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새생활교회 당회장 박주동 목사

예배/말 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마태복음 6장 9-13절... 박주동 목사

예배하는 사람 2026. 1. 31. 03:41

박주동 목사

 

260125말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마태복음 6장 9-13절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13절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13절까지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기도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모세를 통해서 주심으로써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렇게 살아야 된다 하고 가르쳐 주시는데요.

우리 신약 시대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고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던 것과 비견할 만한 그런 말씀이 주기도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이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 하고 이제 말씀을 주시는데 말씀이 나온 김에 잠깐 더 말씀을 드리게 되면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 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죠.
그것은 늘 잘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이렇게 말씀을 지키면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것을 잘 가르쳐주기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말씀을 줌으로써 그 기본적인 틀을 근거해서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알고 그렇게 살도록 주신 거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도 기본적으로는 그런 부분을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주기도문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한 시민으로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이 세상 속에서 표현해 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 말씀을 이렇게 들여다보게 되면 십계명하고 좀 기본적인 구조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십계명도 여전히 우리 신약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우리가 좀 더 십계명의 이 말씀을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하면서 그러니까 우리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주면서 우리가 십계명의 말씀을 그것과 함께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두 개의 를 같이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훨씬 더 선명하게 이렇게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6장에 이렇게 나오고 또 누가복음 11장에 나옵니다.

또 누가 복음과 마태복음을 비교를 해보게 되면 조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알 수가 있는데 마태복음은 좀 더 기도문이 전체적으로 완성된 문장으로 소개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누가 복음 같은 경우는 그 주기도문의 말씀이 상당히 요약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마태복음에 보면 맨 끝이죠. 13절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것은 예수님이 해주신 말씀은 아닙니다. 이 부분은 이것은 초대 교회가 그 이후에 예배를 위해서 이렇게 이렇게 삽입한 말씀이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예배를 위해서 교회 공동체가 초대 교회 공동체가 이것을 삽입해서 사용하게 되면서 계속해서 여기에 이제 우리 성경이 최종적으로 완성이 되는 시점도 한 140년 이 정도 되거든요.
그 과정 속에서 이것이 이제 삽입되고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왔구나 하는 것을 좀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이것을 주신 것은 아닌 거죠.
그래서 성경에 뭐라고 표시를 해놨지 않습니까? 괄호 이렇게 해서 이것은 후대에 삽입된 내용입니다 하고 표시를 해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확실히 초대교회의 교회들도 이 주기도문을 교회의 공적 예배와 관련해서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구나 하는 것을 많이 의식하면서 사용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되고 누가 복음 같은 경우는 이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상당히 요약적으로 되어 있는데 누가 복음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면서 실질적으로 각각의 개인의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자로서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야 되는가 하는 점을 많이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상당히 개인적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근데 마태복음 같은 경우는 이 주기도문이 공동체를 위해서 주신 말씀이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전에 우리 교회에 이 주기도문 말씀을 주셨구나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우리 공동체가 함께 이 말씀을 어떻게 받들 것인가 섬겨 갈 것인가를 잘 생각하고 소화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 주기도문을 주실 때 누가 복음 같은 경우에는 어떤 점이 강조되고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다가 길을 가고 있을 때 제자들과 함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요청을 해요.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주기도문이거든요.
그런데 마태복음은 이 주기도문이 산상 설교 속에 이렇게 들어가 있죠.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렇게 사도나 우리 누가가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해서 영감하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거든요.

