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새생활교회 당회장 박주동 목사

예배/말 씀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롬 8:26-27)... 박주동 목사

예배하는 사람 2026. 3. 13. 18:42

박주동 목사

 

 

260308말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기도(2)... 로마서 8장 26-27절...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26절 2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아멘 주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이 말씀이 기도 생활 잘 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씀으로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묵상하고 또 이렇게 사용하곤 합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 전체를 기술해 가면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데
이 말  말씀 앞에 보면 그렇죠 우리가 소망으로 24절입니다.
구원을 얻었음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얘기하면서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참으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소망하는 우리의 최종적 구원 그 구원이 어느 때는 또 구원이 우리 눈에 잘 보이는 때가 있고 또 어느 때는 그 구원이 잘 보이지 않기도 하고요.
어느 때는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 가운데 살기도 하고 어느 때는 또 보면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에서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나의 구원의 문제 때문에 근심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한 상황이 있고요.
만약에 근심하는 그런 모습이 우리 속에 이렇게 나타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모습입니다.
그런 분들은 정말 다시 자기의 구원을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될 그런 위험성이 대단히 높은 분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기본적으로 뭐냐 하면 구원의 확신 가운데 있으면서도 혹시 또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돌아보면서 때로는 근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우리가 이렇게 뚱하면서 사는 이 모습이 우리에게 이렇게 잘 나타나면요.
우리가 실질적으로는 그런 모습을 이렇게 보면서 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런 거 없이 자기 구원을 이렇게 확신하는데 그것을 마치 이렇게 내가 따놓은 당상 처럼 생각하면서 거기에 대한 근심이 없이 이렇게 하시는 분들은 어떤 분일 가능성이 높으냐 하면 율법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구원의 근거가 내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많은 거죠.
내가 이런 이런 모습을 하나님 앞에 잘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나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은 마땅하다는 그런 생각이 있을 수 있는 거거든요.

사실 이제 그런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제 그분들은 사실 대단히 이제 위험한 분들이죠.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기본적으로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근거로 우리 자신에게서 뭔가 이렇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 있어요? 구원의 그 모든 근거가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마음에 근심이 생기게 돼요.
내 구원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주권자고 결정권자인데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집니다.
내 마음에 내가 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구원의 구원 그렇죠.
알고 그 부분까지 막 포개 같이 막 흔들리기도 합니다.
근데 이제 그런 우리의 모습이 실질적으로는 대단히 정상적인 지극히 정상적인 그런 모습이다 하는 것도 알고는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보이지 않는 최종적 소망 그죠.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그 길을 가야 되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이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인내가 요구되는 거죠.
참아야 되는 일들이 이제 발생하는 그래서 이런 갈등 속에서 어떤 한편으로는 때로는 어려움을 겪고 또 당황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런 과정을 다 참고 가야 되는데 이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는 거죠.
그래서 성령도 우리의 그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겁니다.
제가 조금 전에 이제 연약함의 영역 요소들에 대해서 좀 얘기했지 않습니까?
그 연약함을 성령님께 계속해서 도와가세요.
그래서 세월이 가면 어떤 것을 우리가 점점점 밝게 깨닫게 되냐면 우리가 부패성을 갖고 있어서요.
이렇게 내 구원을 기본적으로는 내가 이렇게 팍 붙들려고 하는 그 힘이 딱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물에 딱 빠진 사람이 아직까지 힘이 덜 빠진 그런 분들이죠.

