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208말씀 죄와 은혜의 지배 (로마서 6장 12-14절) 박주동 목사
로마서 6장 12절부터 14절까지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싶시요.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주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교회 역사 속에서는 1600년도 초에 대단히 왕성하게 활동하셨던 우리 교회에서 청교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청교도들이 있었고 그 청교도들이 우리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이루신 뜻, 또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게시하고자 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뜻들을 가장 잘 드러냈던 분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청교도들 가운데서도 가장 최고봉의 어떤 하나님의 이 진리의 장엄함을 드러냈던 분이라고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분이 존 오웬 목사님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 근데 존 오웬 목사님이 쓴 책 중에 어떤 책이 있냐 하면은 죄 죽임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리고 죄와 은혜의 지배 이런 책이 있고 또 그거 외에도 이제 그 죄와 은혜에 관한 책을 큰 책을 두꺼운 책을 쓰기도 했는데 이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표현을 써서 존 오웬 목사님이 우리에게 아주 귀한 진리를 물려주셨는데 그것이 존 오웬만의 어떤 독특한 신학적 사상이 아니고 이미 칼빈의 기독교 강요 그러니까 칼빈 시대 같으면은 존 오웬의 시대에서 거의 한 적어도 한 60년 70년 전에 있었던 분이죠.
그 시대에 이미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죄와 은혜의 지배라고 하는 이 표현을 사용해서 이 교리가 갖고 있는 의미가 무언지를 가르쳐 준 바가 있습니다.
근데 그것을 좀 더 주목하면서 존 오웬이 그 부분을 풍성하게 이렇게 우리에게 드러내 줬는데 감사하게도 이 교리를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열린 교회에서 오랫동안 지모하셨던 김남준 목사님이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을 쓰고 또 마음지킴 이런 책도 쓰시면서 이 교리를 이제 한국 교회에 소개를 해 줘요.
그러니까 존 오웬의 작품이라든지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이 신학자의 작품을 한국 교회는 거의 사실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면에서는 아직까지도 우리 한국 교회가 이제 저 세계 교회와의 어떤 연결성이죠 그들이 교회 역사 속에서 신학적 그리고 신앙적 유산을 상속하고 보존해 왔던 그것들을 우리 한국 교회도 이제 물려받아야 되거든요.
근데 우리가 아직까지도 많이 물려받지 못한 부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이제 우리 한국 교회만의 교회가 아니고 우리 교회는 과거 2천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 역사를 잘 계승한 그분들을 찾아야 되고 그분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신앙을 물려주셨는지를 계속해서 역사적으로 검증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아직도 물려받아야 될 것들이 많은데 이제 그중에 아주 중요한 교리적 유산을 다 감사하게도 이제 김남준 목사님이 이것을 우리 한국교회에 사실 잘 드러냈어요.
잘 드러내면서 이 교리를 물려주는데요.
사실 이제 꼭 그런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소개받지 않더라도 로마서 말씀을 우리가 잘 이렇게 읽어보게 되면 그 내용의 핵심을 쉽게 사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이제 명료하게 사실 파악할 수 있는데 그 전체적인 교류의 풍성함을 우리가 깊이 소화하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쉽지 않은 면이 있고 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생에 걸쳐서 점점점점 더 깨달아 가야 되는 그런 부분이기도 합니다.
근데 이게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한번 보십시오. 이 말씀을 보면은 이 말씀이 대단히 어떤 면에서는 심각하게 우리에게 무언가를 제시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너희 몸을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우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죄가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여기 보면은 어떤 표현이 나오냐 하면은 너희 죽을 몸을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너희 자신을 의외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런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무기 이런 표현을 쓰죠. 무기 그러니까 이 지금 표현 속에 전투적인 어떤 의식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죠.
그렇죠 전쟁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영적 전투 속에서의 삶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그런데 벌써 로마서에서도 이런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 거죠.
불의의 무기로 너희 자신을 들일 수도 있고 의의 무기로 너희 자신을 들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무기라고 하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영적 전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그런 표현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게 왜 이런 표현을 썼냐 하면은 우리가 지난번에 이제 말씀을 살피면서 이미 한 번쯤 몇 번쯤 말씀을 드렸던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이 두 왕국 체제로 존재해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하나의 왕국처럼 이제 보입니다.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세상과 또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시고 완성시켜 가고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죠.