저자들이 이것을 의도할 때는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식견을 사용해서 물론 성령의 그 은혜 속에서 그것을 기록을 하게 되는데 기록할 때 성령께서 영감하셔서 우리에게 그 의도 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시는 겁니다.
네 그것을 항상 생각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누가의 의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도 말씀이고 마태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누가는 뭐냐 하면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가 하는 질문에서 주신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기도의 어떤 방법론적인 것이 상당히 강조되고 있구나 그래서 우리가 주기도문을 이렇게 이렇게 쭉 보게 되면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를 그 골격을 금방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죠 기도할 때 이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달라고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누가는 가르쳐주고 그리고 그 이후에 우리가 일용할 양식 그다음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또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그런 기도 물론 이제 내용이 보면은 마태복음과 크게 차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우리가 그 성경 말씀을 들을 때에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이렇게 기도해라 하는 방법론적인 것이 기본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또 누가가 주님께 그 질문을 할 때 사실 어떤 면이 더 중요하냐면 기도하는 법을 이들이 정말 몰라서 질문한 게 아니다는 겁니다.

누가가 이것을 기록할 때는 어떤 점이 주목되고 있냐면은 세례 요한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요청한 거거든요.
제자들이 한 제자가 그러니까 요한을 중심으로 한 요한 공동체가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지금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기도문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따라서 기도하기를 힘쓰는데 그 기도문은 어떤 기도문이냐 요한 공동체가 자기 이 공동체가 존재하는 그 이유, 우리는 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공동체가 지금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해 준 기도문을 요한 공동체는 갖고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그 기도문을 보면 아 우리는 왜 지금 이곳에 함께 존재하는가 하는 것을 딱 보면 알 수 있도록 그래서 예수님 제자도 그 요한 공동체에 있었던 사람도 아마 있었고 그것을 잘 알았을 겁니다.

요한은 이렇게 우리한테 기도하라고 하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라고 하고 우리의 존재는 정체성은 이것이다 하고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는데 그럼 우리는 뭡니까?
이제 이걸 묻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모여가지고 예수님 따라서 막 이렇게 막 왔다 갔다 돌아다니잖아요.
뭔가 예수님이 엄청난 일을 하시는데 하시는 것을 보면은 예수님과 요한이 좀 비슷한 점도 많이 있단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함께하고 또 때로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특히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씀을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를 해요.
근데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면서 똑같이 딱 선포를 하니까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이 너무 비슷해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질문하지 않고 이렇게 그냥 비슷한가 보다 우리도 그런 정체성 속에서 함께 하는가 보다 하고 같이 이제 생활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아마 제자들이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뭔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과 요한이 말을 하고자 하는 거 선포하고자 했던 것이 많이 다르다는 거죠.
같이 있으면 점점점점 이제 다르다는 걸 느끼는 거거든요.
달라요.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보여주는 사역들을 보면은 요한은 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막 선포했다면 예수님은 뭐냐 하면 연약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자기에게로 이끄시고 그들을 고쳐주시고 그들을 회복시키는 그런 일들을 막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번에도 살펴봤지만 요한도 그게 당황스러울 정도의 그런 사역을 예수님이 막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그런 제자들 중에 어떤 한 사람인데 아마 요한의 제자 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우리는 요한 공동체와 다른 뭔가를 지금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도대체 왜 삽니까?
그렇죠 왜 여기에 우리는 있어야 됩니까 하고 물으면서 그것을 기도라고 하는 방식 그렇죠 그럼 표현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 질문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했다는 거죠.
그러면 그 답변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금방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지만은 더 근본적으로는 뭐냐 하면 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지금 왜 이곳에서 그 땅에서 사역하고 계신지에 대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 그 목적이죠.
그것을 한마디로 딱 표현해 준 요약적인 말씀이라고 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주기도문은 대단히 이제 중요한 겁니다.
그냥 어떤 기도의 모범 그죠? 어떤 기도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그 정도 차원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주기도문을 가지고서 묵상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가지고서 함께 기도한다면 그것을 항상 명확하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는 거죠.
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제 많은 말씀을 하세요.
그런데 그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할 때 모든 말씀과 예수님의 모든 사역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이 주기도문을 그대로 해서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이 안경을 사용해서 착 봐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항상 이렇게 보면 이 주님의 말씀이 잘 이해가 다 되는 거예요.
주기도문은 이제 점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좀 생각하게 되죠.
그렇죠 주기도문이 정말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 교회가 사실 이 주기도문을 사용해서 예배 때 같이 읽기도 하고 같이 기도 드리고 많이 우리가 또 사용하고 개인적으로 기도하면서 이 주기도문을 사용해서 기도하려고 노력하는 분들도 많거든요.
그런데 이 주기도문에 대해서는 많은 기도를 하고 사용을 하는데 실제로 이 주기도문이 무슨 내용인지를 잘 가르치지는 않았어요.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주기도문을 제대로 이렇게 가르치기 시작한 게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좀 안타까운 면이 있는 거죠.