물에서 어떻게 익숙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잘 모르는 분들은 그 힘을 놓지를 않거든요.
우리 구원도 결국 우리의 생명과 관련된 문제지 않습니까?
죽고 사느냐의 문제 그 정도의 차원이 아니죠.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형벌 가운데 떨어지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우리가 이렇게 평평하게 붙들고 싶은 거죠.
근데 그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잘 붙들고 싶어요.
잘 붙들고 싶어서 내 팔에 힘이 딱 들어갑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좀 자랑스러운 내 모습을 의지해서 그 구원의 확신 내 손에 말하자면 힘을 팍 주면서 구원을 탁 붙드는 거거든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 우리가 신앙인이 성장해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성장해 간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 구원은 나의 의지와 관계가 없구나 하나님께 있구나 하는 것을 점점점 반복적으로 깨달으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 근거로 삼았던 것들을 크고 작은 것들도 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이제 내려놓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이제 말할 것 같은 힘 빠지는 사람처럼 이제 되는 거죠.
그러면서 동시에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내 아이의 구원을 이렇게 탁 이렇게 붙들고 있다고 하는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있다고 하는 것을 점점점점 더 깊이 깨달으면서요.
실제로 우리는 그러면서 뭘 누리는 겁니까? 하나님의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거죠.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점점 점점점점 더 깨달아 가는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어떤 근거로 삼을 만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이렇게 주장하는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실질적으로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그 풍성한 은혜를 잘못 누리는 거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이제 그게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부분은 실질적으로 그런 부분이 인 경우가 많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정말 그 은혜의 그 크기와 높이와 그렇죠.
넓이를 다 아는 사람들로 성장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면서 살기를 바라시는 거죠.
하나님이 왜냐하면 그 풍성한 은혜 속에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좀 더 잘 알거든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렇죠.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그것으로 인해서 무엇을 꿈꾸게 되느냐 하면은 지난주에 목요일 날도 잠시 말씀드렸지만은 우리가 장차 이제 죽으면요.
하나님 앞에 다 예수님 만날 거 아닙니까? 그 자리에 있었을 때에 우리가 물론 우리가 죽으면요.
우리는 이 상태에서 주님을 만나는 건 아닙니다. 만나는 건 아닌데 죽으면 그 즉시로 우리는 이제 온전한 각 사람에게 맞는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져요.

그 성화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그렇지만은 주님을 만나지만은 그 만나는 그 사람들이 우리 주님에 대해서 내가 이해하고 주님을 아는 그 깊이나 이런 부분들은요.
또 달라요. 거의 같지 않습니다. 다 똑같은 수준의 예수님에 대한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요.
각 사람에 맞게 다 이렇게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조금씩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떤 것을 더 소망해 보게 되냐면 정말 그 생각 끝에 우리 주님을 만났을 때 정말 주님께서 우리를 정말 잘했다 착하고 정성스럽게 잘 살았다 고생했다 하는 말 들을 수 있는 그런 어떤 관계 속에서 우리 주님과 교재가 이루어지는 그런 것들도 우리가 이렇게 꿈꿔보게 되거든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이제 꿈꾸게 되고자 한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이 성장해 가면서 결국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허락하신 그 구속에 관한 모든 일들을 우리가 깊이 이해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의 그 풍성함을 아이고 누리며 가는 사람들로 계속해서 살아가야 된다는 거죠.
근데 그것이 힘이 들어요.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다 충만하게 그렇죠 은혜 많이 받으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살아보면은 때때로는 어떤 증상까지 나타나느냐면요.
하나님의 은혜를 안 받고 싶은 마음도 생기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은혜를 계속 받고 싶은 게 아니 우리가 머릿속에서는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데 실제 신앙생활을 한번 해보면요.
은혜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부하고 싶어요. 은혜를 안 받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 정도로 우리가 괴한 면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잘못됐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다시 주님의 용서를 그렇죠 받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지길 바라는데, 그렇게 또 회복되고 싶지 않은 주님하고 관계를 조금 멀리 해둔 상태에서 나는 내 가고 싶은 길을 좀 더 가고 싶어 할 때가 또 많거든요.
우리가 막 그렇습니다. 그런 우리를 이렇게 딱 생각하면 사실 우리가 그 최종적 구원까지 도망 가운데 인내하면서 가야 되는데 우리는 인내도 해야 되지만 실제로는 그 인내하는 삶에서 나를 끊임없이 그렇죠.
어려워지게 만드는 주체도 나 자신인 경우가 대단히 많죠.
물론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의 악의 구조 속에 있습니다.
이 구조 속에 있기 때문에 이 구조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이 구조 속에서 함께 이렇게 어우러지면서 우리가 힘들어하는 경우도 많고 또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실제로 가만히 이제 많이 있는데 이렇게 어려움이 오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시험에 들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그 소망을 바라보면서 산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인내하면서 갈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을 지금 생각하게 해주는 그런 말씀이 먼저 이렇게 주어지면서 바울은 그런 너희를 돕기 위해서 계신 분이 성령님이시다 하는 겁니다.
근데 이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면요. 우리는 이제 우리 스스로 한편으로는 이 소망의 그 때까지 인내하면서 투쟁하고 싸우는 사람으로 이제 존재하는데요.
그런데 우리의 어떤 잘하고 못하고와 상관없이요.
성령께서 어떤 분이시냐 하면은 우리의 그 구원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시는 분이세요.
놀라운 분이십니다. 성령님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택한 사람들을 결국은 뭐냐면 그 사람의 물론 연약함 때는 또 잘하는 것들도 있고 그래요.
근데 그런 것과 사실 실질적으로 상관없이 성령님께서 우리를 탁 붙들고 계시고 그 성령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그 팔은 그죠 나중에 로마서 마지막에서 사도바울이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딱 그럽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의 근거 최종적 근거는 뭐냐 하면 우리 자신에게 길 없는 것이고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당한 그분의 그 팔로 다 붙들고 있는 그거에 근거해 있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 우리의 각 사람이 그 구원을 최종적으로 완성하기까지 하는 분이 우리의 성령님이시다라는 겁니다.
그 부분을 사도 바울은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그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셨고 또 그 성령님은 너희 안에 계신다 그러죠.
네 너희한테 요한복음 14장에서도 그렇죠. 그 성령님을 내가 보내시는데 그 성령님은 너희 안에 계셔서 너희를 진리로 인도해 가신다.
그러죠. 요한복음 14장 여기서도 보면은 사도 바울이 그 말씀을 이제 근거해서 잘 말해주죠.
9절이죠.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는 겁니다.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이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안에 다 있습니다.
그 안에 아직 없는 분은 어떤 분이냐 그 안에 인침을 못 받은 사람들이에요.
구원의 보증이 성령님이신데요. 너희 우리 구원 너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런 이제 계약 문서라고 있다고 하면요.
그 계약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계약 문서, 파기할 수 없는 문서 예 도장을 딱 찍어야 되지 않습니까?
마지막에 그 도장이 뭐냐 하면 인을 친다고 그래요.
도장 찍는 것을 성령님이 그 인이시거든요. 인을 치시는 분이세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과 우리가 계약 문서에다가 성령님이 도장을 딱 찍으셔가지고요.
파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신데 그 성령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 성령님은 너희의 구원의 보증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안다고 하면요.

