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새생활교회 당회장 박주동 목사

예배/말 씀

예수님의 탄생(성육신) … 마태복음 1장 18-25절 … 박주동 목사

예배하는 사람 2025. 12. 22. 00:03
박주동 목사

 

 
251221말씀
예수님의 탄생(성육신) … 마태복음 1장 18-25절 …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장 18절부터 25절까지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부터 25절까지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음에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주 앞에 우리가 함께 경배 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 은혜를 힘입어서 저희가 주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게 해 주시고, 또 주께서 은혜를 더하여 주셔서 우리 마음에 큰 기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오늘 저희가 성탄에 관한 말씀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2월 25일, 그리고 성탄절이라 해서 함께 기념하며 주님의 탄생을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데, 오늘 우리 교회가 그 주님의 탄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깊이 헤아리고자 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시고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 우리 주님의 탄생에 큰 은혜와 기쁨이 채워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말씀은 이제 우리가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말씀이 두 군데 나옵니다.
마태복음과 또 어디에 나오죠? 누가 복음에 나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게 되면 그 내용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요셉을 중심으로 해서 기록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고, 누가 복음 같으면 누가복음 1장에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서 마리아를 중심으로 해서 소개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탄생하고 나서 동방 박사들이 와서 예수님께 경배하는 그런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누가 복음 같은 경우는 어 예수님이 탄생하고 나서 누가 이렇게 찾아옵니까?
목자들이 찾아와요. 그렇죠 그래서 조금 달라요.

그래서 누가 복음은 좀 더 어떤 면에서는 그 시대가 굉장히 어두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이 힘들고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그런 어떤 시대이고 그 시대의 그런 아픔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로 사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한번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 그 당시 가장 소외되고 마음이 낮아져 있는 또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져서 사실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큰 기쁨이 이렇게 임하는 것을 보면서 누가 복음이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러 오시는 그래서 섬기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누가 복음 앞부분에서부터 벌써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 마태복음 같은 경우는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봤듯이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이다 하는 것을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확실히 여기에서도 예수님의 이제 1장의 계보를 우리가 살펴보게 되면은 누가 복음의 계보와 다르게 요셉을 중심으로 한 계보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고 또 오늘 이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요셉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님이 왕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상당히 의도를 가지고 치밀하게 마태복음서를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되냐면은 마태가 이것을 기록할 때는 마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기록하는 거죠.
그렇죠 그런데 그 마태의 의도가 우리는 어떤 것으로 인정해야 되냐 하면 하나님의 영감 하에서 의도됐다고 하는 것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것을 의도해서 이렇게 하는 것과 마태가 의도해서 하는 것은 다른 거죠.
그렇죠 마태는 사도입니다.

사도가 그것을 의도해서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영감하셔서 우리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것을 명확하게 하셨다고 하는 점을 잘 생각하면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그래서 마태가 의도한 것 때문에 어떤 성경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영감 가운데 성경의 어떤 모적인 부분을 명확하게 하셨다 하는 것도 생각하면서 말씀을 봐야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마태가 이런 어떤 의도 가운데 마태복음을 기술하고 있어서 우리가 마태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마태복음을 보게 되면 마태복음을 저술한 그 마태의 의도에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는 면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그 학자들이 어 마태복음 전체적으로 마태가 의도하고자 했던 바가 뭔지에 대해서 사실 면밀하게 들여다보면서 그걸 밝히려고 노력을 많이 해 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걸 다 배울 필요는 없고 마태가 어떤 의도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데 그 기본적인 어떤 큰 특징 중에 하나가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오셨다 왕으로 오셨다고 하는 점을 정말 강조하려고 했구나 하는 것.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마태는 어떤 표현을 많이 쓰냐 하면 1장 22절에 우리가 읽은 본문에 22절에 보면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 과거에 주께서 선지자로 이런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는 이 표현을 마태복음에서는 몇 번 사용하냐면 전체적으로 10번을 사용해요.
그러니까 다른 복음서는 거의 그런 말을 쓰지 않는데 뭐 다른 데도 쓰기는 씁니다.
그런데 마태는 유독 많이 써요. 그리고 1장과 2장에 두 장에 몇 번이 벌써 나타나냐면 5번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1장에 한 번 2장에 4번을 사용해서 주께서 선지자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표현 성취 형식 인용구라고 해요.

