리 안에 첩자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자기들이 어떤 군사적으로 구사하는 그런 전략을 벌써 다 알고 거기에 맞게 군인을 매복해서 이스라엘이 자기들 탁 치는 거죠.
그러면서 매번 어떤 전략이 실패로 돌아가는 그런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문제냐 하고 지금 이제 그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우리가 계속 지느냐 하니까 그 밑에 있던 부하들이 이제 어떤 정보를 이미 취합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도 안에 있는 엘리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죠 왕에게 얘기해요.
엘리사 때문에 그렇습니다. 엘리사에 대한 소문이 아마 알 만한 사람은 그 당시에 알았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 6장 공부하는데 5장에 보면 어떤 사건이 있습니까?
5장에 보면은 아람의 군대 장관 군대 장관하면 당시 군대의 최고 수장이에요.

최고 수장 총사령관 그 사람이 문둥병 걸려가지고 어떻게 어떻게 자기 나라에서 막 해보려고 하다가 안 돼요.
못 고쳐요. 그래서 이제 결국은 그 군대 장관의 밑에 있던 여종이 이스라엘에 가면은 엘리사라는 분이 있는데 거기 가서 한번 도움받으면 좋겠습니다.
제안했을 때 이제 그걸 받아들이고 가거든요. 그렇게 해서 이 아람의 군대 장관 나만이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 문둥병에서 낳는 사건이 5장에 등장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람의 상당한 어떤 특히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 같으면 엘리사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 딱 아는 거죠.
말하게 말은 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1 2 4를 너무 높여버리면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어떤 면에서 모독하는 것이 되고 그만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국력이 좀 이게 떨어질 수 있는 왕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면이 있는데 아마 왕이 알았을 가능성도 되게 높습니다.
나중에 나만이 이스라엘로 갈 때 왕에게 그걸 보고하잖아요.

보고해서 그 사람에게 가서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하는 이야기까지 하고 가기 때문에 알았을 텐데 어쨌든 그 왕이 제대로 알았으면 제가 왕이었으면 이스라엘의 공격을 안 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엘리사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이거는 보통 일은 아니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이제 그 능력을 이렇게 뭔가 이렇게 나타나는 사건들이 있게 되면 어 이것을 우리가 믿는 신과 저들이 믿는 신의 어떤 대결 이런 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그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이 아람이 섬기는 신보다 확실히 강하다는 것을 이렇게 그 사건을 통해서 이미 확인이 됐기 때문에 정상적인 아람 왕 같으면은 이스라엘을 함부로 이렇게 공략할 적어도 엘리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아람의 왕이 이제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도 사실 보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제 이스라엘을 공략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엘리사가 문제였던 거죠.

그래서 많이 고민을 했을 것 같아요. 이걸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엘리사라고 하는 사람이 군대 장관을 고쳤던 사람 아마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 어쨌든 이제 왕이 생각한 것은 그 엘리사를 일단은 거기 가서 잡아오자는 그거였습니다.
잡아오자. 그래서 군대를 보내서 엘리사가 거하는 도단성을 완전히 군대가 어떻게 해요?
에워쌉니다. 에워 싸서 거의 엘리사 같은 경우에는 이제 뭐 체포되는 것은 심각 문제인 그런 상황에 딱 되게 되는데 그때 그 광경을 엘리사와 함께 했던 사환이 여기 보면 청년이라고 나오는데 청년이 딱 봐요.
딱 보니까 어 아람의 군대가 자기가 거주하는 성을 다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면서 와 우리 이제 끝났구나 죽게 됐구나 그렇게 절망하고 있는 그 청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때 엘리사가 이제 청년에게 그러죠. 기도하죠.
먼저 저의 주님 저의 청년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걱정하지 마라 하면서 그때 그 청년이 눈이 탁 떠지죠.
떠져서 뭘 봅니까?