좀 더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인식할 수 있는 지식도 좀 제공받고 거기에 대한 분명한 어떤 확신이 있다고 하면 그분들은 자기의 구원을 확신해도 좋은 거죠.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딱 그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잡하지 않아요. 사실은 되게 실질적인 것이고 우리의 존재론적인 겁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계시면 성령님은 우리를 이렇게 계시다가 떠나고 그런 분이 아니세요?
어떤 때는 떠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도 보면요.
하나님이 막 이스라엘을 떠나실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자녀로 택하셨는데 어떤 때는 하나님이 막 떠나시는 것 같아요.
언약궤가 블레셋으로 이렇게 딱 갈 때 하나님이 나는 너희를 떠난다 하면서 막 가시는 그런 모습이거든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심지어는 멸망시켜가지고 하나님이 성전까지 다 이렇게 오셔서 나는 이제 여기 있지 않겠다는 거죠.

여기 안 살 거다 갈 거다는 거죠. 어디론가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이 계속 그곳에 계시면서 그렇죠.
이스라엘이 다시 이렇게 관계를 회복하고 바벨론이나 앗수르 같은 대국을 다 사용했을 수 없죠.
심지어는 고레스 같은 바사의 고레스 같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막 주셔가지고 돌아오게 하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면서 하나님이 다시 관계를 회복해 가시는 그 이스라엘 역사를 우리가 보면 뭘 사실은 깨닫게 되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는다는 거죠.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까지 도우시는 포기하지 않는 그런 분이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그죠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오실 이유가 없죠.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사실은 우리에게 확정시켜 주신 거죠.
사랑을 더 이상 이 정도 하면 그 이상 사랑할 수가 없는 사랑을 확정해 버리신 거예요.