이 주기도문을 사실 잘 가르치게 되면은 예수님의 가르침 모든 가르침을 이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안경으로 좀 더 풍성하게 볼 수 있었고 그것을 제대로 봤다고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 말하자면 이제 우리가 신약 성경뿐만 아니라 구약의 복음도 그렇죠 구약의 말씀도 훨씬 더 우리가 선명하고 풍성하게 볼 수 있었던 그런 면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좀 놓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가를 통해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이 공동체 그러니까 우리 교회 공동체죠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줄려고 하시는 말씀이 이거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해 주고요.
그리고 이제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주기도문을 우리가 볼 때는 이것이 우리 교회에서 항상 이렇게 사용되면서 이것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 교회가 예배 드려야 된다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배 공동체로 이렇게 있는데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려고 할 때 우리의 예배가 어떤 예배여야 되느냐 이 주기도문의 내용이 잘 표현되는 예배여야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는 거죠.
조금 접근이 다른 거죠. 그렇죠. 우리가 예배드릴 때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하는 것을 잘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말하자면 교통이죠.
교통 그래서 이 주기도문에 보면은 6개의 청원이 청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한 청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기도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해요. 이 세 개로 이루어져 있고 또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가 3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신을 위한 기도인데 이것도 우리 개인적인 기도이기 이전에 우리 공동체가 함께 구해야 되는 것들이에요.
전부 보면은 우리 공동체가 함께 구해야 되는 것들 그래서 예배 속에서 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 교통이 이렇게 일어나겠구나 하는 것을 주기도문은 생각하게 해 줍니다.
네 그래서 하나님만 이렇게 막 생각하는 하나님에 관한 것만 위해서 우리가 말해지는 어떤 그런 것이 아니고 그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까지도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을 요약적으로 또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다고 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이 예배 공동체에서 이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내용의 틀이 예배의 어떤 틀 속에서 잘 표현되도록 우리가 이제 예배를 드릴 때에 배 순서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 순서도 이렇게 생각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냥 막 하는 게 아니고 이것이 최대한 잘 표현되도록 하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 예배 를 통해서 13절의 말씀과 같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는 이 성령이 우리 예배를 통해서 올려져야 되는구나 하는 것도 이 본문에서 생각을 해주게 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 이제 우리가 이것이 아 이렇게 표현되어야 되는구나 하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내용이 뭔지를 우리가 기본적으로 좀 잘 파악하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크게 보면은 두 가지로 딱 표현할 수가 있어요.
크게 보면은 십계명이 열가지로 되어 있는데 십계명을 두 가지로 딱 표현할 수 있지 않습니까?
뭘로 표현할 수가 있죠?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는 거 그다음에 두 번째가 이웃을 사랑해라 하는 걸로 딱 표현할 수가 있어요.
이것도 똑같아요. 네 첫 번째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도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게 결국은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하는 기도인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되어야 된다 하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이에요.
결국은 그겁니다. 이 죄의 문제를 얘기할 때도 결국 우리 개인의 죄뿐만 아니라 결국 이 죄의 문제의 대부분은 어디 어떻게 일어납니까?
관계 속에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공동체 속에 특히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 속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을 사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겁니까?
서로 관계가 회복되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이 되고 그렇죠 용서해 주신 하나님과 관계 회복되고 최종적으로는 우리 서로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을 잘 이렇게 보면은 특히 산상 설교를 잘 보면은 14절 금방 나오지 않습니까?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그렇죠 서로 용서하는 이 문제를 금방 다뤄요.
이것이 공동체 속에서 지금 주어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주기도문이 어떤 내용으로 크게 이루어져 있느냐 첫 번째가 하나님을 네가 생각하고 사랑해라 하는 것으로 첫 번째가 우리에게 요구되어지고 있고 두 번째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하고 결국 주시는 말씀인데 우리가 그 내용을 조금 이렇게 더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이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데 뭐라고 주님이 가르쳐 주시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먼저 우리에게 뭘 가르쳐 주려고 하냐면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이 되시는 분은 너의 대상이 되시는 분은 너희의 아버지시다 하는 겁니다.