눈이 떠져서 불말과 불변거가 거기에 더 많이 그 쫙 있는 것을 딱 봐요.
그러니까 엘리사는 이미 그 병거와 불말이 이미 자기를 보호하고 있는 걸 다 보고 있는 거죠.
그렇죠 그걸 이미 보고 있는 겁니다. 보면서 주님 제가 본 것을 저 청년도 보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한 거죠. 그래서 그 청년도 눈이 떠졌을 때 그걸 본 거예요.
이 사건은 이제 아주 간단합니다. 그러니까 엘리사가 또 기도하죠.
그래서 그 포위된 포위한 그 군인의 또 눈이 다 멀게 됩니다.
자기들이 어디에 와 있는지 파악을 못하는 그런 상태가 되고 너희들이 찾는 사람은 여기에 있지 않고 저쪽에 있으니까 나를 따라와라 그러죠.
그래서 그 군인들을 데리고 어디로 갑니다 어디로 가요?
사마리아로 갑니다. 사마리아는 어떤 곳이죠? 이스라엘의 왕의 군대가 주둔해 있는 곳 그러니까 자기 그 아람의 군대 입장에서 볼 때는 적진의 그 한가운데로 딱 들어간 거예요.
이거는 뭐 자기들이 이제 죽게 생겼어요.

자기들이 포위된 거예요. 그래서 왕이 명령만 하면 바로 그냥 몰살시킬 수 있는 그 상태로 딱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그때 이제 왕이 묻죠. 이스라엘의 왕이 어떻게 할까요?
그렇죠 명령만 하면 그냥 죽이는 건 시간 문제죠. 이제 그때 엘리사가 그렇게 하지 말고 그들을 좋은 음식 먹여서 편안하게 돌아가게 하라 그러죠.
그러니까 엘리사가 이 역사의 중심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이제 여기서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게 많은데 뭘 먼저 생각해야 되냐 하면 지금 이 역사의 중심에 누가 있냐면은 일리사간이 딱 있는 거죠.
엘리사가 있어서 아람의 왕과 그의 군대도 엘리사가 다 그냥 알아서 하는 거고 심지어 그들에게 이제 체포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군대에게 체포된 그러니까 사마리아의 여호람의 군대 입장에서는 체포한 쪽이잖아요.
그런데 그 왕이 해야 될 일에 대해서도 여전히 엘리사가 다 명령하고 지시하는 걸 볼 수가 있어요.

여기에서 우리가 뭘 먼저 생각하냐면 하나님의 이 말씀의 권위가 엘리사를 통해서 그렇게 나타나고 있었다는 거죠.
그겁니다. 하나님이 북이스라엘과 같이 우상을 섬기고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그렇죠.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신가 하고 생각할 만한 그런 시대의 이스라엘이었어요.
그런데 여전히 이 시대에도 엘리사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질적으로 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하는 거를 이 본문에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일단은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 구약의 이 사건을 오늘 왜 이렇게 다루려고 하느냐면 생각해 보려고 하냐면은 이 사건은 뭐냐 하면은 우리에게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스라엘을 살아서 통치하고 계신다고 하는 그런 어떤 영적인 안목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거든요.
이 당시 사람들에게도 이것은 오늘날 우리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똑같은 메시지를 주는 거죠.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죠 우리는 다른 것을 사실은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은 주로 우리가 신문 기사에서 보는 탑 뉴스에서 보는 그런 것들 과 관련된 사람과 어떤 어떤 권력이죠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이 세상이 이렇게 움직여가는 그런 느낌을 우리가 계속 받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이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딱 통치해 가신다.
이 세계를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세계의 완성 그것을 하나님이 바라보면서 이 세계를 여전히 이끌어가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죠.
이 말하자면 이제 나라 옛날 같으면 왕국 이 왕국에 사는 사람들인데 우리는 또 하나의 왕국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인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보면 항상 두 왕국 속에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이 이 자기가 속한 나라에 충실하게 살아가면서도 뭔가 이 사람들이 다른 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꿈꾸면서 막 살아가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저렇게 살아가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 살아가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뭐냐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눈이 떠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사환에게 엘리사가 저의 눈이 뜨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아 우리도 이걸 보면서 우리도 눈이 눈이 떠졌으면 좋겠다.
나도 눈이 떠졌으면 좋겠다. 영적인 눈이 활짝 떠줬으면 좋겠다 이런 이제 생각하는데 눈이 이제 더 떠져야 됩니다.
더 떠져야 된다는 얘기는 뒤에 하려고 그래요. 그런데 우리가 기본적으로 우리는 다 눈이 떠진 사람들이죠.

