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315말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요한일서 4장 10-11절 ...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4장 10절 11절 말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아멘
이 요한일서 말씀은 쉬운 말씀인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좀 어렵습니다.
말씀을 보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구나 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이 본문을 통해서 금방 확인하게 됩니다.
근데 이제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교회에 들려주는 그 이유를 우리가 조금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이렇게 말씀하고자 하는 그 이유를 조금은 더 우리가 깊이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요한일서를 당시에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이제 회람 서신으로 보내는 거거든요.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 우리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계시록만 해도 일곱 교회가 이렇게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몇 개의 교회가 더 있었는데 사도 요한과 같은 경우에는 이제 에베소 교회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사역을 또 하셨던 분이세요.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소아시아 전역의 교회들의 어떤 영적 상태를 잘 아는 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편지를 이제 쓸 때는 사도 요한의 이제 연세가 한 90에 가까운 요한의 인생 노년의 보내는 편지 입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의 어떤 상태의 교회 속에 어떤 문제들이 있냐 하면요.
크게 보면은 한 두 가지 정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그 당시에 교회 속으로 거세게 파고들어오고 있었던 영지주의 사상 영지주의 그리고 또 하나는 이제 이 교회 공동체 속에 서로 이렇게 사랑하지 못한 하나 되지 못한 이 문제가 이제 크게 보면 이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 지금 이 편지를 보낼 때는 특히 이제 교회들이 에베소 교회가 특히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는데요.
이단과의 싸움에서 상당히 승리를 거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속에 파고들어온 이단의 세력들과 치열하게 싸워서 스스로 거짓 선지자인데 선지자 노릇하는데 실질적으로는 거짓 선지자인 그 세력들과 싸워서 물리치고 어느 정도 교회를 이제 정결케 한 그런 상태였고 그것으로 인해서 사도 요한의 마음에 이제 큰 기쁨이 있으면서 이 편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편지를 전하면서 사도 요한이 다시 한 번 우리가 붙들어야 되는 신앙이 어떤 건가 하는 것을 그렇죠.
다시 한 번 전해주는 거죠. 그러니까 그 당시 영지주의는 대단히 교묘한 사상을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영지주의가 예수님 자체를 완전히 완전히 부정하는 그런 사상이 아니고요.
그 영지주의 에 영향을 받은 말하자면 이제 우리가 볼 때는 그리스도인인 거죠.
그러니까 완전히 영기주의의 어떤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부분들을 같이 공유하면서 신앙의 부분들을 그 영지주의가 이렇게 혼합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러면서 어떤 진리에 대해서 자기들의 주장을 강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처음에 이렇게 들으면은 저게 맞나 틀리나 이걸 분간하기 굉장히 어려운 거거든요.
그래서 영지주의의 큰 문제는 뭐냐 하면은 플라톤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영지주의가 그래서 뭐냐 하면은 이 실체는 따로 있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는 이 모든 물질의 세계죠.
이것은 실존 실체가 아니고 그림자와 같은 거다 이렇게 되죠.
그러니까 본질은 따로 있는 거죠. 플라톤의 어떤 사상의 사상 속에는 그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인데요.
그래서 예수님 같은 경우에 몸을 잃고 오신 분이지 않습니까?
근데 영지주의자들은 그 자체를 부정해요. 그러니까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서 물질로 구성된 것들은 다 악하다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분들도 좋아해요.
그래서 예수님 잘 믿고 싶은데 예수님이 몸을 입는 것을 도저히 자기들의 어떤 사상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것을 고민하다가 예수님의 이 몸은 실체가 아니다라는 거죠.
우리가 눈에 보이기는 보이는데 분명히 몸인데 이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 가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죠.
그러면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그런 주장을 펼치는 거죠.
그리고 그런 주장도 펼치고 또 여기 이제 요한일서에 보면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경계하지 않습니까?
경계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거든요.
우리는 보통 예수 그리스도 하기 때문에 이게 항상 붙어 있잖아요.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몸을 입고 오신 분인데 그 몸을 입고 온 예수는 동정리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고 요셉과 마리아에 의해서 정상적으로 탄생 태어났는데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오셨다는 거죠.
성령이 비둘기같이 이렇게 온 그런 사건들을 어떻게 이제 이해하냐 그리스도께서 그죠 그분은 이제 실질적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이제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인 거죠.