이 두 왕국 세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이제 이 두 왕국은 그대로 이렇게 그냥 이렇게 잘 그냥 어우러져서 이렇게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충돌하면서 존재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쪽 왕국이 이쪽으로 이쪽 왕국을 침투해 들어가는 거죠.
그리고 반면에 이쪽 왕국은 그렇죠 이 세상 공중 권세 잡은 그렇죠 그 이제 우두머리가 마귀 사탄입니다.
마귀는 존재가 한 명이죠. 마귀들 이렇게 우리가 찬송가에 표현돼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마귀는 하나고 그 마귀 밑에 무수히 많은 이제 귀신들이 있는 겁니다 악한 영들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왕국 사탄이 지배하는 이 왕국 속에 이제 사람들이 그 지배 속에 사실은 살아갔거든요.
그 지배 속에 살아가는 이 세상과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 속에 살아가는 이 세력과 또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면서 계속해서 충돌해 가요.
그래서 어떤 때는 막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밀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약해지는 것 같고 그래서 중세 교회 역사 속에서는 그런 모습이 많이 나타나는 거죠.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대단히 조직화돼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왕들도 교황이 이렇게 다 신앙적으로 컨트롤 하면서 신앙적 문제를 도와주지 않으면 이 왕들이 자기가 뭔가를 하지 못하는 거거든요.
자기의 구원도 해결 못하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제 교회가 이 세상의 왕국을 지배 한 어떤 역사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역사의 실체는 뭐냐 하면 사실은 교회가 이 세상을 지배한 게 아니고 오히려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리면서 이 세상의 요소들이 교회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 거죠.
침투해 들어와서 실제로는 교회가 무너질 뻔한 거예요.
중세의 역사는 교회가 사라질 뻔한 겁니다. 교황이 강력해질수록 실제로는 뭐냐 하면 교회가 사라질 수 있는 그 위기 속에 있었는데 다행히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이제 다시 하나님의 왕국이 힘을 얻고 이쪽 세상 왕국으로 다시 침투해 들어가는 일이 발생한 거죠.
그 역사가 이렇게 힘 있게 일어나다가 그 이후에 종교개혁 이후에도 이제 교회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게 이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근데 이게 우리 교회 전체 역사 속에서도 나타나고 또 우리 새상활교회면 새생활교회에서도 나타날 수 있고 또 우리 개인이죠.
우리 개인에게도 그게 나타날 수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 개인에서부터 우리 교회 전체까지 이런 큰 전쟁이죠.
전투 속에서 우리가 항상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여기에는 이제 대단한 그 치열함이 이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으로 둔감해지면 이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잘 인식을 못해요.
그냥 어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그런 이제 이야기가 자꾸 우리 입에서 나오게 되고 그 실질적으로는 평안하지 않은데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교회가 된다고 그러면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교회는 영적으로 굉장히 이제 이쪽으로 밀리는 겁니다.
연약해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런 어떤 영적 전투 속에 우리가 놓여져 있다고 하는 것을 사실 이 로마서 기술하고 있는 바울은 잘 인식하면서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 어 사도 바울은 결국 우리 교회에게 뭘 얘기해 주려고 하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골로새서 2장에 있는 말씀인데요. 골로새서 2장 15절에 보면 통치자들과 권세를 무장해제시키시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 하고 딱 선언적으로 말씀합니다.
예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고 딱 선언적으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십자가로 예수님께서 기본적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신 거예요.
완전한 승리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 승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려고 하는 거예요.
지금 로마 교회에 이걸 편지를 보내는 거거든요. 로마서라고 하는 것은 그런데 그 교회 속에 사도 바울이 뭘 가르쳐 주려고 하느냐 결국 우리에게 뭘 가르쳐 주려고 하냐 하면 너희는 이미 승리했다 이겼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승리한 사람들답게 이긴 사람답게 살아가라 당연히 그렇게 살아가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을 우리한테 말씀해 주고 그렇게 살아 가라 하고 이제 말씀해 주고 싶은 거죠.