이게 이제 우리의 눈이 딱 떠지는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예수님을 처음 딱 믿을 때예요.
예수님을 처음 우리가 딱 믿으면 정말 눈이 이제 한 번 어 천지가 개벽하는 그림 같은 느낌을 받는데 눈이 탁 떠지면서 새로운 세계가 탁 보이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 믿기 전에는 제가 저도 성경을 고등학교 때부터 많이 읽었었습니다.
근데 왜 읽었냐 하면은 이게 경전이기 때문에 읽은 거죠.
경전 경전에 대한 존중감이 있었어요. 저 제가 스님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님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 법구경 법화경 뭐 이런 것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들이 보는 성경도 내가 존중해야 되겠다 해서 성경을 이렇게 보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여기에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믿어지지는 않죠.

그리고 믿어지지 않으니까 분명히 내가 성경을 나름대로 이해하면서 꼼꼼하게 읽은 것 같은데 나중에 예수님 믿고 나서 다시 보니까 내가 그전에 읽었던 것과 믿고 나서 읽는 것은 성경은 완전히 다른 성경이더라고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믿고 나서 보니까 그 한마디 한마디의 말씀이 막 정말 어떤 그냥 어 나와 내가 어떤 앞으로 깨달아야 될 어떤 진리의 체계 그런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성경 말씀이 나에게 이렇게 막 말씀하시는 음성으로도 들리고 말씀이 어떤 생명으로 막 와닿는 것 같고 말씀을 읽는데 막 안에서 기쁨과 힘과 어떤 생각의 어떤 변화 이런 것들이 막 요동친다 그럴까요?
그런 것을 보면서 이제 내가 이 성경이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하는 것도 알게 됐고 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훨씬 더 이제 눈을 뜨게 되는 거예요.
그때 눈 떠진 어떤 나 자신을 이렇게 생각해 보면 정말 놀라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후로 이제 성경을 계속해서 배워가면서 더 눈 떠진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그때 예수님 딱 믿을 때 주님이 어떤 분이시다 이런 분이시다 하고 봤던 거 있지 않습니까?
네 그때만 보고 그 이후로는 봤다고 하기 어려운 그런 부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놀랍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이렇게 눈이 탁 떠진 사람들인데 만약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내가 이 두 왕국 속에 살아가고 지금 하나님께서 실제로는 전체를 이렇게 통치하고 계시고 우리 특히 하나님의 통치가 어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시행해 가시는 그런 분이시거든요.
그래서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진행시켜 가시고 완성시켜 가시는지를 우리가 점점점점 더 이렇게 깨달아가는 그런 면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렇죠 그런 매니저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가 한 번씩은 내가 정말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이런 것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에 대한 그 지식에서 어떤 성장이 일어나지 않고 또 우리가 신앙이 성장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습니까?
성령의 열매는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은총이죠.
그 은혜 은혜를 충분하게 이렇게 받아가면서 하나님 과의 교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그런 열매들이거든요.
그래서 그 열매가 점점점점 더 풍성해지는 어떤 내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는데 그런 모습이 만약에 잘 안 나타나고 그러면은 내가 한 번씩은 이제 아 내가 참된 그리스도인인가도 생각은 또 해 봐야 되고 또 아니면은 내가 신앙이 아직도 어리구나 하는 거 어릴 수 있겠구나 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 되고 또 우리 내가 신앙의 어떤 성장이 성장의 어떤 속도가 좀 느릴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 부분들도 생각을 해보긴 해 봐야 됩니다.

