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215말씀 죄와 은혜의 지배(2)... 로마서 6장 12-14절...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난주에 우리가 같이 살펴봤던 말씀입니다.
로마서 6장 12절부터 14절까지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육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라 주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말씀 지난주에 살펴봤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참 어려운 말씀인데 이 말씀을 왜 정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 말씀을 준비하면서 몇 번은 하게 됐습니다.
이 말씀 잘 쉽게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겠다 하는 생각이 이제 들어서 너무 말씀을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전해주고 싶은 그 의욕이 조금 앞선 것 같다 이런 생각도 하곤 했는데 어쨌든 이 말씀을 잘 들으면서 소화해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이 정말 사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잘 해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에게 그렇죠 우리가 기대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제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그 형상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계속해서 이제 성장해 가는 거거든요.
그런 신앙적 성숙함에 우리가 나아가기를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이제 그렇게 됐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얼마나 기뻐하시고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향해서 이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과 함께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사실 즉각적으로 거룩함을 덧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존재 자체가 예수님 믿기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이제 다른 거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를 우리의 의로 간주해 주신다 그 말이죠.
전가한다는 말이 간주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로 간주됐다고 하는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그 거룩하신 것처럼 그 의로우신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사람들이 이제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거룩함의 즉각적 요소, 성화의 즉각적 요소가 우리에게 이제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화의 즉각성에 대해서 우리 교회들이 사실 충분히 강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 속에서 웨스트 웨스트민서 미국의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우리 개혁파 진영에 대단히 그런 면에서 이제 저명하신 또 뛰어난 우리 선생님이죠.
존 머레이 존 머리 이렇게 우리가 표현하는데 선생님이 우리에게 성화의 적합성과 점진성에 대해서 이 두 표현을 사용해서 이 성화의 또는 우리가 이제 성화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할 때 반드시 구분해서 이해해야 되는 이 두 측면을 우리 교회의 역사 속에서 가장 어떤 면에서는 명료하게 표현해 내신 분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믿고 이렇게 성화되어져 가는 사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인데 그것이 그냥 우리가 예수님 믿고 이제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은혜를 계속 스트레스 받으면서 그 은혜에 기반해서 이렇게 성화되어져 간다 하는 이 정도 이제 보통 생각하지 않습니까?
근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개념이 뭐냐 하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이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거룩함에 기반해 있다는 거예요.
그 거룩함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데 그것이 우리가 예수 믿으면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총이 이렇게 주어지지 않습니까?
그 은총과 이제 연결해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인 거죠.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인 거거든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그 거룩하심을 우리에게 이제 부어주셔서 우리를 주님은 법정적으로 그렇죠 법정적으로 원리적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딱 선언하셔 가지고 우리가 이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장해 갈 때 그것을 계속해서 이끌어가는 동력이 거기에 있다고 하는 것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신 그 거룩함을 우리가 기반해서 우리는 그 거룩함에 계속해서 나아가고 이르는 사람들인 것이지, 우리가 어떤 노력을 이렇게 막 하면 그 노력한 만큼 이렇게 거룩해질 수 있다.
그쪽 어떤 측면에서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을 너무 강조하게 되면 우리는 대체로는 어떤 문제에 떨어지냐면 율법주의에 딱 떨어지죠.
그래서 계속해서 잘하고 있는지 내가 못하고 있는지 그것을 관찰하고 감독하는 사람이 돼 버려요.
근데 실제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거 보면 다 엉터리잖아요.
계속해서 뭐라고 그래 나한테 왜 그래 오늘 또 이렇게 잘못했네 좀 잘해야지 하고 계속해서 질책을 하거든요.
근데 그쪽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미 의롭다고 해 주시고 거룩하게 해주신 그 은총의 그 자리에서 나 자신을 따라 계속해서 바라보면서 나를 어떻게 대하는 겁니까?
계속해서 격려하는 거죠. 잘못하면 잘못한 그 자신을 보면서 어떻게 우리가 생각하냐 하면 그렇지.