하나님이 그것을 그런 걸 통해서 그래서 그 하나님이 이제 보해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 안에 이제 계시면요.
그 이스라엘과 임마누엘 하셨던 그 임마누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떠나지 않는다는 그래서 잠시 하나님이 얼굴을 가려우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 하면요. 하나님이 은혜를 입으시는 것을 이거 멈추시는 것 같아요.
관계를 때로는 한동안 등 돌리시고 우리와 관계를 안 맺으시는 것 같아요.
근데 그때도 잘 우리가 이제 우리 자신을 제 시간이 지나서 보면 알죠.
그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손을 내밀고 있고 우리가 그렇게 살다가 다시 이렇게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것도 주님이 은혜를 계속해서 베푸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 주님이 계속 계시고 은혜를 계속해서 베푸시면서 우리 안에 계시는 떠나지 않는 분으로 계셔서 그 주님을 우리가 알면 그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하는 것을 안다고 하면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구원에 대해서 많이 흔들리는 이유가요.
결국은 뭐냐 하면 우리의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주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의 근거가 주님에게서 아직까지 충분히 주님에게 있지 않고 뭔가 아직까지 나에게 있는 우리 이제 교회 안에도 그것을 전적으로 이렇게 인정하는 우리 이제 칼빈주의자들이 우리는 다 칼빈주의자들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근데 우리 이제 장로교 안에도 여전히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고 우리 인간의 어떤 노력이죠?
내 노력이 어느 정도 내 구원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근거를 그런 분들을 끊임없이 나의 자신에게서 찾는데요.

그러는 과정에서 어떤 큰 손실을 입게 되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공부해 가는데 시간을 허비하게 돼요.
그거 해야 될 시간에 다른 거 하고 있었어요. 그게 진짜 그런 것이 안타깝고 그래서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그렇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풍성한 역사들을 다 이렇게 충분히 헤아리지 못해서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면서 사는 경우가 참 많다는 거죠.
그런 안타까움이 사실 있기는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그렇게 도우셔서 너희의 그 구원을 지키시고 그 확신을 지키시고 최종적으로 너의 구원을 완성해 가시는 분이다 하는 것을 로마서 전체 속에서 그 부분을 강조하려고 하는데 오늘 제가 조금 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건 뭐냐 하면요.
지난주에 이 내용을 사실은 비슷하게 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 내용이 너무 중요한 내용이어서 몇 번 계속 반복해서 우리가 말씀을 들어야 되고 기억을 해야 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그런 얘기도 했죠.

우리가 이제 하나님과 관계 맺다가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구원의 확신에서 우리가 그때 탁 멀어지는 일이 발생하거든요.
그 원인에서 멀어지니까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는 이 말씀 진리의 말씀을 확 붙들면서 나도 나 자신을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고 그랬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다른 형제 자매들도 똑같이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회개하는 거라고 했지 않습니까?
참으로 회개하는 거 내가 막 내 잘못을 깊이 묵상한다고 회개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 죄를 그렇게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내 자신 내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깊이 아무리 묵상해도 하나님 앞에서 막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제 우리가 정말 가슴 아파하면서 회개하게 되느냐면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요.
그래요.

주님의 그런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그 주님을 생각하면 진짜 해배하게 돼요.
그래서 우리가 그 순간에도 그렇게 주님을 여전히 의지해야 된다고 하는 것까지도 지난번에 말씀드렸는데 이 부분은 너무너무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내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네 그리고 오늘은 우리가 이제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을 조금 드렸었는데요.
나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조금 생각을 더 해보려고 그래요.
이 부분이 사실은 이제 지금까지는 뭐냐 하면 구원받은 분이라고 전제하고 제가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우리 여기 있는 분들 다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전제하고 그래서 구원받은 나는 우리는 어떤 은혜를 누려도 좋은가 하는 것을 얘기한 거죠.