여기 보면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렇게 돼 있는데 하나님의 초월적인 요소를 먼저 이렇게 강조해 줍니다.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것을 얘기해 주시는데 그 하나님은 너희의 아버지시다.
그렇게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것이 먼저 이렇게 떠오르느냐 하면은 하나님 하면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든지 듣고 응답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마태복음에서 강조하는 것 특히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강조해서 가르쳐 주려고 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저희의 기도를 듣는 하나님은 너희의 아버지다 하는 것을 말해주고자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단히 이게 낯선 표현에 가깝다고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누구 정도냐 이스라엘의 한 왕 정도예요.

왕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를 장자로 이렇게 택하셨거든요.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맏아들이에요. 그런데 본인 스스로는 내가 하나님의 맏아들이다 아들이다 이렇게 생각하기는 어려운 거죠.
그런 의식이 없는 건 아닌데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때 대단히 조심스럽고 두렵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왕들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이렇게 부르는 왕은 없지 않습니까?
다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을 아버지인데 분명히 아버지인데 아버지라고 이렇게 부를 수 없는 어떤 그런 관계예요.
그러니까 관계 자체가 사실은 뭔가 이렇게 그렇게 밖에 부를 수 없는 그 관계성 속에 있었던 거예요.
실질적으로 하나님은 아버지가 맞죠.

그런데 이스라엘 하나님 편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 아버지다고 하는 것을 한편으로는 충분하게 다 계시를 못하셨습니다.
계시를 다 하고 싶어도 사실 못하신 면이 있죠. 그렇게 하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소화를 못해요.
내가 너희 아버지다 하고 하면 그게 사실 다 소화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양육해 가는 그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이 말씀 계시가 아직까지는 불충분한 그런 상태였어요.
한꺼번에 하나님의 계시를 쫙 다 보여주기에는 그렇죠.
그 계시의 빛이 너무 밝은 거죠. 그것을 보기에는 아직까지 어린아이와 같고 이제 갓난 아기가 태어나서 이제 눈이 시력이 아직까지 정상적이지 않은 그런 모습이거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밝은 계시의 빛을 딱 이렇게 비춰줄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소화할 수 있는 그 수준에서 계시를 이렇게 주신 거예요.