이거 그래서 이 표현을 사용해서 마태가 뭘 강조하려고 하냐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러 오신 그 그리스도다.
특히 구약의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메시아에 대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는데 그 구약의 메시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에 성취자로 오신 분이 바로 이분이다 하는 거를 이스라엘 백성들한테 많이 강조해 주고 싶은 거예요.
특히 아마 마태복음에 수신자들 이 편지를 이제 받는 사람들은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아마 그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상당히 유대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대단히 반유대적인 그런 면들이 다 두 개가 이렇게 동시에 공존하거든요.
그 다른 어떤 책들보다 기본적으로는 유대적인 색채가 굉장히 강하다는 거죠.
마태복음은 그래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딱 들었을 때 금방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논리적인 방식을 사용한다는 거죠.

그래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선지자를 통해서 주셨는데 그 성취된 그 말씀을 성취한 성취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하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아다 하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가 한번 먼저 이렇게 주목해 볼 만한 말씀이 이제 22절 말씀인 거죠.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하면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장 말씀을 인용한 거거든요.
7장 14절 말씀인데 이게 우리가 이 말씀을 이렇게 보면 좀 주의 깊게 보면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말씀에서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렇게 하셨기 때문에 이 예언의 말씀에 따라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지 않을까 이렇게 예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을 우리가 여기 보면은 그분의 이름이 예수라 하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이제 달라요. 일단은 예수라 하라 하는 말은 이 표현은 이제 헬라식 표현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이 히브리식 표현으로 하면은 여호수아죠.
예수아 이렇게 여호수아 그러니까 그의 이름을 여호수아 여호수아라고 하라는 거죠.
과거의 여호수아하고 같은 이름으로 그렇게 해서 그 이름은 이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이런 이름인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목적과 부합한 이름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실 하나님의 백성들 될 사람들이죠.
그들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셨다고 하는 것을 그 이름이 잘 표현해 주고 있는데 그러면 임마누엘이라고 한 이 예언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제 의문을 갖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의 어떤 사역을 통해서 이 예수님의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을 통해서 성취됐다고 한다면 그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그 사역을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라고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렇게 존재하시는 이 방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뭘 하셨냐면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때부터는 함께하기 시작했다는 거죠.
이것이 아주 이제 독특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전에도 구약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약의 하나님을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다가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하나님이 임재하신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그곳조차도 하나님이 다 없애버리시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볼 때는 어떤 느낌을 금방 가질 수 있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다가 어디로 가신 거예요?
자기 집을 다 없애버리시고 여기 나 너희들과 같이 살기 싫다 하고 가버리신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막 포로로 가고 더 이상 하나님이 어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왕이거나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아버지로서의 그 역할을 안 하시는 것 같거든요.
물론 그때도 하셨죠. 하나님은 그때도 계속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다 하고 생각했던 그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사실 이스라엘과 계속해서 함께했던 분이시죠.
함께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전을 다 부신 거예요.
그게 이제 다른 나라가 와서 물론 훼파되는데 그렇죠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지고 훼파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여전히 그 앗수르나 바벨론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박살 내신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절대로 망할 수 없는 패할 수도 없는 그런 나라예요.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딱 한 팀이 딱 되면 그 팀은 절대로 이길 수가 없어요.
다른 나라가 그렇죠 지난번에 산헤립 같은 앗소르의 대군이 와도 못 이기잖아요.
그 정도로 막강한 나라예요. 하나님이 함께하는 나라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완전히 박살난 거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셔 가지고 왕국으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심판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신 거예요.
그리고 나머지 열국들은 하나님이 그냥 다 쓰신 거예요.
하나님 막대기입니다. 막대기 성경에 막대기 지팡이라고 나오잖아요.