그분이 오셨는데 이 몸은 이제 말하자면은 온전히 선하지 않은 거예요.
그리스도는 선하심이 그래서 그 몸을 잠깐 잊고 있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리스도는 올라가시 육체는 죽고 흙으로 이제 돌아가는 거죠.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는 실제로는 이렇게 고난받지 않았다고까지 조작을 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여기 이 사람들 의식 속에는 어떤 부분이 이제 결여되기 쉬우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잃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셨지 않습니까?
그 육체로 오셔서 고난 받으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게 드러나는 거거든요.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고 그리스도는 그 순간에 이렇게 올라가신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실질적으로 고난받지 않은 고통을 느끼지 않은 상태로 올라가신 분이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냐면 육체로 입고 고난 받으시고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신 그죠.
그 사랑을 그들은 제대로 깨달을 수가 없는 그러니까 이 영기주의 사상이 그들 교회 속에 막 파고들면 이게 사변적인 어떤 부분이 증가하게 돼요.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다 보면은 제일 중요한 게 예수 그리스도와 실제로 사귀는 거거든요.
그래도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과 함께 사는 거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우리도 자칫하면 어떻게 빠지냐면요.
그런 데 영향을 받아서 이 신앙을 이렇게 조금 생각하는 거 사색하는 거 그것으로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면 내가 그것을 충분하게 이해했고 충분히 이해한 것은 내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 내가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이제 현상도요.
그런 영지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이런 말은 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그런 성향도 이렇게 비슷한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거죠.
그런 식으로 우리의 신앙이 나타날 수가 있거든요.
그게 이제 영지주의의 신앙이 교회 속에 파고들면 그런 모습이 교회 속에 이렇게 나타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정말 원하는 것이 요한일서 앞부분에 나타나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과 이렇게 사임이 있는 거예요.
요한일서 1장 3절에 보면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임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그러니까 요한이 이렇게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거는 뭐냐 하면요.
성도들이 진리를 바르게 알고 특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베풀어주신 그 사랑에 기반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살림 속에 살아가는 그 모습이 하나님과 사랑의 삶이 이미 풍성한 상태에서
우리 교회에
성도들이 살아가는 그런 그 문제를 거기에 대한 어떤 소망을 가지면서 그 사임을 방해하는 어떤 요소들을 요한이 생각하면서 그 요소들을 제거하려고 하는 거 그래서 그 교회 속에 독버섯처럼 이렇게 자라고 있는 그 인지주의적인 생각을 다시 그들 속에서 거짓 가르침을 가르치는 사람을 딱 이렇게 쫓아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좀 더 쉬울 수가 있는데요.
문제는 뭐냐 하면 그 가르침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계속 영향을 받았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교회 속에 다시 한 번 영지주의를 그들의 주장을 한 번 더 상기시키면서 참된 복음은 뭔가를 반복적으로 이렇게 설명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가 육체로 온 것을 부정하는 것은 영규제의 주장이거든요.
예수님이 육체로 오는 것은 그리 적용한다는 거죠.
우리가 지금 볼 때는 그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싶거든요.
그런데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요. 그걸 잊어버려요.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육체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셨다고 그래서 가끔씩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뭔가 우리와 다르지 않을까 특별하지 않을까 해서 그걸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고난받으신 것을 우리가 이렇게 약간 그 그것을 이렇게 뒤로 이렇게 젖혀 내게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우리와 다르게 넉넉하게 감당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죠.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으로서 그 모든 고난을 다 받으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십자가의 몫이 박힐 때 그렇죠.
너무 이게 고통스러운 우리가 만약에 그 어떤 경험을 했다면 당했을 그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당하신 분이라는 거죠.
그것을 우리가 잘 생각을 해야 돼 그래서 가끔 어떤 분들이 있냐면요.
십자가에 대해서 얘기할 때 우리 대부분의 이제 교회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얘기를 그래도 잘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근데 이제 일반적으로 교회들은 십자가의 고난의 대해서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십자가 죽음의 의미 구속에 관한 이 교훈들이죠.
구속 진앙 이 부분을 잘 안 가르쳐요. 그게 이제 문제고요.