어쨌든 예수 믿는 이제 우리들은 눈이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떠지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이제 이 과거에 엘리사 시대 때에 이 사환이 눈을 떠서 하나님의 세계를 어느 정도 경험하는 한 면을 경험하는 이런 방식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에 대해서 눈 떠지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눈 떠지는 일이 있었다면 우리 시대에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눈이 이렇게 떠지는 방식은 이때와 다르다는 것도 생각을 해야 됩니다.
네 우리도 이때처럼 그렇죠 눈에서 뭔가 불평가가 쭉 보여줬으면 좋겠다 막 그것만 생각하면 우리는 이제 안 되죠.
사실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것은 이제 좀 우리가 신앙이 어렸을 때 구약 교회와 우리 신약 교회는 이제 어떤 식으로 비유할 수 있냐 하면 구약 교회는 좀 어린아이와 같은 교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구약 교회를 지도할 때는 우리가 애기들 이렇게 책을 읽게 해줄 때 그림책을 이렇게 보여주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글자 많은 것은 나중에 읽히고 또 글자가 있으면 그것은 거의 패스하면서 그림만 막 보여준단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애들이 그 그림에 착착착착 이제 사진 찍듯이 이렇게 찍고 나중에 글자를 자꾸 보여주면서 그 내용을 뒤에 이렇게 설명해 주잖아요.
하나님이 구약 교회는 그런 식으로 이렇게 해요. 그리고 우리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성숙한 교회라고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어른이 된 이제 교회 그 어른이 어떤 점에서 어른이냐 하면 이제 계시가 구약에는 좀 이렇게 희미했는데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구약의 약속이 성취되면서 계시가 그냥 다 드러난 거예요.
너무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이 신약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 시 성경 전체의 이 계시를 이제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구약시대 사람들하고 비교하면 정말 눈이 활짝 꺼진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눈이 떠지냐면 기본적으로는 예수님의 그 말씀들을 쭉 들으면요.
눈이 이제 그냥 저절로 떠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 우리가 영적으로 딱 거듭나죠.
그래서 눈이 떠진 사람이 되는 겁니다. 눈이 다 떠져 있어요.
떠져 있는데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해 간다 이런 말을 하잖아요.
베드로후서에 보면은 그 성장해 가면서 우리가 하나님 영적 시야가 이제 넓어지고 깊어지게 되는데, 우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본적으로는 뭐냐 하면 성경에서 예수님과 그다음에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말씀을 쭉 공부하는 거 이걸 그냥 공부만 하면 이제 우리는 다 보여요.
그림을 굳이 안 보여줘도 돼요. 환상을 하나님이 이제는 안 보여주셔도 된다는 거죠.
그 환상을 이렇게 보여주잖아요. 우리에게 그럼 우리가 환상을 볼 수도 있어요.
근데 그것을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죠.

환상과 같은 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세계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그 풍성한 세계의 한 면인 거 단면이에요.
그러니까 오히려 그런 것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에 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그것보다 그 양이 너무나 이렇게 작고 미약하기 때문에 미흡한 거죠.
사실은 하기 때문에 그것에 우리가 마음이 이렇게 빼앗겨서 성경을 통해서 배우는 일이 소홀히 된다든지 그런 부분이 누락된다면 실제 손실이 훨씬 더 커지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눈 떠지고 싶은 사람 눈 떠져야 돼요.
이게 눈 떠지려고 하는 이유도 이제 좀 이따 우리가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근데 기본적으로는 성경을 계속해서 배워가면서 하나님이 결국은 말씀을 통해서 어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이 베풀고자 했던 하나님의 그 경륜이 있습니다.

그 경륜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쭉 말하자면 읽으면서 그 내용을 파악하면서 그 하나님의 세계를 계속해서 우리 스스로 이제 스케치해 갈 수가 있는 거죠.
조용히 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 가는 과정에서 이제 우리에게 추가적으로 뭐가 요구되냐면 이제 이 부분도 항상 기억하고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그래서 지식적으로 우리가 공부해 가는 것이 되게 중요해서 그렇게 해 가는데 이것을 해 갈 때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된다는 거죠.
그 부분이 약화되면 그 부분이 소홀히 되면 지식적으로 많이 아는데도 실제로 그 지식이 우리의 것으로 완전히 체화되는 데는 한계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본적으로는 뭐냐 하면 한국 교회 같으면은 성경을 공부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충분치 못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이 시야가 제한되거나 좁아져 있는 그런 면이 일단은 많습니다.