이스라엘을 혼내는 채찍 막대기 그죠 그렇게 하나님이 쓰셔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하셨는데 그러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난 것 같은 그 역사 속에서도 사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는데 그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이제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그런 거죠.
이제 내가 다시는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볼 때는 하나님이 막 이렇게 계신 것 같고 어떤 때는 계신 것 같고 어떤 때는 또 막 훌쩍 떠나시는 것 같고 어떤 때는 굉장히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를 잘 다스려주는 정말 평강과 평화로 다스려주는 왕 같은데 어떤 때를 보면 너무 무섭고 그래요.
하나님이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본심을 드러내시면서 이스라엘한테 이제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이제는 임마누엘 하겠다는 거죠. 임마누엘이라는 말이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하겠다 그거거든요.
절대로 이제는 떠나지 않겠다 그래요. 예 떠나지 않겠다.

그리고 과거와 같은 그런 방식으로 오히려 이제는 다스리지 않겠다 그러니까 요한은 세례 요한은 그래도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제 왕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신앙적 갱신을 이루고 또 정치적 갱신도 이루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마 성전을 정화시켜 가지고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
성전이 그 당시에 엉망이었잖아요. 그렇죠 막 거기서 장사하고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올라가서 성전에서 채찍들 막 휘두르면서 쫓아내고 양 파는 사람들, 비둘기 파는 사람들 막 쫓아내야 되는 그런 상황이었잖아요.
엉망이었던 거죠. 아마 세례 요한이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올라가셔서 그 성전을 다시 정화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신앙을 다시 새롭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과거에 그 누굽니까?
엘리아 이 북 이스라엘이지만은 엘리아 시절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죽이잖아요.

그렇죠 그런 어떤 종교적 갱신을 이루었고 심판의 어떤 역사를 이루어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지 않을까 이렇게 세례 요한은 생각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려고 하는 거는 뭐냐 하면 완전히 이제 달라요.
최종적으로는 심판을 합니다. 최종적으로 심판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에게 뭘 보여주려고 했냐면은 내가 너희와 정말 임마누엘
 함께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데 막 심판의 주님으로 함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약자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렇죠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의 위로자가 되시고 그들을 치유하시고 그들을 계속해서 위로하고 그렇게 하세요.
섬기는 것을 통해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걸 통해서 주님께서 드디어 함께하시는 걸 이렇게 보여주세요.

그래서 마태가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취하셨느냐면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그들과 함께하시는 그 삶 존재하는 그렇게 독특하게 존재하시는 그 방식 있잖아요.
그들과 그들의 삶 속에 함께하셔서 정말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 방식으로 그들을 낮아져서 섬기는 그 방식으로 함께해 주시는 분으로 딱 오시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성취하신 분으로 주님은 오셨다는 거를 마태는 이제 사실 말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우리가 확인할 수 있냐면 마태복음을 쭉 읽어보면 오 이렇게 임마누엘 하셨구나 이렇게 임마누엘 하셨구나 하고 알 수가 있고 그죠 우리가 마태가 중요하게 이렇게 강조할 때 중요한 걸 딱 얘기하고 그다음에 중요한 거를 또 저 끝에 딱 얘기하는 이게 이제 되게 독특한 구조 방식을 써요.
인플루지오 구조라고 하는데요. 인플루지오 양쪽에 중요한 걸 이렇게 탁 둬요.

그러니까 팔복에도 보면 천국에 대해서 딱 얘기하고 뒤에 천국 얘기 딱 하면서 전체 말하려고 하는 것이 천국이다 하는 걸 얘기하는 것처럼 마태복음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게 뭐냐 하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 그러니까 여기서 임마누엘이 나오고 마지막에 마태복음 저 끝에 가면 그렇죠 28장에 맞죠 28장에 제일 끝에 가면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겠다 그러잖아요.
그게 임마누엘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도 마태가 이 임마누엘의 주님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이제 오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인데 그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냐 임마누엘의 메시아다.
이것이 마태가 이제 정말 강조하려고 했던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임마누엘에 대해서 그러니까 우리가 마태가 강조했던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쭉 강조하는데요.