그런데 이제 어떤 부분을 사도는 계속해서 보게 되느냐 하면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는데 우리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그 승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또다시 과거의 실패로 돌아가는 것 같은 그런 모습들이 우리 교회 속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을 본단 말입니다.
그걸 보면서 그 문제를 돕고 싶은 거죠. 그것이 아니다.
너희가 지금 그 자리에 서 있을 사람들이 아니다는 거죠.
근데 그 어떤 면에서는 승리자의 자리에 있어야 되는데 그 실패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실패하는 그 자리에서 잘못된 생각들을 많이 갖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미 승리했는데 계속해서 그 자리에서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그 승리를 내가 다시 이렇게 회복시키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해요.
주님께서 이미 승리하셨거든요. 결산이 다 끝났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이제 이렇게 실패할 때 좌절하고 있을 때, 그렇죠.
전쟁에서 뒤로 후퇴하고 있을 때 우리가 다시 그 주님의 승리를 향해서 나아가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막 힘을 다해서 나가려고 한단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은 율법주의거든요.
율법주의적인 방식으로 다시 주님의 그 승리를 회복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주의적인 방식으로 회복한다는 건 뭐냐 하면 결국 주님이 주신 그 승리 에 우리가 그냥 참 은혜로 참여하는 사람들인데 이제 로마 교회서를 받는 사람들 속에 뭐가 있냐면 과거에 이제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 계명을 잘 지킴으로써 다시 의롭다 함 받고 싶은 거예요.
계명을 잘 지킴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고 그 의를 근거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그 승리 그 은혜 있지 않습니까?
그거 은혜를 다시 받으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죠.
그게 아니다 하고 이제 사도 바울이 얘기하고 너희는 어떤 점에서 이미 승리했고 너희들이 지금 실패 가운데 좌절 가운데 지금 앉아 있든지 승리자로서 막 이렇게 기쁨과 감격의 충만한 상태 상황 가운데 있든지 그건 상관이 없이 너희들 너희 존재 자체가 이미 승리한 그 상태로 있다는 거를 딱 얘기해 주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좌절 가운데 있을 때도 그것을 회복하는 방식이 그렇죠 뭐냐 하면 내가 좌절 가운데 있어도 있어도 우리가 이 좌절을 내가 이 좌절의 문제를 내가 해결하고 주님께 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 좌절된 상태에서도 뭐냐 하면 우리의 의식은 승리를 생각해야 된다는 거죠.
그런 거거든요. 그것을 사도 바울이 다시 가르쳐 주어서 우리 교회가 정말 강한 교회 승리한 교회 그리스도께에서 승리한 승리의 온전히 참여한 그런 모습 교회다운 모습을 지닐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거든요.
사도바울 의식 속에 이제 그게 딱 있는 겁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하자면 나라에 참여한 사람들로서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그 문제를 도와주고 그 문제에서 이제 벗어나서 실질적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이 로마서를 주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지금 우리가 이 오늘 읽은 말씀을 들려주기 위해서 어떤 부분을 이 로마 성도들에게 로마의 여러 이제 교회들입니다.
한 교회가 아니고 여러 교회들 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시는 건데 뭘 말씀해 주냐면 일단은 뭐냐 하면 우리 이제 로마서를 1장부터 6장까지 쭉 읽어보시면 알 수가 있는 말씀들이죠.
그래서 먼저 뭐냐 하면은 죄에 대해서 탁 얘기하고 예 복음에 대해서 먼저 얘기하죠.
사실은 로마서 1장에 보면은 복음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렇게 사실 먼저 선언하죠.
그러니까 교회 속에 끊임없이 어떤 것들이 침투해 들어오면 들어오느냐 하면은 이 하나님을 믿기 이전에 있었던 우리가 우리를 지배했던 죄와 이 사망의 권세가 교회 속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보는 거거든요.
그것 때문에 계속 우리의 속에 어떤 일이 발생하냐면 죽는 일이 발생하는 거죠.
