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새생활교회 당회장 박주동 목사

예배/말 씀

숭신교회연합예배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신앙 (히브리서 6장 1-2절) 박주동 목사

예배하는 사람 2026. 2. 12. 04:56

숭신교회 연합예배

 

260208말씀숭신교회연합예배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신앙 (히브리서 6장 1-2절)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6장 1절 2절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6장 1절 2절 말씀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주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다시 한 번 주목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보면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벌을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해서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기자가 우리에게 더 성숙한 신앙을 요구한다 하는 것을 금방 생각하게 되죠.
이 말씀을 주는 배경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생각하면 좋겠죠.

이 말씀을 하게 된 이유는 이 히브리서라고 하는 이 편지가 되겠죠 이 편지를 한 교회에 보내게 되는데 정확하게 히브리서 같은 경우에는 저자가 누군지 또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가 누군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다양한 견해들이 있게 되는데 공통적으로 이렇게 이 저자는 누구다 또 수신자는 누구다 하고 확정 지은 그런 역사는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대체로 초기에 바울이라고 하는 주장이 많았었는데 바울의 문체와 많이 다른 것 같다 해서 혹시 바나바가 아닐까 어쨌든 간에 사도의 어떤 권위에 준하는 분의 기록이거나 아니면 사도의 어떤 대필자로서 누군가가 기록을 하고 보냈을 것 같은데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데 히브리서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번쯤 이렇게 본 다 기억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를 쭉 읽어보면은 그 내용이 상당히 유대적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죠.

그러니까 히브리서에 나오는 특히 대제사장이라든지 제사 제도와 관련해서 이 내용이 진술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그 제사 제도에 대해서 제사와 관련된 그 율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과 관련한 이해가 상당히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지금 이 편지를 하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죠.
그래서 이 수신자들이 어떤 상당한 유대적 배경을 가졌거나 아니면 실제적으로 유대 출신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는데 이 지금 편지를 하는 사람에게 어떤 문제의식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이 편지를 전달할 때 그 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를 돕기 위해서 지금 이 편지를 사실 전해주는 거거든요.

근데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느냐 하면은 이 전체적인 흐름을 우리가 이렇게 보게 되면 그들이 유대적 율법 유대 율법에 익숙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항상 소중하게 생각되어져 왔던 어떤 성전 중심의 제사라든지 또 율법과 관련돼서 어떤 여러 가지 교례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을 잘 지키는 것이 여전히 중요할 것 같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그 이전에 어떤 살아왔던 삶의 어떤 방식들 중에서 이런 것들은 계속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을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특히나 이건 종교와 관련해서 당시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 성전에 대해서 특히 오늘 이 본문의 내용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어떤 세례와 관련해서 안수와 관련해서 여전히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러니까 이들에게 세례라고 하는 것은 이제 정결 예식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런 정결 예식에 관한 것들을 여전히 우리가 좀 다시 해서 준수해야 되지 않는가 심지어 이제 예수님 시대에도 보면 그렇죠 예수님이 그런 정결 예식에 따라서 행동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손을 이제 씻고 하는 집에 방문할 때 그래서 그런 것들이 그냥 단순하게 형식적인 것을 넘어서서 그들에게는 대단히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씻는 행위 자체가 자기를 정결하게 하는 어떤 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고 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안수 같은 경우 유대인들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제사를 지낼 때는 짐승에게 안수를 해서 그 제사가 이루어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리고 또 어떤 안수라는 어떤 이런 형식을 사용해서 어떤 사람을 축복하거나 어떤 사람에게 직임을 부여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안수라고 하는 행위나 세례라고 하는 이런 것들이 여전히 중요하고 그것을 우리가 예수 믿고 살아가면서도 계속해서 유지해 가야 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 사도가 이 저자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냐 하면은 그들은 그런 것을 잘 여전히 계승해 가는 것이 그러니까 예수님 믿고 예수 믿은 신자들이 표현해 내야 되는 그런 신앙의 어떤 자태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과 함께 과거에 자기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그런 것들을 잘 융합해서 같이 이렇게 뭔가 표현을 해야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어떤 문제를 발생시키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이 복음의 능력 그 하나님의 그 은혜잖아요.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혜의 그 충만함 은혜 됨 이것을 실질적으로는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로 작용한다는 거죠.
그래서 결국 사도들이 편지를 통해서 우리 교회에 전달 전달해서 기대하는 게 뭐냐 하면은 그것은 모든 서신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우리 교회가 세워지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그 풍성한 은혜 그겁니다.