하나님 나라 우리 하나님 나라의 이제 백성으로서 그 하나님의 통치를 우리가 충만히 받으면서 살아야 된다는 얘기를 지난주에 했지 않습니까?
지지난주에도 지난주에도 했고 지금 그 얘기를 사실 계속하고 있는 건데 사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사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근데 이 임마누엘인데 실제로 이 임마누엘이 어떻게 이게 강력하게 그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임하는가 그 부분을 사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되는 부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사도는 강조하려고 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이제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나타났냐면 임마누엘 하신 주님께서 임마누엘 하셨기 때문에 나타나는 거죠.
임마누엘 하시면서 그러니까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그전에 구약의 하나님은 어떤 느낌이 좀 있냐 하면 분명히 구약의 하나님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낄 때는 뭔가 좀 멀리 정말 가까이하기에는 정말 너무 거룩하시고 근접하기 어려운 그런 분이에요.
굉장히 어떤 면에서는 두려운 분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게 가까이 친밀하게 다가가서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그런 분으로 여겨지기에는 조금 그렇죠.
너무 거리가 먼 분이시거든요. 그런데 이제 신약 시대에 와서 드러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이것이 하나님의 사실은 본심이고 실체에 훨씬 더 가까운 거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그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은 뭐에 가까운 거냐 하면 결국은 오해에 가까운 거죠.
오해 오해가 많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 죠.
그러니까 이해가 너무 이렇게 빈약하고 한편으로는 한편으로는 또 많은 오해 가운데 하나님을 잘못 그 우리가 이제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이스라엘의 관점으로 구약 성경이 자칫하면 읽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이 보는 하나님의 하나님을 보는 관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관점들이 구약에 많이 이렇게 표현돼 있거든요.
보다 보면 우리가 그런 관점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고 우리도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느꼈던 그 하나님에 대한 부담스러움 있잖아요.
뭔가 불편하고 한편으로는 좀 두렵기도 하고 그리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던 그 하나님에 대한 어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는 너무나 이제 좋은 거죠.
근데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거거든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분 앞에서 우리가 정말 조심스러워하는 그런 태도가 우리가 가져야 되는 태도인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빠진 상태에서 그렇죠.

그게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이 우리가 잘못하면 뭔가 나를 혼낼 것이다 하는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을 이렇게 두려워하는 것을 그런 태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갖고 있었는데 우리도 자칫하면 그런 관점으로 구약 성경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게 조심하면서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누구를 통해서 이제 명확하게 선명하게 드러나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예수님을 사실 보면서 아 구약의 그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 다른 하나님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렇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이제 그렇게 생각을 많이 했어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이고 구약의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어떤 하나님이셨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신 그분이 바로 구약의 그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정말 하나님의 본래의 모습 그렇죠 오늘 우리 찬송의 본체라는 이런 말을 쓰는데 그 하나님의 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이제 알아가게 되는데 그래서 복음서를 우리가 이제 공부를 해야 되는 거죠.

공부해야 되는데 우리가 이 사도 마태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뭐냐 하면 우리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주님이다 하는 부분을 마태는 아주 강조해 주고자 하고 그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이 표현 속에 어떤 것이 있냐 하면은 그 전에는 이제 이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어 주인과 어떤 면에서 종의 느낌에 가깝다고 했다면 이 임마누엘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까지 나타났냐면 어떤 모습입니까?
이렇게 친구가 되어주는 그런 모습 그 죄인들의 이렇게 친구가 되어 줘요.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들한테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너희가 이제는 나의 친구다 이렇게 그래요.
친구다 그래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제 어떤 면에서는 맞먹을 수 있는 그런 느낌까지 막 있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막 따지고 질문하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어떤 때는 예수님을 오해하고 또 예수님을 막 이렇게 판단하고 그래요.