죽는 일 영적인 힘이 죽어요. 생명력이 죽는 일이 발생하는 거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먼저 뭐라고 딱 선포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항상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딱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어 이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고 기본적으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은혜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상태에 따라서 이렇게 있다가 없어지고 이런 것이 아니잖아요.
항상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은혜 안에 사는 승리자들이다 하는 것을 선포를 딱 하고 이제 설명해 나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뭔가를 다시 한 번 이 성도들한테 자세하게 설명을 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너희가 참으로 승리한 사람들이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냐면 너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일이 구속의 사역이 뭔가를 설명해 주려고 하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 구속의 사역을 감당해 주셔야만 하는 그 이유는 뭐냐 온 인류가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거죠. 죄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잖아요.
그래서 이 죄 문제를 청산하지 못하면 다시 하나님과 인간이 그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없는 거죠.
그 문제가 일단 해결이 돼야 되는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뭘 해주셨냐 그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 십자가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죠 십자가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희와 하나님은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화목하게 되었다 딱 얘기하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렇게 딱 얘기해 주는데 이것도 우리가 지난번에 한번 살펴본 적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화목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사도 바울이 6장 앞부분에서 우리가 오늘 본 본문의 앞부분이죠.
6장 1절에서부터 11절까지 말씀에서 그리스도와 이 연합이라고 하는 것으로 딱 설명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해줍니다.
십자가로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일을 구속에 관한 일을 다 행하셨고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는 어 구원받는 사람들이 됐는데 이것이 실질적으로 어떤 역사 속에서 일어났는가를 사도 바울이 다시 한 번 설명해 줘요.
그래서 그 내용이 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딱 지셨을 때 그리스도만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너희도 그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하고 얘기를 해 주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이제 6장 앞부분이죠. 그러니까 어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그리스도와 우리가 영적으로 연합되어져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말이 이렇게 나오는데요.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이게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말을 교회가 잘 사용을 안 하거든요.
우리 교회는 제가 몇 번 얘기를 해서 조금 이제 익숙하죠.
익숙해지고 있는 거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국 교회가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말을 충분히 이렇게 사용하지 않고 이 교리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 구속의 사역에 그 풍성함을 우리 교회에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면이 많습니다.
그래서 칼빈주의 신학의 정수 꽃으로 뭘 딱 꼽느냐 하면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거든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거죠.
그냥 원리적으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거죠.
하나의 어떤 이론으로만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함께 이렇게 죽는 것이 그냥 이론적으로 그렇게 표현하는 내용이 아니고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죽었다는 거죠.
영적으로 우리만 죽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있었던 사람들 있잖아요.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탁 돌아가실 때 그때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함께 죽는 일이 발생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에는 나오지를 않습니다.
이게 나오지 않고 또 우리가 신약 성경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 그러니까 복음서에서 그 표현이 나오기는 나와요.
그런데 이 내용을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설명해 준 분은 사도 바울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6장이 로마서에서만 나와요. 다른 데서는 또 이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너무 이 귀한 진리를 사도 바울이 로마서 서신을 쓰면서 그들에게 주고 또 우리에게 들려주는 건데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떤 연합이냐 우리 교회는 이것을 기본적으로 신비적 연합이라고 이렇게 불러요.
이게 너무너무 신비한 거예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에 돌아가실 때 우리가 그 순간에 그 자리에 참여해서 같이 죽을 수 있느냐는 거죠.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이성 그렇죠 우리가 갖고 있는 경험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너무너무 신비하다 해서 이제 이것은 신비적이다 신비한 연합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기본적으로 그다음에 이 표현은 어떻게 어떤 연합이냐 영적 연합이다 우리 몸이 이렇게 연합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 되는 그래서 영적인 연합이 또 뭐냐 하면 실제적인 연합입니다.
네 우리의 존재의 어떤 면에서는 본질인 거죠. 네 우리의 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몸은 이제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 있을 때는 이 몸도 우리의 영과 함께 본질적 요소인 거는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우리의 몸과 영은 하나죠.