원래 내가 원래 내가 그런 사람 아니냐 예전에는 그것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았는데 그래도 이 정도 좋아진 거 대단하다 이렇게 그렇죠.
나 자신을 그렇게 보고 격려해 줄 수 있는 그 눈을 가지게 되는 거거든요.
근본적으로는 어떠냐 하면 우리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또 아무리 잘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사실은 칭찬할 만한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를 주님께서 끊임없이 칭찬하시고 인정하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의 있지 않습니까?
그 의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사실 하나님이 보실 때도 우리 존재가 어떤 존재냐 대단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보실 때 왜 이렇게 형편이 없냐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이렇게 주어졌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그 의에 근거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엄청나게 높인 거 아닙니까?
그렇게 높여도 괜찮은 거고 그렇죠 그렇게 높여도 괜찮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고 하나님과 함께 이렇게 교제해도 좋은 그 대상들로 우리를 인정하시는 거거든요.
그것을 이렇게 생각하게 해줘요.
뭐가 생각하게 해주냐 하면 예수 믿고 우리가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어졌다고 하는 예 우리는 이미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다라는 겁니다.
그게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과거형이 된 거예요.
그 측면을 우리가 기본적으로 잘 이해하면서 우리는 이제 거룩하게 된 사람들로서 그 거룩하게 된 사람에 걸맞게 나 자신이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기를 소망하면서 이제 살아가는 사람들인 거죠.
그것을 이제 생각을 잘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미 거룩하게 해주신 이 측면을 놓치게 되면 자칫하면은 내가 그 거룩함의 마치 주체가 돼서 나를 거룩함을 향해서 예수 닮은 그 신앙적 성장이죠.
성숙을 향해서 끌고 가는 사람이라고 계속해서 착각을 한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한국 교회 속에 상당히 만연돼 있습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우리 한국 교회가 잘못 가르쳐서 그런 거는 아닌 것 같아요.
우리 교회들이 그래도 전 세계에서 보면요. 성경을 가장 잘 가르치는 교회들이 쫙 모여 있는 나라예요.
한국 교회가 한국 교회만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존중하고 이것을 그대로 믿으려고 하는 거의 지금은 거의 유일한 나라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지금 교회들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냐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우리는 이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이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요.
비슷한 것 같은데 완전히 다르거든요. 그래서 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려고 하겠죠.
찾아요. 그래서 이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것들이 있고 그 속에서 어떤 하나님의 뜻과 이것은 부합하다고 하는 생각되는 것을 자기들이 찾아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이것은 객관적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데 많은 지금 교회들은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될 때 이것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하는 게 이제 바르트의 사상이 그렇습니다.
칼바르트의 그 생각에 어떤 것이 있었냐 그런 생각이 있었던 거죠.
이것이 아직까지는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데 이 말씀이 이렇게 딱 선포되면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것이 내 마음에 탁 와닿으면 그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그런 생각들이 대세예요. 대세 우리는 지금 한국 교회에 있어서 잘 인식을 잘 못하는데 실질적으로는 그런 그 정도로 심각한데 한국 교회 속에 그 말씀이 분명히 잘 가르쳐지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의 이 본성 자체가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이 부패성이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는 쉽게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물에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그 반응들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하도 물 위에서 놀아서 물에 탁 빠지면 몸에 힘을 차 빼거든요.
근데 수영을 이렇게 못하시는 분들은 물에 빠지면요.
온 힘을 다해서 이렇게 탁 그렇죠 물에서 뜨려고 그래요.
힘을 다해서 물에 떠서 뜰려고 하거든요. 그것이 우리의 그 위기 속에서 내가 여기 이렇게 해야 살겠다고 하는 그 어떤 생존 본능에 가깝다는 거죠.