그래서 주신 것이 십계명이고 구약의 말씀들 이거든요.
그래서 그 말씀들을 보면 어떤 거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다 안 해도 되는 말들이에요.
사실 왜냐면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은 그 계명을 다 이룰 수 있거든요.
굳이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가 없는데 그런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고 저런 상황에서는 저렇게 하라고 그렇게 하나하나 가르쳐 준 거예요.
우리가 어린 아이들 양육할 때 처음에는 1도 2도 이렇게 어떻게 닦아야 되고 그렇죠 또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게 하고 어떻게 정리 정돈하고 또 길을 건널 때는 어떻게 하고 어릴 때는 하나하나하나하나 다 이렇게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야 그것을 이해하고 소화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그것을 조금씩 조금씩 하면서 성장해 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을 하나님이 잘 아시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과정 속에서 양육해 가는 과정에 있었던 거였는데 세월이 흘러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충분한 그 계시가 주어졌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정말 어떤 분이시고 너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를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내신 거죠.
그 속에서 우리 주님께서 주님의 이 말씀을 듣는 이 지금 대상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지금 이 산상에서 설교하고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것을 선포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주님이 가장 먼저 해주는 말씀이 뭐냐 하면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너희의 아버지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관계가 다시 이렇게 재설정되게 하는 그 순간이 순간으로 지금 이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이 대단히 이제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예수 믿는 분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사실 이렇게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중에 가장 잘 안 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다고 하는 것을 잘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자꾸 생각해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내재하신다고 하는데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이제 내재하시는 하나님 우리 공동체 속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 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함께하시는 분이다 하는 거죠.
이것은 뭘 동시에 의미하느냐 하면 너희는 아들이라는 거죠.
상속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서게 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인지를 우리가 이제 세월이 가면서 점점 깊이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거는 이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늘 이렇게 기도하면서도 표현하고 또 생각하는 것 같아서 충분히 이렇게 생각하면서 산다고 우리가 생각하기 쉽거든요.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이렇기도 하고 또 내가 자녀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하는데요.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이 체질이 바뀌지를 않는다는 거죠.
잘 안 바뀌어요. 우리의 이 체질이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하는데 실제로 우리의 정서 전체가 아직까지는 하나님 앞에 사는 자녀 같지가 않다는 거죠.
그래서 이 우리 서신서의 사도가 그렇죠 그런 모습을 계속해서 잃어버리고 있는 그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죠.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자녀라고 하는 것을 상속자라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해요.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그렇게 말씀해 주는 거거든요.
그게 잘 안 돼서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갈라디아서에서도 이제 표현하냐면은 이렇게 살아가는데 자꾸 우리는 종이 됩니다.
죄의 종이 되고 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자녀인데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님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신하입니다. 그런 의식으로 이렇게 돌아가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우리가 갖고 있는 일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 토대 위에 있어야 되냐 하면 자녀라고 하는 그 토대 위에 있는 거거든요.
자녀인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그 자녀 됨을 표현해야 되느냐 이 하나님의 종후의 어떤 모습으로도 표현되어야 된다는 거거든요.
그렇죠. 왕의 신하의 모습으로도 표현되어야 된다.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표현돼야 되느냐 충성스러운 모습도 우리에게 요구되는구나.
우리가 자녀지만 충성스러운 그렇죠.

아버지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녀의 모습도 나타나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그런 여러 가지 표상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죠.
근데 우리의 근본적으로 우리 내면에 뭐가 있어야 되냐면 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고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그 의식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잘 이렇게 형성이 돼야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뭐냐 하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정당하게 대하게 돼요.
우리가 이게 전부 다 있잖아요. 잘 형성이 안 돼 가지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뭐냐 하면 생각보다 많이 학대해요.
또 잘못 형성이 되면 우리가 생각보다 우리 자신을 너무 관용을 베푼다는 거죠.
너무 관대해요. 또 내가 하나님의 자녀니까 내가 마음대로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제 점점점점 알아가기를 원하고 그 하나님을 자기도 모르게 점점점 닮아가게 되거든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러면 그 거룩하신 하나님 그렇죠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고 기도하라고 그러잖아요.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우리가 보면서 그 하나님께 점점점 닮아가면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거지 우리가 거룩히 여김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한다고 받는 거는 아닌 거죠. 그렇죠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잘 알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잘 이렇게 닮아가게 되는데 하나님을 우리가 이제 닮아가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아가면서 우리가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데 어떤 것이 의식이 우리 계속해서 강화되어져 가느냐 하면 아 그 하나님에게 어울리는 자녀의 모습으로 우리 자신을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가꾸어 가고 그 자녀의 모습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형성된 우리 자녀다움이라고 하는 게 뭐냐 하면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기본적으로는 뭐냐 하면은 되게 소중하게 여겨요.