이걸 분리해서는 안 되는 거죠. 몸은 몸이고 영은 또 따로다 그래서 이원론 사상이 우리에게 자칫하면은 이 몸은 이렇게 좀 더 열등한 것이고 영적인 것은 더 높고 이렇게 고상한 것이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영적인 어떤 문제에 관해서는 되게 가치 있게 생각하고 그렇죠 중요하게 다루려고 하고 우리 몸과 관련해서는 좀 등한시하려고 하는 그런 문제들도 교회 속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래서 금욕주의자들이 그런 형태로 많이 나타났죠.
그래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다 보니까 이 몸을 다 망가뜨리는 이 몸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잘 생각하지 못한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이 몸과 영은 똑같이 중요한 거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죽으면 이제 이 몸이 이제 분리되죠.
그래서 몸은 땅으로 흙으로 돌아가고 존재가 소멸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은 그 순간에도 소멸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 우리의 몸이 흙으로 왔다고 하면 우리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거든요.
그래서 이것이 이제 실제로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요소구나 하는 것을 딱 알게 되죠.
그런데 그 영적 연합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있게 되고 이것은 또 생명적 연합이라고 그럽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가에서 이제 부활하시면서 살아나실 때 부활과도 연합되어져서 그 부활과 함께 부활하는 그런 그래서 생명이 우리에게 다시 주어지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우리도 같이 죽고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실 때 다시 살아난 그런 아주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는 거죠.
그런 아주 신비로운 일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이 아 오늘 오후에 사실 어 히브리서에서 이 내용과 관련해서 조금 더 이렇게 생각해 보려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신앙이 어릴 때는 이런 부분을 이제 잘 생각하지 못해서 이게 이제 교리적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가 모든 사람 말하자면 논리적으로 체계있게 정리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 어떤 교리적이다 이러면은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데 교리는 좀 약간 다르게 얘기하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죠.
이 성경의 내용을 우리 교회 역사 속에서 우리 선배들이 이 내용을 어떻게 표현하면 가장 정확한 표현일까 하고 고민고민하다가 이렇게 표현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고 딱 정리한 거 그게 교리거든요.
네 그래서 표현이 조금 바뀔 수 있죠. 그러나 적어도 이렇게 교회 합의 하에 바뀌기 전까지는 그 교리적 표현이 가장 좋은 표현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이게 잘못 이해해 가지고 교리는 성경이 아니니까 좀 이렇게 뒤로 미루고 우리는 성경을 배워야 된다 성경을 직접적으로 공부한다고 해서 성경만 가지고 이렇게 공부를 막 하려고 하는 그런 분들도 가끔씩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오해죠. 오히려 그분들은 교리를 사실은 더 많이 배워야 되는 분들입니다.
교리를 배우면서 성경에서 실제로 우리가 공부를 하다 보면은 과거 우리 믿음의 선배들처럼 어떤 가르침에 대해서 헷갈리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러니까 성경을 대충 알 때는 그게 잘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제 계속 꼼꼼하게 공부하고 자세하게 공부하다 보면 점점점 헷갈려요.
어떤 때는 여기서 이렇게 하는 얘기했는데 나중에 저 뒤쪽에 보니까 전혀 반대의 얘기를 하는 것 같거든요.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통합해서 생각할까 이런 것들이 성경에 대단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을 이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잘 고민하면서 그 전체를 통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딱 정리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딱 이렇게 가르쳐 주는데 그중에 아주 이제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가 이 연합에 관한 교리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 선배들이 이것을 표현할 때 이것은 신비적 연합이고 영적인 연합이고 또 생명적인 연합이다 하고 그 연합의 성격을 그렇게 세 가지로 잘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되어져서 이제 연합되어진 것만 알면 안 되는 거죠.
우리가 연합되어졌다고 하는 것을 일단은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네 그래서 이것이 빠지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다.
그리고 이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한 사역을 우리에게 효과 있게 적용하셨다.
이제 이 정도만 이해해도 참 훌륭한 겁니다. 이 정도만 이해해도 훌륭한데 지금 연합에 대한 이 교리가 이렇게 추가되면 히브리서 6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좀 단단한 식물 같아요.