그 복음의 힘 그 생명력 이런 것들 능력 있죠 그것을 우리 교회가 잘 드러내는 겁니다.
잘 드러내서 그 복음의 능력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실제적으로 살고 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복음적 능력 안에서 기쁨이 충만한 삶 감사가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거거든요.
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난 그 결과들 은혜가 나타났을 때 우리가 보일 수밖에 없는 그 반응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나타나기를 원해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 엄청나지 않습니까?
엄청나거든요. 그래서 그 은혜가 제대로 우리 교회 속에 우리 자신에게 증거되어진다고 하면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정말 무릎 꿇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그 위험과 권세와 영광에 굴복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이 충만해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서에서 말한 것처럼 항상 기뻐하라 그렇게 명령해도 괜찮다는 거죠.
그게 명령이 힘든 것을 순종하라는 명령이 아니라는 거죠.
기뻐하라 감사하라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 존재 자체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거예요.
그게 힘든 건데 이렇게 하라 해서 막 명령에 너희가 순종하라 그래 주신 것이 아니고 실제로 복음이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제대로 우리가 그렇게 밖에는 반응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사도바울이 너희가 지금 현재 너의 모습을 보면서 너희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한번 생각해 봐라 하는 거죠.
그래서 그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때 그렇게 나타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결국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거죠. 선포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의 존재 목적은 사실 거기에 있는 거죠.
세상이 원래 온 세상이 하나님의 그 이름을 기억하고 그 영광을 알고 선포해야 되는데 그걸 안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셔가지고 자녀 삼고 백성 삼으셔서 뭘 원하느냐 하면 이제 우리가 그렇죠 대표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시다.
역사하시는 분이고 결국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을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제 표현해 내시고 이 세상이 그것을 보면서 정말 교회를 보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다 그래서 이제 교회로 어떤 사람들이 유입되는 일이 발생하고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점점점 많아지게 될 때 그와 비례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선포되는 그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런 결과 그런 결과를 우리 사도들은 그리고 있습니다.

모든 편지에서 그러니까 그렇게 복잡한 건 아니죠 그렇죠 우리가 잘 아는 것 다 늘 중요해서 항상 반복해서 배우는 그것이고 우리가 교회를 통해서 표현해야 되는 게 뭔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우리 교회들 속에 이때도 마찬가지죠.
그 유대인들이 아마 중심이 된 그 교회 속에 그런 모습들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문제 의식을 갖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편지가 지금 전해지고 있다고 보여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어떤 문제가 특히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에 대해서 조금 이렇게 갸우뚱 하는 게 이제 있는 거죠.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그 구속의 속죄 사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순종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을 완성시키시는데 그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과연 온전한 속죄 사역인가 한번 이렇게 의구심을 품을 수 있는 어떤 그들에게 질문이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이런 거죠. 예수님은 유다 지파 쪽 사람 계열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유다 다윗 네 그렇게 해서 요셉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우리가 마태복음의 1장에서 예수님의 계보에 대해서 배우지 않습니까?
그 계보에 따르면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인데 어떻게 예수님은 그런 분으로서 구속에 관한 이 사역을 감당하셨는가 하는 질문 그러니까 우리는 그것을 잘 몰라서 오히려 질문을 안 할 수도 있어요.
예수님 그러니까 어떤 제사장적 사역은 그죠 레위 지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이제 유대인들이 아닌 사람들은 잘 몰라서 아예 그것에 대해서 질문 자체도 하지 않는데 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특히 그 제사와 관련된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게 조금 이상하거든요.
예수님은 유다의 계보를 잇는 사람인데 레위 지파 쪽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십자가의 이런 사역이 대제사장 그러니까 제사장적 사역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가 하는 어떤 질문이 있는 거죠.