또 어떤 문제가 있냐면은 구속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교수님이 당한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 그 부분을 많이 다루지 않는 이 문제도 또 발생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둘 다 이렇게 균형을 잃은 겁니다. 그래서 어떤 특히 이제 우리 개혁파 진영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기 쉬우냐 하면은 구속에 관한 이야기 신학적인 부분은 자세하게 논하는데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그 고통에 대해서 얘기하면 왜 그런 걸 얘기하냐 이렇게 따지는 분들도 있어요.
심지어는 우리는 그게 좀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그쪽에서 이렇게 훈련을 많이 받으신 분이 영향을 많이 받게 되면요.
나중에는 예수님이 고통받으셨다는 얘기를 강조해서 얘기하면 왜 그런 얘기를 십자가 얘기하면서 얘기하냐 그러고 막 따지는 실제로 있었어요.
제가 아는 막 따지는 분 저한테 와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하도록 하고 얘기를 하세요.
그런데 속으로 네 맞습니다. 말씀은 그렇게 드렸는데 실제로는 우리 그 생각이 균형을 잃은 생각이죠.
이 두 가지를 이제 잘 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면 우리도 직접적으로는 영향을 받은 건 아니지만은 그런 유사한 형태의 문제가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삶 속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지 않습니까?
아픔을 당하고 그 아픔과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우리가 막 이렇게 뛰어넘는 극복하는 것도 기도하면서 어떤 투쟁을 통해서 잘 감당해 가야 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사실 더 이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몸을 연약한 몸을 잊고 똑같이 당하셨을 그 고난에 대해서 내가 받은 그 고통과 고난을 우리가 근거해서 그 그리스도의 고난을 조금씩 조금씩 더 깊이 이해해 가는 거거든요.
죽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나중에 다 이제 죽게 되는데요.
죽을 때 그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면서 돌아가시지 않습니까?
그 그리스도의 그 죽음을 우리도 이제 마지막에 나의 죽음을 통해서 그것을 이렇게 더 깊이 이해하면서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삶의 모든 삶의 여정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가르쳐 주시고 교훈해 주신 것도 배우러 가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당하신 그 고난의 의미도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는 거거든요.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그것을 점점점 이해해 가면서 뭘 어떤 부분이 우리에게 많아지냐면은 결국은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나의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나의 사랑도 계속해서 성장해 간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게 사도 요한이 그런 이단의 적 어떤 사상을 이렇게 배격하면서 실질적으로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이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그 잘못된 요소를 하나 제거하고요.
또 하나가 뭐냐 하면 그 교회 속에 하나님의 이 사랑을 풍성하게 깨닫게 하는데, 그렇죠 누리게 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게 뭐냐 하면 교회 안에 사랑하지 못하는 문제 이 문제 그리고 하나 더 이제 있다면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제 충분히 순종하지 않는 문제 이게 죄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죄와 관련된 문제 그래서 사도 요한이 죄와 관련해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냐면은 이런 말씀까지 합니다.
3장 9절에 보면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이런 말씀도 하고 그리고 우리가 읽었던 이 본문의 뒷부분이죠.
사랑하는 자들아 사장 시 절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음,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일서를 공부하다 보면요.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들게 해요.
성경책 중에 제일 이 부분을 우리한테 아주 이렇게 엄격하게 마치 잣대를 들여다 들여 미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요한에서가 줍니다.
잘못 읽으면 그러니까 죄를 짓는 자마다 그가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니라고 하는 거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짓지 않습니까?
요한일서 앞부분에 그게 또 나와요. 뭐냐 하면요.
1장 10절을 한번 보세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그러죠.
그리고 2장 1절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도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하나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은 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게 보면은 사도 요한이 너희들도 다 죄를 범하며 한다 그래요.
그런데 이 뒷부분에 이렇게 있다 보면요. 죄를 6절도 한번 보세요.
3장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이거 말씀을 그대로 읽으면 그렇죠 그 안에 거하는 자 우리 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지 않습니까?
범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보면 다 범죄하거든요.
그럼 이게 어떻게 이것을 이해해야 되는가 잘못 읽으면 우리가 그나마 갖고 있는 부활에 대한 확신도 확 사라집니다.
요한일서가 그래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고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그렇죠 20절에 보면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이용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그렇지 않습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면서 실질적으로 형제를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지 않습니까?
늘 봐요.
그런데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러니까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우리가 변명을 할 수가 없게 만들어요.