판단 받는 분이 돼버린 거예요. 어떤 때는 예수님이 과거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죠.
하나님을 우리가 판단한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과 함께해 주시는데 같이 이렇게 있다 보니까 너무 예수님이 낮아지셔가지고 그렇죠 막 판단할 때 또 때로는 그분이 하나님이신데 사람들이 너무 이제 나간거죠.
예수님을 막 비난하고 죽이려고 하고 나중에는 돌로 치려고 하고 막 그래요.
그러니까 그런 부분은 이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해서 그런 부분도 있지만은 어쨌든 간에 뭐냐 하면 그렇게 예수님이 이렇게 낮아지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죠 낮아지셔서 오셨고 예수님이 그 가운데에서도 계속해서 보면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세요 자기를 이렇게 오해하고 박해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대하면서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는 그 모습을 이렇게 보여주고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한테 이렇게 가르치면서 어떤 얘기까지 하냐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너희 같이 이미 믿음이 있는 의인들이 아니고 아직까지 이 우리에 들지 못한 그 죄인 한 명 구하는 것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거다 그런 얘기까지 막 들려줍니다.
그렇게 하면서 제자들이 이분이 누군지에 대해서 이제 점점점점 이제 눈을 뜨는 거죠.
계속해서 함께하시고 그리고 마지막에 주님이 제자들과 이렇게 이제 헤어지는 것을 꼭 미리 말씀을 하시잖아요.
내가 이제 떠난다는 것은 그런데 떠나는 과정에서도 예수님이 뭐라고 하냐면 내가 다시 보혜사 성령을 보내서 너희들과 함께하겠다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끝까지 제자들을 떠나지 않는 분으로 존재하신다고 하는 것도 명확하게 이렇게 가르쳐주죠.
그래서 우리가 임마누엘 이제 이 임마누엘의 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우리가 복음서를 공부하면서 풍성하게 이제 공부해 가야 됩니다.
공부해 가야 되는데 이제 우리가 조금 더 관심을 두고 생각해야 되는 건 뭐냐 하면 이 임마누엘의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 다 끝내고 부활하시고 성찰하시고 나서 오순절에 성령님으로 이렇게 오시지 않습니까?
그 오순절에 오시는 그 성령님이 우리 이제 그 별명이 있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그래요. 사실은 이제 우리가 나중에 알게 돼요.
삼위의 하나님 삼위의 하나님이시고 그분 중에 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 삼위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초대교회에는 이렇게 사실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딱 알아요.
사도들도 알죠.

우리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역사를 이렇게 보면은 삼위의 하나님이 그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 논쟁 그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오랫동안 논쟁을 하거든요.
한 300년 정도 어거스틴이 삼위일체론을 거의 이제 체계적으로 완성시키는 분인데 어거스틴이 등장하기까지 거의 한  400년 가까이 삼위일체 논쟁이 있게 돼요.
그래서 어 뭐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닌가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닌가 하는 주장하는 분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다양한 형태 그 양태론이에요.
그게 다양한 양태로 나타난다 해서 어떤 양태론적 이단이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어떤 때는 아버지로서 어떤 때는 아들 뭐 이렇게 아들로서 또 어떤 때는 이제 선생님으로 이렇게 나타나는 거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양태론에 빠지기도 하고 아니다.
하나님은 그냥 세 분이다 해서 삼신론적 개념을 갖고 있는 분들이고 또 기독론 논쟁이 있게 되고 그럽니다.