그런 질문이 있다는 것을 이 편지를 보내는 분이 정확하게 간파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한 사역이 온전한 사역이라고 하는 그 부분에서 이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역에 그 온전함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결여될 수 있고 그것 때문에 교회 속에 마땅히 주어지고 누려야 될 은혜가 약화되고 있는 것을 보는 거죠.
그래서 그 부분을 이제 교정해 주려고 하는데 중요한 목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자 이 편지를 보내는 분이 뭘 근거로 해서 말씀을 드리느냐면은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시는데 그게 아론의 그 계열을 따라서 그 사역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뭐라고 딱 얘기하냐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이 사역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딱 얘기합니다.

그렇게 얘기하고 나서 뭐라고 또 얘기 말씀하냐면 이제 그 11절에 나오는데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 함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어려운 내용을 지금 말씀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핵심은 분명한 거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그 사역이 이루어졌고 대제사장적 사역을 감당했다고 하는 그러니까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하는 일이 뭡니까?
짐승의 피를 들고 유일하게 시장을 지나서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하나님께 드려야 될 특히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야 될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잖아요.
그 일을 예수님이 하셨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냐면은 자신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신 거죠.
그래서 이 히브리서에 보면은 하늘 성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성서에 자기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셨다 하고 이제 얘기하는데 다른 서신이나 뭐 책에서는 우리가 좀 접하기 어려운 아주 놀라운 사실 장면들이 기술이 되고 있죠.
히브리서에서 그리고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행하신 그 부분을 왜 강조하느냐 하면 멜기세덱은 영원한 대제사장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분입니다.
멜기세덱이 과거 아론의 계열은 제사장이 계속 바뀌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드린 제사는 한 번의 제사로 이렇게 영원한 영원성을 담보할 수 없는 계속해서 제사 드려야 되는 그런 제사이거든요.
그리고 그 제사는 또 사실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없이는 의미가 없는 제사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다 하는 말 속에 어떤 게 있냐면 예수님의 이 제사는 영원한 제사다 하는 것을 그 속에 담겨 있어요.

영원한 제사고 그리고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는 단번에 드린 제사다 그러니까 영담번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 한 번의 제사로 영원한 효력을 가지는 그런 제사다 하는 것을 설명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보면은 아 그거 하고 이거 하고 완전히 이렇게 탁 연결해서 충분하게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다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여기서도 이것은 어렵기 때문에 안에서 그런데 너희가 이제 다 이런 부분은 다 이해하기 어렵지만은 어쨌든 간에 이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영원한 제사 그러니까 한 번의 제사로 그 효력이 영원한 그런 성격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이제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그러므로 그 온전한 그 제사에 기반해서 우리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그 조상 때부터 몰려왔던 여러 전통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얘기해 줍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6가지 과거부터 내려왔던 아주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들이 나와요.
보면은 하나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나오는데 이것들은 유대인들이 다 원래부터 중요하게 생각했던 교리들입니다.
그래서 이 지금 이 기자가 이런 교훈의 틀을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잘못 읽으면 어떻게 읽을 수 있냐면은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고 지금 얘기하는 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제 빨리 이제 제쳐두고 기본적인 것은 두고 더 완전하다고 하는 더 중요한 것들을 향해서 가야 됩니다 하고 오해하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고 동시에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6가지 이 기초 위에 우리는 놓여져 있습니다. 신앙이