그런 교회는 결론이 뭐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게 아니고요.
사도가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말씀을 보면 굉장히 한편으로는 충격적인 말씀이거든요.
근데 이제 이것은 잘못 읽으면은 그렇게 읽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보면 우리가 범죄할 수 있다는 것을 사도는 이야기해 주면서 범죄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해 주면서 죄를 범하지 마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는 이제 거룩한 사람들이고요.
그리고 살아가면서 이렇게 죄를 범하게 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고자 하는 그 열망을 같이 이렇게 품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죄를 범하는 순간에도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죄를 범해요.
그리고 죄를 범하면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때로는 충격받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더해졌을 때 어느 날 그 죄에 대해서 깊이 애통해 하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 열망을 우리는 갖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사도가 이런 부분을 설명을 안 한 겁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이제 사도 바울이 설명을 많이 했죠.
그래서 바울의 그 설명과 이것을 잘 연결해서 오해하지 않도록 이렇게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제 믿는 사람들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또 그러니까 회계 없이 죄를 범하는 특히 죄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내 우리가 반성하고 주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 회개가 없는 사람들과 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거 그것을 전체적으로 잘 이제 이해를 하나님의 사랑도 그 속에서 그 틀 속에서 이해할 수가 있는 그렇게 해서 이 하나님 과의 사귐을 방해하는 요소를 사도가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점검하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 잘못된 어떤 부분들을 지적하고 궁극적으로는 뭐냐 하면 사도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요한일서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그리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 그게 17절에 한번 보세요.
4장 17절 16절 17절 연결해서 보면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로 심판의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 말씀이 아니고 이 말씀이 아니고 제가 지금 7절 아니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히 거한다 하는 말씀이 어디에 나옵니까?
제가 잘 아는 말씀인데 안 풀리면 아무 편도 안 풀리 십 몇 절 삽이절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너희가 서로 사랑해라 하고 이렇게 계명을 강조해 주는 것은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히 거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하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부분을 좀 놓칩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그냥 좋은 거죠. 그것이 한편으로는 나한테 유익도 있고 어떤 사랑을 받는 내 대상에게도 유익이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는 이런 어떤 의식을 가지는데 우리가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공동체 그 사귐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대로 하면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냐면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전체 교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임하는 일은 점점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하는 거죠.
그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그 교회 속에 점점점 약해진다는 거죠.
그 부분을 우리가 잘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그것을 의식하면서 너희 간에 서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라 하면서 3장에 보면요.
너희가 형제에게 형제가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형제를 도와줄 마음이 없다면 너에게 그 사랑이 없는 거다 라고 목회적인 코멘트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일서는 결국 이런 부분을 쭉 얘기하면서요.
그래서 하나님과 충만한 사귐 속에 너희가 살아라고 하면서 최종적으로 이 성도들에게 사도 요한이 원하는 것이 5장 13절입니다.
5장 13절을 또 한번 보시죠. 내가 하나님의 아들 아들 내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합이다.
그러니까 이 요한일서도 어떤 책이냐 하면요. 로마서 8장처럼 구원의 확신을 심게 하기 위해서 쓴 책입니다.
이정도 그래서 하나님과 사랑 사랑 사귐 있게 하고요.
서로 사랑하게 하고 그래서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케 해서 그리고 거짓 진리를 내 곁에서 하나님이 너희에게 이미 주신 그 구원 너희에게 영생이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을 확신하라 확신해도 다 확신하면서 살아라 하고 주시는 말씀이 요한일서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로마서 8장은 대단히 신학적인 진술이라고 하면 여기에서는 대단히 목회적인 진술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거죠.
목회하면서 실제로 교회 속에 나타나는 문제를 가지고서 그렇게 하면은 너희 속에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충만한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 결국은 뭐냐 하면 너희가 붙들고 있어야 되는 그 영생 구원에 대한 확신에서 너희가 무너진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8장과 이 요한일서 이 말씀을 두 개를 같이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요.
이 구원의 문제를 훨씬 더 이론적이고 또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거 그런 어떤 어떤 관점 속에서 그런 어떤 문제의식 속에서 사도 요한이 지금 오늘 읽은 이 말씀도 주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구원의 확신 우리에게 주신 그 영생의 그 뿌리 가장 근원적인 토대 그 부분을 우리가 이제 이 전체적인 문제의식 속에서 한 번 더 강조해 주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구원의 확신을 이제 가진 사람들입니다.