이게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어 조금 급이 낮으신 낮으신 하나님이다 그래요.
동등하다는 것을 인정을 또 안 해요. 또 어떤 때는 예수님의 인성은 인정을 하는데 신성을 인정을 안 해요.
또 예수님의 인성은 심성은 인정하는데 인성을 또 인정을 안 하는 기독론 논쟁이 벌어지고 그게 한 400년 가까이 막 이렇게 계속 지속이 되면서 최종적으로 나중에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다 하는 거 그래서 어 우리 최근에도 개혁파 진영의 어떤 분은 학자들은 아 그냥 우리가 하나님을 세 분이라고 하자 그래요 세 분이라고 하자 세 분 아니냐 그래 근데 세 분이라고 하면은 안 된다는 거죠.
삼위를 가진신 그 사실 위라는 것이 퍼슨이기 때문에 그냥 세 분 해도 사실 말은 같은 말인데 우리는 그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해서 삼위이신 한 분 하나님이라고 얘기를 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그런 게 말이 되는 거야 그게 우리 말로 하면요 말이 잘 안 돼요.

그리고 이것이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렇게 깊이 생각하면 이해가 안 돼야 되거든요.
근데 내가 딱 들었는데 나는 딱 이해가 되는데요. 이런 분들이 있어요.
가끔씩 그런 분들은 이해를 잘 못하신 거예요. 어떤 분이 이해를 정확하게 했냐 하면 삼위일체는 이해가 다 안 돼야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삼위를 가지신 그래서 동일 본체 본체 그죠 동일 본질이나 동일 본체를 가지신 한 분 하나님이라고 얘기해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성경이 그래요. 그래서 그 부분을 살리면서 동시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서로 다른 분이다는 걸 이렇게 또 이해하죠.
그 세 분은 또 다른 분이에요. 같은 분이 아니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이세요.

그래서 어떻게 이게 이런 게 가능한가 가능하냐 하면 하나님은 동일 본체가 동일 본질 본질이 동일하시다고 하는 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각각의 분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본질이 동일한데 어떻게 이게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다르다고 말하기에는 이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표현이 그렇게 하기 어렵고 또 이분들의 존재 방식은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하고 완전히 달라요.
이분들은 상호 교통하시는 분이 상호 내주하시는 분이세요.
아주 독특하죠. 성부 안에 성자 성자 안에 성령이 계시는 그런 존재 방식으로 계시기 때문에 이 삼위일체로 제가 얘기 말씀드리려고 그러는 건 아닌데 이 부분을 좀 잘 이해해야 이제 우리가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오순절에 우리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셨다는 거죠.
성령으로 함께 오신 그리스도인 거예요. 여전히 함께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우리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한 거죠.

그래서 정확한 이해는 어 동일 본질을 가지신 한 분 하나님이다 그리고 삼위를 가지신 분이다 하는 것을 일단 잘 생각하면서 어 그렇게 생각해야만이 성경에서 어 그 하나님 삼위를 가지신 그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표현을 명확하지 않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그 표현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이 표현이 현재로서는 가장 좋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관계성 속에서 계신 분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사실은 우리에게 다시 오셔서 우리 교회와 함께하시는 분으로 존재하세요.
그렇게 해서 우리 주님이 이제 우리와 이렇게 함께 계속해서 계시는 분이신데 일단은 우리는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존재하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하는 이 복음서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뭐냐 하면 구약에 게시되어 있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명확하게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우리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렇게 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다 아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 게시되어 있는 하나님 있지 않습니까?
성부 하나님에 관한 계시들 그 계시들을 우리가 다시 신약적 관점에서 이렇게 보게 되면 조금 더 풍성하게 이해가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예들을 통해서 이렇게 가르쳐줘도 우리가 이렇게 삶의 다양한 어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이 상황 속에서는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찾아올까 그걸 다 이렇게 신약 성경에서 말해주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잘 이해를 못해요. 이런 분이 다 얘기해도 잘 그게 안 와닿아요.
지금 제가 얘기하는 얘기도 잘 안 와닿잖아요. 그게 사실은 뭐냐 하면 이 사건을 그렇죠 구약과 신약에 있는 모든 하나님에 관한 이 사건들을 계속해서 배워야 된다는 거죠.
그렇게 했을 때 지금 이런 이야기가 이해가 딱 돼요.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그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인 어떤 그것을 좀 이미 파악하고 아는 분들을 전제로 해서 그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더 정리를 한번 해보는 거거든요.
이제 이거를 정리를 먼저 하고 나중에 이제 좀 정말 그러한가 하는 것을 우리가 성경 구약과 신약에 주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잘 살피면서 그 속에서 정말 들여다보니까 정말 이분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바로 그분하고 같은 분이구나 하는 것을 계속해서 이제 확인하게 돼요.
그래서 그 신약에서 구약에 게시되어 있는 하나님을 실질적으로는 뭐냐 하면 어 아주 명확하게 사실 다 드러내고 있어요.
사실은 신약에 다 드러나고 있고 신약만 잘 들여다봐도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쭉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을 보면은 음 정말 우리와 어떤 어떻게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섬겨주셨는지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그 그거를 주님의 우리를 대하는 그 태도 있지 않습니까?