그래서 이게 지식적으로 계속해서 반복적인 훈련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몸에 이렇게 몸에 힘을 못 빼는 그런 모습하고 비슷한데 우리가 이제 생존 본능이 어떠냐 하면은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삶을 향해서 이제 나아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가 쭉 이렇게 계속해서 한편으로는 떠밀려서 가는 어떤 그런 모습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히려 의지를 조금 더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의지하는 그 반복적인 사실은 인식의 어떤 그렇죠 또 우리 존재 전체가 그 체질적으로 이렇게 쭉 바뀌어 가야 되는데 바뀌기 전에 우리가 끊임없이 뭐냐 하면은 그것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할 때 내가 가지고 있는 힘과 의지를 다 동원해서 잘 해봐야지 하는 그러한 방향으로 금방금방 이렇게 바뀐다는 거죠.
그게 익숙하고 그게 우리한테 잘 맞아요. 우리 잘 맞는 옷처럼 그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진리가 필요하다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게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진리를 기반해서 이것을 다시 해서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이고 이것을 반복해서 우리가 계속해서 들어서 이 진리의 체계가 우리 이 지성의 딱 이렇게 틀로서 자리를 잡아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물에 탁 빠지면 즉각적으로 힘 빼야지 하고 자동적으로 이렇게 반응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상황에 탁 빠지면은 내가 거기에서 내 스스로 이렇게 살려고 하는 그 의지를 한 번 더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거죠.
지난번에는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바라보려고 할 때 그때 우리가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었죠.
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시니까 우리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는 거 이것도 비성경적이라고 이제 얘기했죠.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은혜를 바라보는 그 은혜를 의지하려고 하는 우리의 노력은 최선이 요구된다는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뜻이 뭔지를 공부하고 그것으로 나를 가르치고 그 가르침에 부합하게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도록 나 자신을 이렇게 관찰하고 감독하고 그렇죠 순종할 때까지 이렇게 도와가는 그러한 노력은 우리에게 나타나야 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렸죠.
그러니까 이것이 좀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 해서 그것이 나의 삶 속에 나타나도록 하는 데 필요한 우리의 노력들은 노력들과 내 자신이 이렇게 잘못했을 때 그 자신을 이렇게 막 질책하면서 요구하면서 그렇죠 그 내가 하나님의 그 뜻을 향해서 가도록 이렇게 돕는 방식 이 두 가지가 헷갈리면 안 되고 이렇게 잘 구분이 돼야 된다는 거를 이제 지난번에 조금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여튼 그것을 구분하면서 우리가 이제 가는 건데요.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그 여정 속에서 부분을 다 가르쳐 주느냐 하면은 결국 이제 신앙적 성숙을 향해서 나아가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데 그 여정 속에서 이 특히 죄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를 딱 지적을 해 주고 그 부분을 이 사도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감당해 가야 되는지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로마서 전체 속에서 이 말씀을 사실 이해해야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큰 흐름은 좀 단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고 우리 존재 전체가 이제 바뀌었고 우리가 예수님 은혜에 의지해서 이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 경지를 향해서 계속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인데 그 과정에서 우리의 그 부패성과 관련해서 죄가 계속 우리를 지배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얘기를 지금 해 주려고 하는 겁니다.
사도는 어떤 부분을 강조를 더 하려고 하느냐면 우리 안에 부패성이 남아 있고 과거 예수님 믿기 전에는 이 죄가 특히 마귀가 마귀가 우리를 지배하면서 실질적으로 뭘로 우리를 완벽하게 통제했냐면은 죄로 우리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지배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마귀가 우리를 딱 지배할 때 사실은 얼마나 지배하기 쉬우냐 하면 우리가 끊임없이 죄에 떨어지는 그 문제가 있고 그 죄에 떨어질 때 우리를 끊임없이 옆에서 정제하면서 우리를 결국 이 죄의 지배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거든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마귀의 이 실제 통치죠. 이 마귀의 지배 속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게 우리를 다 붙들고 이제 있었는데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 어떤 지배 속에 있느냐 하면 마귀와 이 죄의 절대적 지배 속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절대적 지배는 절대로 못 벗어난다는 거죠.