또 가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고 그렇습니다. 근데 우리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고 또 우리 속에 충만한 사랑이 임하기를 원하고 그러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우리의 그 모든 은혜와 하나님 사랑의 그 뿌리 그 토대가 뭐냐 오늘 이 같은 이 말씀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 하는 것이고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표현되어졌느냐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주체가 여기 성부로 돼 있죠. 성부께서 자기 아들을 보낼 때 화목 제물 되라고 보냈다는 거죠.
그런 생각을 우리가 잘 안 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를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 우리 죄를 대신해서 지기 위해서 고난을 받기 위해서 감당하신 그 고통과 고난을 우리가 많이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1차적으로는 뭘 먼저 우리에게 딱 강조해 주냐면요.
내가 아들을 보내는데 그 아들을 화목 제물로 죽으라고 보내는 겁니다.
그 아버지가 그것을 딱 아시고 작정하시고 아들을 이렇게 보내시는데 아들은 어떻게 합니까?
거기에 순종하신 거 말 나온 거지 아무 그래서 그 이미지가 구약 성경에 아브라함의 그 사건에서 조금 나타난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을 화복제물로 삼기 위해서 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가는 장면이잖아요.
그 모습은 비슷해요.
그리고 이삭은 따라가 따라오게 하는 아버지의 명령 모든 명령에 이렇게 순종해서 가는데 마지막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딱 이삭을 칼로 쳐서 잡으려고 하잖아요.
그럴 때 이삭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거든요. 아버지 왜 그러세요?
살려주세요. 이런 표현이 안 나와요. 참하거든요.
그러니까 이삭이 가만히 있었던 거죠. 그 모습에서 조금 나타나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나중에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건 그리고 십자가에 지신 사건 그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그냥 보신다 그러면 굉장히 공감을 하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아들을 이렇게 화복점으로 내어준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마 아브라함이 그렇죠.
이거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그것을 하나님이 이제 감당하시는 거죠.
그래서 생각하시면서 아들을 보내고 아들은 거기에 순종하셨고 그죠.
그리고 그래서 이 요한일서를 또 자세히 읽어보면요.
한 사도 요한이 우리 하나님은 삼미의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을 참 이렇게 잘 표현해 주 말씀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고 그리고 여기 보면요.
아들이 너희 안에 거하다 그러고 그리고 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다 그러죠.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아느냐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3장 26절에서 그의 계명 24절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계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 사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라고 얘기하는데 우리가 먼저 생각하게 될 건 뭐냐 하면 아들을 이렇게 보내시겠죠.
그 모든 구속의 그 과정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함께 사역하셨고 결국은 함께 보여주신 사랑이라는 거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면은 성부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이 따로 있고 성자께서 하신 일이 따로 있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이 따로 있고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를 길이 참고 우리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그게 우리는 이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근데 항상 보면 성자가 하실 때 성부와 성령이 같이 하신 거고 성부가 하실 때 성자와 성령이 같이 하시는 거고요.
성령이 하시는 일 지금 성령이 우리 속에 다 일을 이루어 가시는데 성령 혼자서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항상 성부와 성자께서 같이 사용하시는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우리에게 각각 이렇게 보면 사역적으로는 다르게 나타나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뭐라 하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아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각각 하신 것 같은데 그 각각 하실 때 삼위 하나님은 항상 함께 또 하셔서 결국은 뭐냐 하면 우리가 믿는 한 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사랑의 이걸 깊이 이제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 나중에 어떤 것이 요구되느냐 하면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이해가 요구돼요.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각 하신 것만 가지고도 우리에게 역사 속에서 그렇죠.
우리가 교훈을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내 보이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면 우리가 여기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해 주셨어요.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이렇게 더 많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결국은 어떤 분이시냐 좀 신실하시고 그렇죠 영원하신 분이신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니까 측량할 수 없는 분이세요.
무한하신 거죠. 그 하나님의 속성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이렇게 사랑을 보여주셨는데요.
그 사랑은 어떤 정도까지 크기가 이렇게 확장되어 있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내 속성과 같이 그 사랑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지속성은 영원하다는 거죠.
그래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을 딱 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년 2천 년 지나서 그 약속 그대로 딱 성취된 우리는 약속을 이렇게 하면은 며칠 지나면 잊어버려요.