한국 교회 같으면은 결국은 성경을 잘 몰라서 좀 더 성경을 공부했으면 쉽게 해결되는 부분이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는 거 일단은 그게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부분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때로는 어떤 경향이 있었냐 하면은 지난번에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우리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경을 정말 잘 알았던 때가 있어요.
우리보다 교리에 대해서 너무 밝고 박식했던 교인들이 그런 시대가 또 있었어요.
그런데 그 시대가 영적으로는 대단히 메마르고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보는 눈이 어두워져 있었던 지식적으로는 분명히 성경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아는데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안다 그러면요.
이 성경을 안다고 그러면 기본적으로 뭘 아는 거냐면 교리를 아는 겁니다.

교리를 아는 거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어떤 눈으로 봐야 되느냐 할 때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준 그 내용이 우리 교회가 상속해 온 웨스트미드 신앙 고백서라든지 대소 요리 문답이라든지 하이드 벨 요리 문답, 벨직 신앙 고백서, 도르토 신조 이런 것들이거든요.
그게 성경을 우리가 좀 더 정확하게 보는 안경이에요.
자신정경 그거를 충분히 그래서 공부해서 성경을 보면 성경을 어떻게 봐야 되는지가 선명하게 이렇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이 떠진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교회가 교리를 배우는 거다 이렇게 말해도 크게 틀리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교리를 잘 그래서 배우거든요. 교리를 배워요.
배우는데 그래서 교리 그 한 구절 한 구절까지 아주 꼼꼼하게 이렇게 배워가고 심지어 그 교리 하나하나 속에서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떤 논쟁이 있었고 그 교리가 적립되기까지 어떤 어려움과 어떤 반론들이 있었는지 그런 것까지도 꼼꼼하게 공부한단 말이죠.

그렇게 해서 고리에 대해서 정말 잘 아는 교회가 있었어요.
우리 시대 말고 한 1700년도 초 600년도 중후반에 교회들 보면요.
유럽의 교회들은 정말 교리에 밝은 그런 교회들이었는데 그 교회가 영적으로 대단히 메말랐다는 거죠.
신앙적 형식에 딱 떨어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하고 비슷해졌냐 하면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하고 비슷해진 것 같아요.
많은 것을 아는데 실제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이렇게 먼 그런 모습이 이 교리를 잘 알고 성경을 잘 아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인들 속에도 나타날 수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이제 조심하면서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 돼야 되고 그래서 저도 이제 성경 공부하고 그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내 신앙이 그렇죠.

성경을 아는 만큼 그것이 유지되기를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내가 어디에 좀 더 늘 힘을 쓰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되나 하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제 나름대로 내린 어떤 결론이 뭐냐 하면요.
기본적으로는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는 겁니다. 기도를 일단은 늘 해야 된다.
기도를 잘못하고 있어도 그래도 기도를 계속해야 된다.
네 기도를 쉬지 않으면서 그러면서 성경을 계속해서 읽어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성경을 읽어가다가 시간 나면 기도하면 뭐 그래 또 좋아요.
그렇게 또 해야 돼요. 그래서 실제로 이제 기도하면서 성경 읽고 성경 읽다가 은혜 받으면 또 기도하고 이렇게 이제 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는 어떻게 접근하는 게 제가 볼 때 좋으냐 하면 기도를 늘 해야 된다 하는 생각을 딱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이제 성경을 읽을 힘이 생겨요.
그 성경이 이제 읽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읽는 것도 힘들고 사실 기도하는 것도 힘든데 더 힘든 걸 하나 고르라고 그러면 제가 볼 때는 성경을 실제로 읽는 게 더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찬양을 우리가 이제 같이 하지 않습니까? 이 찬양은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짧은 시간 안에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경험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수단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이렇게 하나 되게 하고 이스라엘이 성령의 어떤 충만한 원래 공동체 되기를 바랐던 분이시거든요.
하나님이 근데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을 어렸을 때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그렇죠 어떻게 그들을 지도했냐면은 찬양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막 성경 읽고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전부 다 대학생들 같아요.
너무 수준은 높게 사실 공부하는데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게 성경이 없지 않습니까?