그래서 역사 속에서 선을 많이 행했던 사람들, 고행을 해서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들 그런 노력으로도 이 죄와 마귀의 지배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죠.
그래서 절대적으로 지배하지 절대적 지배 속에 있던 우리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부분을 우리에게 이렇게 해결해 주셨냐 하면은 이 마귀와 죄의 권세를 기본적으로 탁 깨뜨린 겁니다.
예 마귀의 권세를 박살 냈어요. 그리고 제2의 권세를 깨뜨렸어요 그러니까 죄가 더 이상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정제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 사실은 뭐냐 하면 마귀도 그 죄를 범죄한 우리를 이렇게 정제할 수 있는 자격이 사실 없는 거죠.
유일하게 정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세요.
그러니까 여기 속인 거죠. 마귀가 마치 자기가 재판장 노릇을 한 거예요.
사실은 뭐냐 하면 마귀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이 범죄한 인간을 유일하게 재판하시고 그 죄의 무게에 따라서 판결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시고 하나님 때문에 사실 우리 인류가 이렇게 된 거거든요.
인류의 일이 참상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된 건데 마귀는 자기가 마치 그렇게 한 것처럼 그렇게 이제 어쨌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제 범죄한 우리에게 정제하시고 심판을 내리셨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그 죄의 삭을 다 지불해 버리신 거죠.
그래서 여기 이제 23절에 그렇죠. 죄의 삭은 사망이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삭을 다 이렇게 지불해 주셔서 더 이상 이제 죄와 그다음에 죄에 대한 이 책임 이 심판이거든요.
죄로 말미암는 정제와 심판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거 그것을 완전히 깨뜨리죠.
그래서 그 은혜의 역사죠. 은혜의 역사를 하나님은 누구에게 딱 적용하시냐면 모든 인류에게 적용하시는 것이 아니고요.
예수 믿는 때 믿는 사람들 믿을 때 그 은혜의 말하자면은 사건들을 실질적으로 우리 각 사람에게 딱 적용을 하세요.
그래서 적용하시는데 이 적용하는 원리를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로마서는 더 좀 더 풍성하게 설명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예수 믿게 될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고 그리스도께서 살아날 때 그 생명과 함께 살아난 사람들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너희들의 존재가 그렇게 바뀌게 된 것이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너희도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져서 그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고 얘기를 해주죠.
그 부분을 조금 더 풍성하게 설명해 줍니다.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조금 더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칭의와 심지어는 우리의 마지막 구원까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성도의 견인과 같은 그런 교리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주어지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됐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알죠.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그런 어떤 존재 우리 존재 된 거예요.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그랬는데 그 일이 실질적으로 일어난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는 굉장히 놀라운 존재 방식이죠.
그것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나게 된 거거든요. 이것이 삼위 하나님의 존재 방식하고 좀 비슷해요.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이렇게 서로 내주하시면서 이 계시거든요.
상호 내주하시면서 성부 안에 성자 성자 안에 성령 성령 안에 성자 성부 그렇죠 상호 내주하시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삼위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그 놀라운 그 신비가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데 성령님만 계시는 게 아니죠.
삼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아주 독특한 신비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이렇게 엮여 있는 거예요.
연합돼 있는 다 그렇게 표현하는데 그렇게 있어서 이제 그 모든 성화의 일들이 발생하는데 그렇게 이렇게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냐 하면 이 죄의 상대적 지배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패성이 있어서 죄를 이렇게 범하게 되면 이 죄의 지배 마치 다시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그런 모습들이 우리 속에 나타난다는 거죠.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 해결해야 되느냐 하고 이제 사도바울이 말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려고 하는 건 뭐냐 하면 계속해서 고 상태에서 너희가 어떻게 벗어나야 되는지 그런 어떤 측면을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뭘 선언하냐면요.
너희는 이미 죽었다 이제 그래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너희를 산 자처럼 여기라는 겁니다.