그죠? 그렇거든요. 그리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데 한 며칠 지나 며칠 까지는 아니고요.
한 몇 달씩 몇 년씩 이게 지나면 그 사랑도 이렇게 약해져요.
식어져요. 그리고 기억이 없어지면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이 또 달라지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안 딱 한 번 사랑한 그 사랑의 강도가 영원까지 지속된다는 거야.
그리고 우리를 딱 한 번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 기억하는 것을 영원히 기억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구약 성경에서 이렇게 어렴풋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이고 약속이 변함이 없는 분, 약속의 약속을 지키시고 그것을 변개치 않으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이렇게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의 어떤 정점으로서 그죠 약속의 실질적으로 성취로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탁 오셔서 십자가에 탁 돌아가신 그러니까 이때까지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모든 그 사랑이 정말 참된 사랑이구나 하는 것을 그 위에서 다시 한 번 딱 확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가 탁 해서 보여주신 사랑을 이해할 때 이전에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계시죠.
그것을 같이 생각하면서 그것을 전체를 이해하면 그나마 우리가 그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거죠.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조금 더 이렇게 생각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묵상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어떤 이제 범위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고 그러면 우리는 이제 기도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요한이요 뒷부분에 또 나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으신다 그래요. 5장에 가면 뒷부분에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세요.
하나님이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4장 14절이 이게 이제 우리가 필요한 거 구하라 그런 것도 포함되지만 전체적인 이렇게 흐름에서 보면은 결국 우리의 구원의 확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그 요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어려움과의 어떤 영적인 투쟁 속에서 너희가 하나님께 너희의 그 연약함을 구하려고 필요를 구하면 은혜를 주신다는 그렇게 해서 너의 영생 너희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확실하게 해 주시는 것이다 하고 이제 이렇게 말해주는 그래서 이 말씀을 보면은 로마서 8장 말씀에 마치 이렇게 그렇죠 이렇게 붕어빵처럼 비슷해요.
우리가 로마서 8장에서 기도에 대해서 그렇죠 이렇게 살폈던 그 부분이 5장 이 뒷부분에 이렇게 나타난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요한일서에서는 훨씬 더 실제 이 목회 현장 속에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갖다주는 그런 요소들로부터 어떻게 이 문제를 교회는 다뤄야 되는가 하는 것을 사대관이 이렇게 잘 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을 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전체적인 그림 속에서 이 말씀을 이렇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참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광대하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주님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 깨닫게 해 주십시오 하고 구할 수 있어야 되고요.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뭐냐 하면 거룩함입니다.
거룩함 그래서 죄와 싸워서 이기는 영적인 투쟁이 우리에게 이제 또 우리 속에 죄 가운데서 신경적인 부분이 사실은 형제 간의 어떤 미움 이런 것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들 그 죄죠 죄 에서도 우리 자신을 잘 보호하고 우리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사랑하는 공동체가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거룩한 공동체가 아니에요.
우리가 아무리 뭐 이렇게 거룩하게 사는 것 같아도 사랑하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 되게 될 때 그 공동체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충만히 나타내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역사들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이 부분이 대단히 이제 실질적으로 요한일서에서 제시되고 있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잘 살아서 정말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신 그 사랑의 깊이 깊이 그 넓이를 더 깊이 깨달아가는 그런 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요한일서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좀 잘 아는 사람들로 살아가고 싶은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 소화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작은 부분 분량밖에 되지 않는 것 고백하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때때로 충만하게 임하여서 정말 이곳에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지금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하고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순간들과 우리가 마주하기를 원하고 그것을 또 꿈꾸면서 열심히 신앙생활 해 가기를 원하는데,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할 때도 많은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우리가 더 간절히 기도할 것을 요구하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을 저희가 간절히 의지하여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우리 속에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 더욱더 밝히 드러나는 그런 은혜의 역사가 있게 이루시고, 또 우리 속에 서로 사랑하고 또 거룩함을 향하여 함께 투쟁 투쟁해 가는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히 이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우리를 통해서 베풀어주신 구속의 사랑이 우리 속에 찬연히 드러나는 그런 은혜의 역사가 잘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소모하며 주님 우리가 함께 믿음의 길을 다시 도와주시고 각 사람의 심령에 필요한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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