지각을 사용해서 좀 더 생각을 하고 분별해야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우리가 지각을 좀 더 사용해서 이 교리를 이해하고 그 교리를 이해함으로써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난 이 구속에 관한 일이 얼마나 어떤 명료하게 일어났는지를 잘 이해해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소유하려고 하는 건 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구원 사역에 우리는 동참한 사람이고 나의 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흔들림이 없다는 거죠.
언제든지 확신할 수 있는 사건이구나 아 사건이구나 그 확신할 수 있는 구원이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이제 그 신앙을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교리적으로 우리가 이것을 선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다 교리적 토대 위에서 살아가거든요.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들이 우리를 괴롭히느냐 하면은 성경적이고
구원 진리의 가장 구원 진리를 가장 잘 드러내는 정순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진리 체계로 우리가 잘 교육되어져 있어야 되는데 우리가 그것을 교육하는 데 게으르게 되면 다 보면은요 나름대로 이 구원에 대한 기준들을 갖고 있어요.
아 나는 이러이러했기 때문에 구원 받았지 하고 생각하는데 그 나름대로 자기들 기준이 쭉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갖고 있는 이 구원에 대한 기준들이 토대가 되게 빈약하고 그래서 다른 어떤 그 거짓 진리들이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오게 되면 그 진리 체계가 쉽게 이렇게 흔들린다는 거죠.
그러면서 내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면서 신앙이 이게 문제가 발생해요.
그래서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다시 죄에 빠지고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이 구원 진리 체계가 명확하지 않으면 그 주저앉아 있는 시간이 자꾸 길어진다는 거죠.
거기서 어떤 때는 일어나질 못해요. 어떤 잘못된 진리가 들어왔을 때 그 진리에 의해서 마음이 이제 지배당하면서 일어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 구원에 관한 이 진리 체계를 우리가 잘 알게 되면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는 거죠.
그래서 이게 핵심적인 부분이 뭐냐 하면은 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어떤 뭔가를 해서 명확해지는 것이 아니다는 거예요.
그거죠.
핵심적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도 아무것도 없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인 모습이 하나님의 그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쳐 준다는 거죠.
네 그겁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이 지금 이 어려운 표현들을 써가면서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다 하는 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건이 뭐냐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된 사건이에요.
이것이 일어났다는 거죠. 실제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상관없이 일어났고 그 연합에 연합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그 구원에 관한 일들이 우리에게 다 그대로 적용되어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부활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가 부활한 사람들이라는 거죠.
연합되어져서 그러니까 우리는 그 연합에 대한 교류를 잘 생각하면 뭘 의심해서는 안 되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거잖아요.
그것이 이미 사건이 끝난 사건이에요. 그 부활에서 살아난 사람으로 우리는 여기에 있는 것이고 그 부활 생명은 어 딱 어떤 면에서 이렇게 있다가 우리가 이 땅에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부활 생명은 영원한 영원한 영원성을 갖고 있는 거거든요.
영원히 지속되는 거예요. 네 그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이 연합에 관한 교리로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하는데 이제 사도 바울이 이 고리를 딱 가르쳐주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얼마나 너희의 구원은 안전한가 그 구원의 큰 확신 속에서 너희가 살아라 하는 것을 말씀해 주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이제 그 승리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될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지금 이 말씀을 주고 있는 거죠.
이게 그렇게 어려운 말씀은 아닙니다.
결국 뭐냐 하면은 너희가 구원 받았지만 너희는 지금도 이 두 왕국에서 이렇게 전투 속에 살아가는데 때때로 너희는 이 죄 때문에 이렇게 뒤로 말하자면 패배자처럼 될 수 있다는 거죠.
때로는 이 죄에 굴복되어져 가지고 마치 죄의 지배 속에 다시 들어간 것 같은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그것은 아니다 하고 일단 말해줍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지만 뭐가 해결이 안 됐냐면 부패성이 해결이 안 됐어요.
죄 원죄라고 하는 것은 죄의 책임과 부패성 말하자면 전적 타락의 문제를 두 개를 묶어서 원죄라고 그러거든요.
우리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 그 원죄가 우리에게 다 전가되거든요.