하나님께서 나를 구속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피값으로 예수님 목숨값하고 바꿔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자녀로 존재하기 때문에 나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내 존재를 생각하면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생명 주신 것을 감사하게 되거든요.
그리고 그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 순간에 우리 심령에 충만하게 돼요.
그리고 동시에 또 나에 대해서 그 주님이 자비와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잖아요.
그 눈으로 나 자신을 이렇게 계속 보게 돼요. 그래서 과거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 우리 자신을 우리가 우리가 학대하거든요.
우리 양심만 해도 대단히 매섭게 막 우리를 채찍질해요.
우리 양심만 해도 조금만 잘못해도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도 그 양심의 그 어떤 면에서는 저주죠.
거기에 끊임없이 시달리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이제 믿고 나서도 계속해서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하면 그것은 대단히 이제 슬픈 모습인데 실질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제는 양심과 하나님의 율법을 사용해서 우리 자신을 이렇게 채찍질을 하는데 너무 가혹한 경우가 많다는 거죠.
한편으로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이 말씀을 주시면서 너희가 나의 자녀다 내가 너희의 아버지다라고 말씀하신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나를 어떤 방식으로 섬겨주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그 바른 관계 속으로 돌아가야 된다 하는 거죠.
그 관계가 다시 이렇게 잘 재설정되게 해 주는데, 이 주기도문의 첫 번째 이 구절의 이 말씀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 어떤 존재로 서 있어야 되느냐 특히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또 지금도 나를 바라보시는 그 시선으로 나 자신을 먼저 바라봐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면 죄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살면서 걔를 계속 죄를 짓습니다.
이렇게 자고 먹고 일어나고 관계 맺고 하면서 우리가 말을 통해서 그렇죠 우리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사실은 죄를 지어요.
그런데 그 죄를 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면 우리가 그렇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어떤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된다는 것을 이 주기도문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시사해주고 있다 가르쳐주고 있다는 거죠.
내가 우리의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내가 얼마든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자녀였을 때 또 우리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들한테 어떻게 대했는지를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래서 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녀들이 가끔은 보면 막 거짓말하는 거 그렇죠 돈이 안 필요한데 돈이 필요하다고 그래요.
그럴 때가 있는데 분명히 돈을 충분히 준 것 같은데 돈이 또 없다 그러고 그런데 그게 어떤 느낌이 드냐면요.
모든 엄마 아빠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어떤 느낌이 드냐 하면은 어 그러면은 그게 되게 사랑스럽거든요.
얘가 드디어 거짓말을 해서라도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구나 그게 너무 좋아요.
그래서 돈이 필요한 적이 없는데도 돈을 줘요. 묻지도 않고 네 그래서 나중에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또 아빠한테 이렇게 요청하겠다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기대하면서 이렇게 주거든요.
이게 아버지들이 그래요. 하물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죠 그러니까 누가복음에 보면 그 부분이 나옵니다.

주기도문 뒤에 주기도문 11장 그 뒤에 어떤 친구가 밤에 이렇게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잖아요.
떡 세 덩이만 달라고 그러니까 우리 자려고 하는데 왜 여기 와 가지고 나중에 아침에 와라 이제 그거죠.
지금은 안 된다. 근데 지금 먹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고통스러 견디기 어렵다 하는 거죠.
그런데 거기 보면은 친구나 벗 됨으로 인해서는 그 떡을 주지 않을지라도 너희가 만약에 간청한다면 간청한다면 줄 거다 그래요.
그렇죠 그게 간청하라는 기도 아닙니다. 그게 그 간청 기도의 힘 이런 책도 있어요.
그게 간청하라는 거 아니에요? 간청하지 마라는 겁니다.
왜냐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해도 주기 때문에 간청하는 거 아닙니다.
네 그게 이제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친구는 그렇게 간청을 하면 막 귀찮아서라도 그 떡을 빨리 주고 돌려보내려고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근데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기도하는 자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느냐 그럽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냥 들어준다는 거죠. 그 기도가 어떤 내용이 어떻고 그렇죠 기도를 듣는 사람의 어떤 형편이 어떻고 이런 것하고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데 그 왜 들어주시느냐 그 정서가 아까 말씀드린 것과 비슷해요.
우리 기도할 때 보면 어떤 기도들이 많냐 하면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은 기도가 많습니다.
얼마나 많으냐 거의 다예요.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기도 중에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가 잘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보면요.
하나님께 합당 그래서 우리의 기도를 보면은 마치 하나님께 뭔가 이렇게 맡겨 놓은 사람들처럼 그죠?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실 거다 하고 생각하면서 막 기도하는데 맡겨 놓은 사람처럼 막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당연히 내가 받아야 될 어떤 권리처럼 생각하면서 우리가 기도할 때가 많잖아요.
그런데 보면 그게 사실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합당치 않거든요.