그냥 부모님들이 암기하라고 하면 암기하고 그랬을 텐데 그 이스라엘을 전체적으로 교육하는 데 있어서 실제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것이 잔양이에요.
자양 그래서 이스라엘이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셨던 그 말씀을 그 속에 담아서 그 찬양을 부르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다시 기억하고 출애굽 하면서 그렇죠 어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시면서 먹이셨는지를 찬양 속에 다 담아서 그것을 같이 찬양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았는데 찬양을 우리 시대에도 늘 가까이하는 것이 참 여전히 중요하고 우리가 심령이 이렇게 한 번씩 메마를 때 짧은 시간 안에 우리의 심령을 다시 이렇게 회복하는 데 너무나 좋은 효과적인 방식인데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또 어떤 교회들은 이 찬양을 일상 속에서 부르는 것이 좀 이렇게 잘 안 되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교회들도 있고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제 세상아 교회에서 같이 저희 찬양 이렇게 부르면서 저도 어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이 은혜로운 찬양을 너무 안 버리고 살았구나 그래서 많이 생각하게 되고 우리 이제 여기서 예배드릴 때뿐만 아니라 좀 더 내가 나도 일상 속에서 찬양을 많이 덜 들으면서 그래서 제 목표가 뭐냐 하면요.
하루에 꼭 찬양을 한 개 듣는 거예요. 한 개 듣기 근데 그게 참 정말 은혜롭습니다.
이렇게 생활하다가 마음이 힘들 때 찬양을 딱 들으면 그 마음에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금방 회복이 되고 마음의 질서가 다시 이렇게 탁 잡힙니다.

그런 걸 보면서 내가 왜 이 좋은 것을 그동안 꾸준히 하지 않았나 그래서 찬양 듣는 것 그다음에 그다음에 이제 그와 함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적으로는 좀 더 마음을 들여서 읽는 것 여기까지 이제 계속해서 어 해 내야 되겠다 해야 되겠다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우리가 그렇게 해서 신앙이 이렇게 한쪽으로 이렇게 쏠리지 않게 그렇죠 불균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과 또 기도하는 것 이렇게 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그 내면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모습 은혜와 생명력이 우리 안에 이렇게 늘 가득한 그런 모습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이렇게 살아가야 된다는 거죠.
이런 것도 어떤 거냐 하면요. 눈이 좀 더 떠져서 이렇게 생기는 거예요.
저도 눈이 조금 더 떠져가지고요. 이렇게 해야지 좀 더 균형 잡힌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좀 더 이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눈 떠진 한 사람의 이렇게 모습 속에서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점점점점 세월이 가면서 하나 하나님의 세계와 또 하나님의 그 하시고자 하시는 일들을 알고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이해하면서 그 속에서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이 하나님 그 뜻에 순종하면서 헌신되어지는 그 모습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잘 알아야 우리가 거기에 이 같이 보조를 맞추면서 같이 이렇게 나가는 거죠.
그렇게 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냐면 마치 사환이 이제 눈이 떠져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뜻을 갖고 일하시는지를 알고 거기에 우리가 탁 발을 맞출 때 그렇죠 그때 우리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돼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래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뭔가 열심히 하는데도 어떤 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잘 경험하지 못하는 거죠.

뭔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원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강물에 풍덩 빠져서 막 그냥 둥둥 떠가는 사람이거든요.
편안하게 보트 이게 뭐죠? 이거 이거 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둥둥 너무 신나잖아요.
그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이미 임해져 있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에 흐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맡겨서 가면 되는 그런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요. 막 그것을 헤엄을 치고 막 가려고 해요.
물살이 일로 오는데 따라가지 않고 반대로 막 가는 거예요.
그런 분들이 대표적인 분들이 누구냐 하면요. 알미니안들이에요.
예전에 그러니까 우리 칼빈주의와 이제 알미니아를 이렇게 구분해서 보면 볼 수 있는데 사실 우리 알미니안적인 신학 토대 위에서 형성된 교회가 대표적인 교회가 감리교회죠.
감리교회입니다.