후손들에게 뭐가 전가되느냐 하면 죄에 대한 책임과 그리고 부패성이 우리에게 전가됐어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그 부패성 죄로 말미암은 부패성이 태어나자마자 그 후손들은 다 그 부패성을 안고 태어납니다.
원 죄에 대한 책임도 갖고 태어나는 거죠.
그런데 이 죄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누가 해결해 주셨냐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신 거죠.
그 죄에 대한 책임 그러니까 죄로 말미암는 정죄와 하나님의 심판이죠.
그것은 다 해결해 주신 겁니다. 우리는 그 부분은 우리가 할 게 없는데 뭐가 남아 있냐면은 부패성이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부패성이 타락 구원받기 전에 부패성과 구원받은 이후의 부패성은 또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어떤 부패성이냐 지정의가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부패성이에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그 힘이 없는 어떤 완전한 부패성인데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는 뭐냐 하면 지정의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들이 이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은혜의 역사들이 나타나면서 그리고 우리의 어떤 지성적으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하나님이 창조자시고 하는 것을 딱 지각할 수 있는 새로운 지성이 열리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지정의의 의지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그 열망도 같이 갖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본성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거 맞아요.
그리고 우리의 본성 속에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 열망과 거룩한 열망과 하나님을 믿기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 부패성이 같이 이렇게 공존하는 상태로 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같이 갖고 있으면서 우리 안에 그 두 본성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계속 예수 믿고 살아가는 것은 뭐냐하면 그 이 두 본성이 계속해서 충돌하며 살아가는 삶이고 이 로마서에서 바울은 그런 독특한 존재로 너희가 지금 살아가는데 그 치열한 전투 속에서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었는가 이제 그걸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우리가 산다라고 하는 게 뭔지를 가르쳐주고 그 삶의 계속해서 참여 실질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그렇게 참여하는 삶을 이제 잘 살아갈 때 이 우리 자신도 그렇고 이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그 구원의 그 풍성함이 있지 않습니까?
영광스러움에 참여하고 그 속에서 정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공동체 되기를 바라시죠.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교회가 나타날 때 제일 행복하세요.
하나님이 그래서 그래요. 하나님이 행복하시려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싸움에서 승리하고 그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 풍성한 그 구원에 참여해서 우리가 기쁨이 충만한 아 정말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이렇게 막 입에서 그 심령에서 이게 막 터져 나오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세요.
그때 하나님의 기쁨이 가장 충만해지시고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기대하면서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하는 거거든요.
근데 이 두 그 싸움에서 바울이 뭐라고 말씀을 하셨냐면은 너희 자신을 너희 존재를 이게 이제 핵심입니다.
이것만 잘 기억하면 돼. 너희 존재를 끊임없이 하나님께 드리라 그럽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너희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라 하면서 하나 한 번 더 뭐라고 강조하냐면 처음에는 너희 자신을 그럽니다.
너희 13절에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고 나서 그다음에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그러니까 너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에는 우리의 대단히 능동적인 투쟁 투쟁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게 이제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 살지 않습니까?
근데 은혜로 살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있고 이미 임해 있고 그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가 그 은혜가 우리를 살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분들이 또 있으세요 이게 실제로 교회 역사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이게 굳이 교회 역사까지 안 해도 우리도 보면요. 그게 우리에게 나타나요.
은혜를 강조하다 보면 자칫하면 우리의 의무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 속에서는 어떤 부분이 나타났냐면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게 맞다.
그렇게 해서 하이퍼 칼빈주의라는 분류하면 그래요.
칼빈주의는 칼빈주의 같은데 뭔가 이상해요 하이퍼 칼빈주의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 강조하다가 인간의 책임을 빠뜨리는 그런 사상이 등장합니다.
그 교회 속에 그것이 지배할 때 교회에는 어떤 일이 발생하냐면 실질적으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그 노력들을 안 하고 그 은혜를 실질적으로 풍성히 못 누려요.
하나님의 은혜가 다 아신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뭐냐 하면 본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별로 못 누리면서 살아요.
그러니까 별로 교회 역사에서 그들이 한 일이 그러니까 대표적인 것이 선교와 관련해서 한 일이 별로 없어요.