그걸 보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상했던 하나님 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이세요.
다른 하나님이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확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쫙봤던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생각한 사람 아니에요 사도요한이 근데 그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딱 보면서 이 구약에 게시되어 있는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를 한마디로 딱 얘기하잖아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딱 그래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그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그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오신 임마누엘의 주님이다 하는 것을 이제 사도 마태는 말해 주고 싶은 거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태복음을 이제 하나하게 공부하다 보면 막 예수님이 어 세례 요한이 생각했던 그런 심판자로 오시는 게 아니고 세례 요한도 당황스러워할 만큼 세례 요한이 제자들 시켜서 왜 이렇게 가서 알아보라고 했냐면 아 분명히 저분이 메시아가 맞는 것 같은데 그렇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고 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분명히 메시아가 맞는데 딱 보니까 아닌 것 같아요.
너무 자기가 생각했던 거하고 너무 반대 정말 그들의 친구로 그냥 살고 계신 모습을 보니까 저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메시아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겠나 싶을 정도로 그 정도로 요한이 오해할 정도로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잘 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하면 우리 성경 전체 어떤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나님이 부담스럽고 뭔가 무섭고 내가 다가가기에는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그렇죠 너무 이렇게 멀리 계신 분 같고 너무 이렇게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 우리와 뭔가 분리되어 있고 구별돼 있는 것만 우리가 많이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이 복음서에 예수님 잘 보게 되면은 정말 우리가 이렇게 옆에 딱 가가지고 발 딱 붙어 있잖아요.
그냥 있어도 좋은 그런 분이세요. 우리 주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분 있지 않습니까?
상상하는 좋은 분 그 좋은 분보다 더 좋은 분이라 예수님이 그러니까 이게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정말 이런 순간에도 우리 주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그런 순간이 항상 와요.
이런 순간에도 우리 주님이 나를 이해해 주실 수 있을까 그런 상황이 오거든요.
다 이해하세요. 그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사랑하면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으로 우리 주님이 오셨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잘 이해를 못하는 거죠.

우리가 그런 점에서 이해를 잘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하시고 이렇게 지혜로우시고 또 거룩하시고 이런 부분은 우리가 또 안 가르쳐줘도 좀 잘 아는 것 같아요.
물론 이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도 우리가 실질적으로 인정하고 하는 것은 믿고 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이긴 한데, 우리가 제일 잘 안 받아들여지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잘 이해를 못한다는 거죠.
우리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내가 뭔가 지불해서 내가 뭔가 그 하나님의 호위를 받을 만한 어떤 기특한 뭔가를 해서 주님과 주님 앞에 이렇게 서려고 하는 그 마음이 우리 속에 이렇게 계속 남아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 주님이 그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어떻게 이렇게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잘 이해를 잘 못하는 그 은혜가 정말 충만하게 이렇게 오는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그 이해가 넓어지지 않아서 그 주님의 그 사랑의 깊이를 사실은 충분히 헤아리지 못해서 좁아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정말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같이 전능하세요.
그 사랑이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런 분으로 그런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오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 주님을 딱 생각하면은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 자신을 용납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그리고 우리가 이제 최종적으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알기를 바라는 거거든요.
근데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돼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된다는 거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분인지 모르는 거예요.