그런데 신기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들으신다는 거고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굉장히 기뻐하신다는 거죠.
그게 왜 그러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기도를 듣는데 어떻게 들으셨냐 하면은 우리가 기도하는 그 기도 내용보다 대체로는 뭐냐 하면 더 잘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세요.
최상의 것으로 응답을 해 주신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 가게 되는데 사실 뭐냐 하면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많은 것을 받아서 하나님이 정말 사랑이 많으신 분이고 자비로우신 분이구나 하는 어떤 그런 신앙으로 가는 게 아니고요.
그렇게 해줘야지 그렇게 우리가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 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는 건 아닙니다.
근데 그런데도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수준이 사실 그 정도밖에 안 돼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고맙다고 느끼는 거예요. 감사하다고 느끼는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뭐냐 하면 그렇게 반복적인 그런 경험을 이렇게 해가면서 점점점 하나님이 누군지에 대해서 인식하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느 날 깨닫는 거죠. 그래 우리 아버지시지 나의 아버지시지 그러니까 저렇게 하시는구나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들어주시는 거 보면은 일관성이 막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어떤 때는 들어주시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아무리 기도해도 안 들어주시는 것 같고 그래요.
근데 보면 하나님은 정말 일관성이 있으세요 일관성 있게 어떻게 해 주시느냐 우리의 모든 기도를 사실 다 들으세요.
기도를 잘못 드렸잖아요.

그 기도를 듣고 그 기도가 계속해서 교정되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도와 가시는 그런 분이시고 우리가 기도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줌으로써 실제로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구해야 되는 게 뭔지를 아는 그렇게 철이 든 사람 되도록 도와가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은 하나님은 우리의 정말 기도를 듣는 분이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시면 해 줄 수 없는 그런 기도를 그렇게 우리를 섬겨가시는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에서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기도하는 이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은 너희의 아버지시다 하고 주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가르쳐주는 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게 제자들이라고 하는 너희 이 예배 공동체 교회의 이 공동체는 어떤 그 가르침 그 토대 위에 서 있는 공동체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그 신앙의 고백 위에 서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하는 것을 지금 딱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그 신앙의 고백 위에 그래서 우리가 주기도문을 이렇게 기도하는데 만약에 우리 여기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 그 아버지 되심 우리의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녀 됨에 대한 그 신앙이 점점점점 자라나지 않는다고 그러면 우리가 이 기도에 하는 사람다운 모습 합당한 모습이 아직 되지 못하고 우리는 더 실질적으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잘 배우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가장 먼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을 오늘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주기도문을 같이 살피면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 공동체에 가르쳐 주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 기도문으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우리를 자녀로까지 그 높은 지위에까지 우리를 올려주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또 당당하게 우리의 아뢸 것을 아뢰고 또 그 기도하면서 우리 주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시고 또 주님께서 주시는 그 모든 은택들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신 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그러한 은혜가 우리 속에 점점 더 채워지게 해 주셔서 이 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뜻에 부합한 모습이 우리 공동체 속에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