교회가 계속해서 교회가 위축되는 거예요. 이제 그것도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런 문제 떨어질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다.
이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능동적으로 이렇게 영적 투쟁이 일어나야 되는가 하는 것을 얘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잘 살기 위해서 감당해야 될 우리의 책임은 그러면 몇 퍼센트냐 100%입니다.
100% 100%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100% 우리의 노력으로 산다는 것을 같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총으로 일어나지만 성화는 뭐냐 100% 우리의 노력으로 이렇게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근데 그 100% 우리의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전제되어 있느냐 하면 100%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게 또 말이 안 돼요.
에 백을 어떻게 이 두 개로 이렇게 나눌 수가 있어요 그죠?
100% 하나님의 은혜라고 얘기하고 100% 우리의 노력이라고 하는 게 이게 말이 안 되는데 그래도 우리가 대충 감은 오지 않습니까?
감은 오거든요. 우리의 노력이 계속해서 있어져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도 지금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너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을 로마서에서 쭉 얘기하고 나서 여기 와서 그리고 나중에 이제 로마서 뒷부분에 가면 훨씬 더 구체적으로 얘기합니다.
훨씬 구체적으로 이 삶의 정황 속에서 너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주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 너희 자신을 너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데까지 나아가야 된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너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대표적인 예 같으면은 우리의 가지고 있는 능력 이 지체라고 하는 것은 이제 너희 우리 존재 전체를 말하는 거거든요.
한 부분 부분에서 이렇게 나눠서 바울이 표현하는 것은 어 너의 존재를 하나님께 드릴 때 얼마나 구체적으로 들어줘야 되는가 하는 걸 얘기하는 거죠.
그렇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존재를 드리는데 우리 눈으로는 어떻게 해야 되고 그렇죠 심지어는 이제 우리가 냄새를 맡은 거 우리가 말하는 거 행동하는 거 이렇게 표정 짓는 거 그렇죠 내가 갖고 있는 능력으로는 어떻게 이것이 표현되어져야 되는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이제 잘 표현되면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거고요.
그게 그래서 우리 이제 말 행동을 보면은 어 그 말과 행동이 때로는 다른 분들에게 상처를 준다든지 그렇죠 관계를 깨어지게 하는 그런 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위로의 말이나 격려의 말이나 칭찬의 말이나 이런 것들 통해서 오히려 그것이 회복이 되고 그렇죠 사랑이 더 충만해지는 도구로 쓰일 수 있잖아요.
우리의 능력이 크면 클수록 내가 소속된 곳에 어떤 면에서는 파괴를 가져올 수도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크면 이제 큰 능력이 그 큰 만큼 또 더 충만한 생명을 가져올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 너희가 살아가면서 너희 존재 전체를 통해서 표현되어져야 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먼저 잘 생각하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건 당연한 겁니다.
사실은 하나의 하나님 거예요. 드릴 것도 없어요.
사실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근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청지기로서 잠시 맡겨주신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지키는 청지기 우리 자신 존재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나 자신을 돌보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그렇게 잘 안 하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아예 그런 부분까지 염두에 두면서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거 두 가지를 잘 생각해야 됩니다. 내 것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죠.
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드려야 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뭐냐 하면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고 다시 인정하고 그 하나님의 것을 다루는 사람다운 그런 모습이 우리 모든 그 모습 그 형태로 표현되어져야 된다 하는 것을 오늘은 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로마서 6장 말씀 다시 한 번 살피면서 우리가 하나님 존재 하나님의 귀속된 사람들인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이 일을 얼마나 힘을 다하여 감당해야 되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은데 이것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지만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기반한 생각들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이런 연약함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주님 우리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은혜를 의지하여 저희의 지정의 전 영역이 다시 하나님의 뜻에 향하여 바르게 재편되어지게 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땅히 드려야 할 우리 존재 전체인 것을 기억하며 우리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표현해 나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그런 모습이 우리 속에 잘 드러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또 하나님의 진리가 충만한 모습 우리 속에 잘 드러나게 해 주시고 그로 인해서 우리가 복음 안에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그 모든 은혜와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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