죽은 자처럼 여기지 말고 아니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것처럼 다시 산 자로 여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새롭게 가지게 된 그 정체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그걸 붙들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가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뭐냐 하면 이제 18절 보면 나오잖아요.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러니까 딱 과거형으로 이미 의의 종이 되었다 그러죠.
그리고 22절도 한번 보세요.
22절 보면은 어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니라 그러니까 너희는 이미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 그래요.
과거형이예요 이것도 그러니까 앞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요.
이미 맺었다는 거예요. 이게 이제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즉각적으로 허락하신 이 거룩함 때문에 그래요.
이미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다 하는 것을 여기서 사실 말해주는 겁니다.
이미 열매를 맺었고 우리의 그 열매로 인해서 나타나는 최종적 결과가 뭐냐 하면 영생인데 앞으로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사실은 그 영생을 너희가 이미 소유하고 있다 하는 거를 말해주고 싶은 거거든요. 그거예요.
그래서 너희는 이미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15절 보면요.
너희는 이미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죄를 지면 되겠느냐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존재 자체가 이렇게 바뀐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제 죄의 종으로 사는 것 그렇죠 죄 아래 사는 것 이것은 우리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하는 것을 먼저 계속 가서 강조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은 이제 죄와 이렇게 막 뒤섞여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엉켜서 근데 우리가 이 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나하고 체질적으로 잘 맞는다고 생각이 이제 든단 말이에요.
이게 나하고 잘 맞는 것 같아요. 오히려 하나님 잘 믿고 정말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내 모습은 낯설고 이것은 조금 특별한 모습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단 말이죠.
이것은 좀 특별하고 우리가 재와 막 이렇게 뒤엉켜서 막 살아가는 것은 이게 나의 어떤 체질과 본성과 너무 잘 맞는 것 같아 이게 내 것 같고 저거는 내 게 아닌 것 같단 말이야 그 착각에 빠뜨린다는 거죠.
우리가 쉽게 그 착각에 빠져서 어떤 부분에서 우리 죄가 경각심을 못 가지냐 하면 내가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만큼 이 죄는 또 교묘합니다. 아주 교묘해서 그게 그 속에서 존재하는 너가 참된 너에 가깝다고 자꾸 이렇게 말해요.
정말 교묘하죠. 그런데 이 성경은 뭐냐 하면 그것이 너의 원래 보습이 아니다.
이제는 그것으로 너의 정체성을 삼으면 안 된다고 얘기하면서 빨리 너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은 사람다운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그 자리로 너 자신을 다시 데리고 가려고 애를 써라 하는 겁니다.
그것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이렇게 잘 기반해서 이제 성숙을 향해서 이렇게 나아가는데 가장 먼저 우리에게 요구되는 건 뭐냐 하면 우리가 이미 거룩한 사람이고 그 거룩한 사람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당연히 이렇게 나타나야 되는 삶의 모습이어야 된다 하는 거 이 부분을 먼저 명확하게 하고 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그 부분을 딱 갖고 있다가요.
우리가 이제 죄를 먹고 마시면서 때로는 굉장히 그 즐거운 눈을 느끼면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을 볼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 그 나 자신을 딱 보면서 너가 그게 비정상적인 모습이다 이렇게 얘기해 줘야 돼요.
그게 너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고 그게 비정상적인 거야 이렇게 얘기해 주고 그러면 정상이 뭐지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고 정상은 뭐냐 하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형상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그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야 된다 하는 거예요.
그렇죠 그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이 하나 더 이렇게 잘 형성돼야 되냐 하면 그러면 예수님 닮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갖고 거기에 대한 그림은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 모델이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모델 그거를 봐야지 내가 저기로 가야 되는지 생각하고 그래서 거기에 대한 지식도 우리가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뭔가 이렇게 가야 되는데 어디로 가야 되는지를 모르고 막 가는 우리의 모습이 있는 거죠.
그것도 성경이 사실은 잘 가르쳐 주고 있는데 우리가 좀 더 주목해서 보지 못해서 이제 그런 거죠.