신앙이 그래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하는 것은 이 중요한 기본적인 교훈을 근거해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대제사장적 사역과 통일성 있게 이해하라는 거죠.
그것에 기반해서 이것들을 과거 조상들부터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던 그런 전통에 관한 것들을 바르게 이제 소화하고 그것을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다시 잘 표현해 내라 하는 겁니다.
실제로 이제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하는 이 말은 뭐냐 하면 결국 이 6가지를 중심으로 한 기초적인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초적인 교리를 더욱 풍성하게 우리가 소화하고 그 소화한 내용이 실제 우리 신앙을 통해서 우리 교회 전체를 통해서 표현되게 하라 하는 내용이다라는 거죠.
그래서 이것을 오해하시면은 안 되고 이 교훈이 말씀을 통해서 이 주는 이 교훈이 우리 교회에 특히 한국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 교회도 보면은 또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믿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언약 백성으로서 산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표현해 내야 되는데 실질적으로 보면은 정말 제대로 표현했다 하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모습들이 우리 교회 우리 속에 우리 교회들 속에 아직도 대단히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우리 이제 한국교회가 좀 이렇게 기복적인 이해 기복적인 신앙 어떤 그런 요소들 또 동시에 뭐냐 하면 율법주의적인 그런 면들도 한국 교회 속에 많습니다.
율법 을 통해서 율법주의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신앙적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어 우리의 의를 주장할 만한 어떤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가끔씩 내가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하나님 앞에 당당해져요.
그런데 또 신앙생활을 못하면 우리가 마음이 막 이렇게 위축되고 그러거든요.
뭔가 하나님 앞에 다시 시작해야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막 든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우리 속에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하는 의롭다 함 받으려고 하는 그 성향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사실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보실 때 그래요.
신앙생활 잘할 때나 신앙생활이 엉망일 때나 보면 하나님이 보실 때는 큰 차이가 사실 없습니다.
그게 그거예요. 아주 잘할 때도 마틴 루터가 뭐라고 했냐면 우리가 하는 모든 그 선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반짝이지만 다 악이다 그래요.
빛나는 악입니다. 그랬어요. 우리가 하는 하나님 앞에 모든 선행들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빛나는 것 같은데 다 악이라는 거죠.
아주 정확한 거죠. 우리가 그 정도밖에 안 돼. 그런데 우리가 그 상태에 있는 줄 다 아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뭐라고 선언하시냐면 내가 나의 그 모든 구속을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정결케 하고 하나님 백성 되게 하고 자녀 삼았다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 하나님의 선언은 그 효력이라고 하는 것은 변함이 없는 거거든요.
그것을 잘 생각하면 우리가 잘할 때는 겸손해져야 돼요.
그렇죠 열심히 할 때는 자꾸 겸손해져야 돼요. 그리고 우리가 잘 못해도 부끄러울 때로는 부끄러워도 그걸로 인해서 나를 정제하느라고 시간 보내는 일이 없어야 된다는 거죠.
나를 정제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하나밖에 없거든요.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는 은혜를 받아야지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은혜를 받아야지 회개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 계속해서 나갑니다.
범죄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중한 어떤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오히려 더 힘있게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는 거죠.