그래서 그게 그 알미니안이 뭐 그쪽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우리하고 우리가 그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을 함께 가치 있게 생각하는 그런 부분들 많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그렇죠. 그 말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하는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같이 공유하는데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있냐 하면은 하나님의 은총을 이렇게 받고 누릴 때 알미니안과 우리의 큰 차이가 뭐냐 하면은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지 믿음도 생기고 그래요.
우리는 그런데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어떤 주권을 따라서 하나님은 일하신다 하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근데 거기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하시는 것도 인정하는데 그것을 결정짓는 것 그것을 내 것이 되게 하고 나에게 가져 내가 그것이 가져오려고 할 때 그때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습니다 하고 내가 결정하는 거 있지 않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우리는 선물로 주셔서 믿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그분들은 주님 제가 믿겠습니다. 그래요.
믿습니다를 되게 이제 강조하죠. 믿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자면 믿어지지 않는데 막 쫙 믿으려 버려요.
그것도 참 기특하고 훌륭한 겁니다. 제가 볼 때는 때로는 우리도 안 믿어지면 그렇게 해야 돼요.
제가 볼 때는 안 믿어지면 다 믿으려고 해야 돼요. 근데 우리는 그러면서도 어떤 것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냐 하면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서 어느 시점이 되면 믿음을 딱 주세요.
그거를 주시는 방식이 뭐냐 하면 은혜로 주세요.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또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받지 않습니까?
은혜를 계속해서 받으면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가 믿음이 나도 모르게 탁 생겨 그러니까 예전에는 믿으려고 해도 안 믿어지는데 어느 시점이 되면 그냥 믿어지는 거죠.
안 믿어지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것처럼 그래서 저절로 이렇게 탁 믿어지는 나 자신을 보게 되거든요.

이게 어떻게 그 과정이 일어났냐면 하나님의 은혜를 그냥 계속 받는 거죠.
근데 이쪽에 있는 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 내가 이렇게 가지고 오려고 그래요.
내가 당기려고 간다는 거죠. 그래서 내가 그것을 하기 위해서 뭔가 내가 하나님 앞에 그것을 얻을 만한 어떤 요건들을 자꾸 만들려고 그럽니다.
좀 더 내가 하나님 보실 때 좀 더 기특하게 살아서 그거 가지고 나아가서 뭔가 하나님께 청구서를 내밀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이제 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하는 마음이 들 그분들 마음에 좀 쉽게 생길 수가 있어요.
안 그런 분들도 물론 많은데 그런 마음이 그들이 갖고 있는 어떤 기본 체계로만 보면은 그런 식으로 신앙이 나타나기 쉬운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끊임없이 뭐냐 하면 우리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뭘 생각하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어떻게 은혜 베풀어 주셨는지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지를 계속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 믿음의 단계까지 가는데도 우리는 즐겁게 가는 겁니다.
즐겁게 계속해서 은혜를 생각해요. 하나님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가요.
계속 가요. 그런데 어느 시점이 딱 되면은 내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믿어지고 있는 자신을 딱 발견하거든요.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다 하셨습니다. 하면서 그렇잖아요.
우리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거든요. 내가 한 게 없기 때문에 계속 은혜 받은 것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 우리가 영광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이게 우리가 잘 믿으려고 하는 정말 우리 믿음의 선배들 종교 개혁자들이 우리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특히 카톨릭 기념도 이제 기본적으로는 알비니아고 비슷하거든요.

알미니안 신학과 카톨릭의 신학이 기본적으로는 거의 같아요.
그래서 우리 종교개혁자들이 그 종교개혁적 신앙적 전통 속에서 어떤 면에서는 율법적 어떤 신앙의 너무너무 고통스럽게 살다가 어느 날 눈을 뜬 거예요.
대표적인 분이 마틴 루터 같은 분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그래서 결국 우리 교회가 그렇게 눈이 어떤 때는 어두워졌다가 그렇죠 다시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눈이 확 밝아지는 그런 역사적인 역사도 우리가 우리 교회는 갖고 있는데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인들을 살려고 하는데요.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보면은 아직도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아요.
한국교회 장로교회조차도 많이 율법주의화돼 가지고요.
뭔가 내가 하나님 앞에 잘한 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는 그게 우리의 타락한 보성하고 아주 잘 맞아요.