그래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되는가 하고 이렇게 가르쳐준 대표적인 성경의 세 부분이 나타납니다.
제가 이제 좋아하고 저도 자주 자주 생각하는 말씀인데 우리도 사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요. 팔복에 관한 말씀이죠.
이 팔복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하나님 믿는 사람의 그 모습이 어때야 되는지가 잘 이렇게 드러나요 그래서 보면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서는 뭐냐 하면 우리 마음에 늘 겸손함이 있어야 된다.
가난함이 있어야 되고 때로는 내 죄가 범죄했을 때 아 이 모습이 너무 내 하나님 자녀답지 못하기 때문에 슬퍼하는 거죠.
눈물을 흘리는 그런 모습이 나타나면서 하나님 앞에 온유하고 그렇죠.
또 이렇게 화평하고 또 의의에 목마른 그런 모습이 우리 속에 나타나고 그런 어떤 사람의 상을 우리가 그리면서 나도 저 사람처럼 돼야 되겠다 하는 게 있어야 되는 거죠.
그다음에 또 우리에게 어떤 잘 제시해 주는 말씀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요.
우리 갈라디아서 5장에 나타난 우리 성령의 열매 있지 않습니까?
우리 잘 알지 않습니까? 이제 성령의 열매 이런 이런 열매를 맺어야 되겠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안 되고요.
이 성령의 열매가 다 나타나는 그 사람의 모습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제 그 성령의 열매가 다 나타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 그것을 이렇게 다양한 어떤 측면에서 표현해 준 거죠.
그 8가지 성령의 여덟 가지 열매라고 하는 것은 8가지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열매에 다양한 매력들인 거거든요.
그 열매가 여기서 보면 절제로는 보이고 여기서 보이면 사랑으로 보이고 여기서 보이면 온유로 보이고 또 이쪽에서 보면 신실함으로 보이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 요소를 다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바라보면서 아 내가 저쪽으로 가야 되겠다 이렇게 그리고 또 어디에 나타나냐면요.
베드로후서에 나타납니다. 후서 1장에 보면은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덕을 순서를 잘 모르겠는데 믿음의 덕을 덕의 지식 지식 지식의 절제 일종 이종식 있지 않습니까?
여덟가지 그것도 뭐냐 하면 여 위에 이걸 더하고 지식 위에 뭘 더하고 더하고 더하고 그런 말씀 아닙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그것은 이렇게 뒤에서부터 말씀해도 돼요.
그러니까 뒤에서부터 그러니까 이게 사랑을 더하라 형제 우의 경건 인내 절제 지식 덕 믿음 이게 뒤에서부터 이 순서가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덕 위에 믿음을 더하라 이렇게 해도 맞는 말입니다.
믿음 위에 덕을 덕 위에 지식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을 거꾸로 해서 절제 위의 지식을 지식 위에 덕을 덕 위에 믿음을 그러니까 이런 덕을 가진 사람이 주님께서 요구하는 참된 신자의 이 자태다 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생각을 하면서 아 이런 모습을 가진 사람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또 나 자신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그거 하나로 딱 표현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그 모습을 이렇게 우리가 그리면서 내가 저 방향을 향해서 가야 된다고 하는 것을 이제 생각하면서 이제 우리가 그 신앙적 여정 속에서 이 죄의 지배가 계속해서 이렇게 나타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 위험의 요소가 우리 속에 늘 앞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죄도 우리를 절대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하지만 상대적 지배 속에 있지만 자기가 내가 너를 절대적으로 지배한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이놈이 사실은 절대적으로 지배를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탁 선언이 되면 거기서 힘이 탁 빠지거든요.
얘가 가지고 있는 모든 마치 권리 자기가 권리인 것처럼 막 얘기하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게 딱 들통이 나고요.
더 이상의 우리에게 그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승리 안에 딱 무릎 말하자면 밟혀 있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도 우리가 이 죄를 범하게 되면 죄는 내가 너를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어서 너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계속 이렇게 심어줍니다.