예수님의 십자가를 또 붙잡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냐면 그 은혜가 우리에게 역사해서 참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해 달라고 그렇죠 회개되어지는 그 역사가 우리 속에 나타나게 해달라는 거 그러니까 우리의 모습은 항상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 나아가고 은혜를 누리는 그 삶의 구조 있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거죠.
그것을 우리 사도들은 정말 가르쳐주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교회 속에 가끔씩 형식화되거나 은혜가 부족한 그런 경우 있지 않습니까?
교회 속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뭐냐 하면 우리 교회들이 이 복음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다는 거죠.
우리가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는 것을 지적해 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 말씀도 그런 한 예를 지금 사실은 인식하면서 지적하고 그걸 교정하려고 하는 그런 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완전한 데로 나아간다는 것은 오늘 아까 찬송할 때처럼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리스도만 완전하세요. 우리는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잘해도 항상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 언약 백성다운 모습 나타나는 거예요.
그 모습이 잘 나타나면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완전하다고 이렇게 봐주시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불완전한데 어떤 점에서 또 온전하고 완전하냐면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의 구속을 우리가 힘입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 사역은 이제 온전한 사역인데 그 온전함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셔서 주님이 우리를 죄를 우리를 거룩하게 한 그러니까 칭의 하신 그것은 완전한 거죠.
그러니까 우리의 칭의 우리의 이 거룩함은 완전한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칭이와 함께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분이면서 그것을 우리가 깊이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어떤 것을 우리는 이제 숙제가 남아 있냐 하면은 아직 거룩해지지 않은 아직 거룩하지 않은 그러니까 이미 거룩하나 아직 그 거룩함에 온전히 이르지 못한 우리의 이 간극을 이제 인식하면서 그 주님께서 우리를 칭의하시면서 부여해 주신 그 거룩함에 힘입어서 그 거룩함을 향해서 계속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이에요.
그것이 이제 점점점점 나아가면서 우리는 이 완전하다고 하는 그렇죠 이 성숙함으로 이제 완전하다 하는 것을 신앙적 성숙함이라고 이렇게 표현하면 좀 제일 좋은 표현일 것 같습니다.
그 성숙함을 향해서 쭉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이 사도가 이 기자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적 성숙과 진전을 우리가 다 소망하게 되는데 이 말씀은 뭐냐 하면은 이 기본적인 어떤 중요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아는 지식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 위에 우리가 잘 세워지고 그 지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그 지식들이 실질적으로 우리 교회와 우리 개인의 신앙에 어떻게 잘 적용돼야 되는지를 우리가 이제 깊이 고민하면서요.
그래서 그것을 많이 고민하면서 딱 이미 요약해서 우리에게 다 가르쳐 준 것들이 있죠.
그게 우리가 귀하게 생각하는 교리들 아닙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같은 그런 것들을 우리가 유심히 봐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걸 보면 우리가 지각을 사용해서 좀 더 견고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거 그래서 이렇게 연약한 이들의 특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진리 그렇죠 확신 가운데 거해야 될 그 진리에서 자꾸 이탈하면서 신앙이 흔들리는 거죠.

그 흔들림이 없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하나님 은혜 안에서 확신하게 된 그 바에 대해서는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그것을 견지해 가는 그런 모습이 우리 속에 잘 나타나서 결과적으로는 뭐냐하면 우리 교회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계속해서 힘 있게 나타나도록 충만하게 나타나게 해서 그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교회를 넘어서서 세상을 향해서 힘있게 뻗어나가는 그것을 우리도 이 말씀과 함께 한 번 더 생각하면서 우리 교회 또 우리 자신 나 자신도 그런 신앙적 어떤 꿈과 비전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그 은혜 속에 잘 거하고 또 지각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고귀한 어떤 신앙적 우리 유산들을 우리 교회가 상속하고 그것을 이제 자기화하는 그런 과정들 잘 감당해 갔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연합예배 드리면서 히브리서 말씀 같이 살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 교회들 속에 풍성히 나타나야 하는데, 우리가 때때로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가리거나 또 오해하거나 또 왜곡되게 이해하는 그런 경우들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그러한 연약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복음이 우리 교회 속에 충만하게 나타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땅히 드러나야 할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될 때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주님의 그 긍휼을 더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교회들 속에 더 힘 있고 또 밝고 명확하게 선포되어지게 하여 주시고, 우리 교회들이 다시 한 번 복음으로 돌아가는 그러한 회복의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그 영광이 참으로 충만히 드리워져서 우리가 그것을 누릴 뿐만 아니라 또 그것을 세상을 향하여 선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것을 통하여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기쁨이 우리 가운데도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