그래서 그걸 자꾸 하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게 힘들어요.
신앙생활이 사실 뭐냐 하면 그런 어떤 태도를 버리기 전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싶어도 주기가 힘들어요.
그런 사람한테 은혜를 주면 큰일 나거든요. 네 그렇겠죠 그렇죠 큰일 나요.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주고 싶으 하나님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은혜를 주고 싶으시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있을 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지 못하셔서 안타까워하신단 말이죠.
근데 우리가 그래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물려준 이 참된 신앙과 가르침을 우리가 정확하게 배우는 것은 여전히 이제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기본적인 좋은 그 어떤 방향성을 딱 갖고 이제 우리는 뭘 하면 되냐면 열심히 기도하면 됩니다.
그럼 기도하면서 은혜를 계속 누리고 하나님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또 믿음을 더해주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이 굉장히 많으세요.

저는 이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가 그렇게 가야 된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좋은 신앙 이미 좋은 어떤 가르침을 잘 공급받은 그런 교회는 이제 그걸 너무 또 정교하게 또 더 다듬으려고 하지 말고 그거 하다가 세월 다 가요.
살아야 되는데 그런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런 교회들은 이제는 뭐냐 하면 기도하러 나가라는 거죠.
기도의 삶으로 이제 나아가서 그동안 배우면서 창고에 저장해 놓은 그 풍성한 장작 장작 그걸 창작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의 생명력을 충만하게 하시는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는 그 도구로 하나님이 그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사용하시는 분이거든요.
그것을 불붙게 하고 그것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수단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기도예요.
기도 기도 그래서 말씀과 기도가 결국 우리 한국 교회 속에 다시 풍성해지는 그래서 우리 교회는 그러면 어떤가 한번 또 생각해 보고요.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조금씩 차이가 있고 우리 교회 전체적으로도 보면은 기도가 부족할 수도 있고 말씀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두 가지를 같이 잘 이렇게 힘써가면서 결과적으로는 뭐냐 하면 우리 속에 성령님께서 결국 이루어 가시고자 하시는 이 하나님의 나라의 나라와 관한 나라의 관한 일들을 우리가 잘 알면서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리 자신을 잘 맡겨서 정말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그 하나님 역사들 특히 그것이 이제 어디서 나타나냐면 어 이 교회가 교회로 에서는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렇게 충만해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또 우리를 통해서 이 복음이 강력하게 이렇게 확장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것이 우리가 제대로 하면 교회가 그게 나타나요.
복음이 우리를 통해서 확장되는데 그러면 우리 이제 나가서 전도해야 노방 전도 해야 되나 뭐 이렇게 이제 생각하기가 쉽네요.
그것은 이제 뭐 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는 전도의 최전선은 어디냐 전도의 최전선은 우리 교회입니다.
교회 이 예배의 현장이에요. 항상 이걸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 속에서부터 복음이 확장되어져 가고 우리 속에 확 말하자면은 충만하게 임한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우리가 살면서 이렇게 살아보면요.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복음을 듣고 싶어 해요.
예 소개받고 싶어 하고 내가 복음을 이렇게 말해야 될 말하기 싫은데도 말해야 되는 상황이 계속해서 생겨요.
예 그렇습니다. 나에게 묻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 교회 전체를 통해서 확장되어져 가는 역사들을 우리가 이제 보게 되거든요.
그것이 우리 교회가 결국은 그런 하나님의 세계에 좀 더 이렇게 잘 눈 떠야 되고 그렇죠 우리가 이제 점점점 사람 눈 떠 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잘 보면서 정말 하나님이 해가시는 일에 우리 자신을 잘 맞춰서 거기에 순종해 가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이 정말 함께 누리고 싶어 하시는 거 함께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서 우리와 정말 잔치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그런 은혜의 역사들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눈 뜬 사람들 되게 해 주시고 또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그 모든 경륜을 아는 사람들로 성장해 가야 한다는 것도 생각해 보게 되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큰 구원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함께 참여하고 순종하면서 그 은혜의 역사들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될 사람들인 것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세상활 교회 속에 놀라운 주님의 은혜가 나타나게 해 주시고 우리가 그 은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나타나게 될 때 우리가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더욱더 경배하는 그런 모습 우리 가운데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