그래서 아 이것도 대단히 교묘하고 또 한편으로는 강력한 세력이구나 하는 것도 생각하고 이것을 만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죄 때문에 막 두려워하고 그 그것 때문에 또 절망하고 이런 것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은 명확하게 알아야 되고 우리가 죄를 범해서 정말 하나님이 보실 때 내가 봐도 아 이것은 아니다 싶은 그런 절망적인 순간에 있을 때 떨어질 때가 있거든요.
그때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문제에서 나를 벗어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다시 은혜를 붙잡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 은혜를 향해서 그냥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지 나 그 자신을 그 자리에 있는 자신을 막 혼내고 질책하고 그래서 제가 학대에 가깝다고 표현하는데 학대에 가까운 그런 것을 해서 나를 그 자리에서 막 일으키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은 우리 자신을 다 죽여버린다고 그랬죠. 네 그것이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이제 더 중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내가 함께 살아가는 내 형제 자매들에게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를 생각해야 됩니다.
나 자신도 그것을 적용해야 되는데 우리 형제 자매도 저 연약하지 않습니까?
다 연약하거든요. 저 연약한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고 다시 그 성화를 향해서 가게 하는 것도 은혜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줘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가능하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은혜를 그 형제에게 증거하고 그 은혜를 덧입게 해서 그 형제도 은혜로 살리는 그 방향으로 우리가 같이 이렇게 살아가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잘 이해하면 우리 자신과 이 교회가 어떤 형태로 이렇게 나타나는지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랑이 충만한 모습이 나타나 섬김이 충만한 그런 모습이 나타나요.
그것의 원리를 잘 생각하면 그런데 우리가 그런 원리를 잘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제 일반적으로 이렇게 살아가던 하나님 믿기 이전에 살던 삶의 방식이나 어떤 그 성향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로 마치 이게 결국은 일관성 없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그것이 전체적으로 은혜를 약화시켜 그럼 같이 이렇게 이제 망하는데 물고 먹고 뜯으면 망한 대로 제 망하는 모습이 나타나 물론 이제 그런 교회들도 다시 이렇게 살려내는 힘은 그리스도께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엉터리 같은 교회가 된다고 하더라도 어느 때에 그럴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도 다시 우리를 살리는 것은 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풍성해져서 계속해서 그 방향을 향해 다시 가는 모습이 나타나면 결국 그 충만한 교회 속에 하나님은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라고 서로 사랑이 충만하기를 바라서 하나님이 그 은혜가 가득한 교회에 주고 싶은 남은 은혜들이 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보내주신 것이 아니고 그것을 주셨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들을 더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총도 남아 있는 거거든요.
그것을 우리가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세요.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의 기쁨과 감사가 이렇게 충만한 모습을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시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이렇게 딱 나타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또 받으신다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영광을 선포하고 그 영광을 받고 싶은 분이세요.
그 하나님의 이 비전이신데 그것도 우리 마음속에 늘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그 여정 속에서 이런 죄와 관련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될 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되는지를 잘 배워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 말씀을 이 부분만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반복해서 이렇게 많이 보시면 또 갈라디아서 말씀까지 보시게 되면 이 말씀을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로마서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 되었는지를 생각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어떤 성숙함에 이르기를 원하시는지 한번 돌아보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고 또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이 가득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런 신앙의 여정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끊임없이 이제 넘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도 보게 되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그런 죄를 대하는 우리 태도들도 보게 됩니다.
주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해서 이런 잘못된 의식들 잘 교정해 가게 해 주시고 진리의 말씀이 우리 속에 명료해져서 그 말씀을 근거하여 우리를 끊임없이 가르치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해서 회복이 되어지고 은혜가 충만한 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이 잘 선포되게 해 주시고, 또 그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우리가 우리를 그 영광에 참여하시고 참여케 하시고 그 충만한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온총 아래에 거하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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