사랑을 아는 만큼만 눈을 뜰 수가 있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그래서 그런 것은 나중에 보여줘도 되는 거예요.
보여줄 필요가 어떤 면에서는 없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거 거기에 딱 눈을 뜨면 그렇죠.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뭘 해 주셨는지를 딱 눈을 뜨잖아요.
그 사랑이 눈을 뜨면 그 눈을 뜨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움에 같이 눈을 딱 뜨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대해서 충분히 눈을 사실 이제 잘 못 떠서요.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만큼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이 경배 이런 것들이 이렇게 좀 많이 이렇게 부족해지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쫙 정말 올려지는 그렇죠.

이 찬송이 우리 심령에서 이렇게 쫙 터지지 않는 게 그 영광을 보지 못해서 그런데 그 영광을 왜 이렇게 잘 사람 우리가 잘 캐치를 못하냐 하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우리가 눈을 덜 떠서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그 충만한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 이제 여기 오셨고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셨다고 하는 예수님의 그 성육신 있잖아요.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리고 나중에 이제 승천하시는데 이게 이제 예수님의 우리 신약적 표현으로는 자기 비하라고 그러죠.
낮아지심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 이제 오늘 이 공부하는 여기에서 우리가 제일 많이 생각해야 되는 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해서 탄생하셨구나 하는 것도 물론 알아야 됩니다.
근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거 탄생한 탄생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거죠.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이렇게 올라가신 십자가 지고 피 흘리고 돌아가신 그 사건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신 거예요.
인간을 이렇게 입으신 게 아니고요. 인간을 그냥 이렇게 하나님 본체에다 인간을 이렇게 덧붙인 게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인간이 되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계속 영원히 인간이세요.
영원히 그렇게 말하자면 피조물의 단계까지 낮아지신 그 하나님의 그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고 그 낮아지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하나님이 얼마나 정말 영광스러운 분이신가 하는 것이 그게 이렇게 같이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제 주님의 탄생을 기념 그래도 한 번 더 하면서 매주 탄생을 기념해야 됩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매주 매주 해야 되는데 우리가 성탄의 절기에 이제 가까이에 와서 한 번 더 이렇게 해보는 건데 우리 주님께서 임마누엘
하러 이 땅에 오셨구나 그리고 그분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구나.
그렇죠.

이 땅에서도 함께하고 나중에 완성된 나라에서도 함께하시는 분으로 계시는데 우리가 이 임마누엘의 주님을 통해서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겸손히 낮아져서 섬겨주신 즉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이게 우리가 좀 더 눈을 뜨고 교회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져가지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정말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영광스러우신 분이라고 하는 것에까지 우리의 눈이 활짝 열려져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도 심령을 다해서 드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이제 눈이 떠지지 않습니까?
정말 사는 게 좋아요. 사는 게 행복해요. 행복해요.
진짜 너무 좋다니까요. 사는 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는지 알게 돼요.
그렇게 우리를 만들려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거잖아요.
주님이 그렇게 큰 희생을 치러가면서까지 우리 정말 우리가 하나님 백성답게 정말 잘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 되신 주님이시거든요.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까지 해 주신 거 생각하면 우리가 잘 살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진짜로 그렇게 잘 살아가는 행복하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 우리 속에 잘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 마태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 이 땅에 오신 오셔서 임마누엘 하시는 분이신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분으로 오셔서 우리를 섬겨주셨는지를 잘 배워가게 해 주시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가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본 바와 같이 정말 하나님은 사랑의 주님이시고 또 자비와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신 것을 우리 심령에서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에 더욱더 눈 뜬 사람들 되게 해 주시고, 우리의 삶이 정말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는데, 그것을 우리가 동의하면서 정말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 우리 가운데 있게 해 주시고, 또 우리가 그 주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서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모습 우리 가운데 잘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