그런데 우리가 다시 한 번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중요한 부분이 뭐냐 하면 나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 하는 부분을 한 번 더 이렇게 생각해 봐야 되는데 이것도 뭐냐 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가 확신으로 따라갈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조금 더 먼저 보게 되면요.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고 했는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연약하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렇게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 성령이 탄식하신다고 이렇게 표현돼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은 성령이 그러니까 홀로 이렇게 탄식하시는 분이 아니고요.
성령은 누구를 통해서 그 탄식을 표현하느냐 하면은 우리를 통해서 표현하세요.
실제로 탄식하는 사람은 우리 자식들입니다. 우리가 성령님 이제 근심하신다 하고 저기 다른 이제 에베소서에 표현도 되고 있는데요.

그런데 그 성령님이 이렇게 탄식이 홀로 우리 없이 홀로 이렇게 탄식하시는 분이 아니고 사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성령님의 그 탄식이 여기서 말하는 이 탄식이 조금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사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면 이것이 좀 어울리지 않는 그런 표현인데요.
그래서 이 탄식이 어떤 의미인가를 학자들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릅니다.
이것은 이제 논문을 한 편을 있잖아요. 꼭 살펴봐야 될 정도로 어려운 주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생각해 보면요.
이 성령께서 탄식하시는 것은 홀로 이렇게 단식하셨던 분이 아니시고 실질적으로는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부분에 대해서 탄식하게 하시는 분이다.
이해되시죠? 우리의 마음에 탄식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이제 성령님이 역사하신다.
이렇게 그 부분을 누가 이렇게 잘 강조했냐면은요.
제가 저기 보면 저 책에 한 권 있는데요.

로마서 주석 쓰신 웨스트민스터에서 조직 신학 가르쳤던 존 머레이 교수님 목사님이 이제 그 부분을 그렇게 잘 표현해 놓으셨습니다.
저도 이제 거기에 이제 동의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탄식 우리가 탄식하게 하셔서 우리가 그 탄식 가운데서 뭘 깨닫느냐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점점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되 간다는 거죠.
그런 일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제 일 이루시는데 우리 요한복음에 보면은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성령이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이렇게 깨우친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죠 죄에 대해서 깨우치고 의에 대해서 깨우치고 심판에 대해서 죄라고 하면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그게 죄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의라고 하면은 내가 주님께로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는 사실 그것은 이제 십자가 구속을 다 표현하는 거예요.
십자가 돌아가신다는 얘기죠.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환이 드러납니다.

그 의를 그렇게 예수님이 이제 그때는 자세하게 말씀을 안 하셨어요.
왜냐하면 자세하게 말하면 너희가 이걸 다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나중에 성령이 오시면 내가 뭘 했는지 그것을 너희가 밝히 알게 될 것이다 하고 이제 그래서 결국 성령이 그런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그 진리를 진리로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분이시거든요.
그 역사를 우리를 때때로 탄식하게 하시면서 성령이 아마 다른 문제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근심하시면서 그렇죠.
근심하시면서 우리 안에 너가 이런 이런 부분에서 아직 잘 이제 문제가 있다.
어떤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게 하고자 하는 그 어떤 수준에 너희가 아직 이르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이 이게 아닌데 내가 지금 어긋나고 있다 하는 이런 것들을 인식시키시면서 우리 안에 탄식을 일으키셔서 우리가 어떤 것을 금방 인식하게 되냐면은 내가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것을 실질적으로 우리 정서적으로도 인식을 하게 해 주신다는 거죠.

정서적으로도 그것을 인식하면서 우리가 지각이 그것을 이제 점점점점점점 지각을 사용해서 알게 되는 거죠.
그 두 영역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해서 그런 것들을 사용해서 일하셔서 우리가 잘못된 것들을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바른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시기까지 하는 분이 성령님이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그러면서 또 어떤 분으로 존재하냐면 중보자로 존재하세요.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분으로 계시고요. 우리가 로마서 뒷부분에 보면은 우리 34절에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 우편에 이제 계시다 이렇게 말씀하면서 그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그러지 않습니까?
성자께서 간과하시고 성령께서 증거자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분으로 있다고 하는 것을 이렇게 말씀해 주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너희가 그렇게 든든한 사람들이라는 거죠. 든든한 너희를 돕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 너희가 얼마나 든든한가 우리의 정말 산성이신 분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 정도로밖에 우리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더 이상 표현하고 싶어도 우리의 산성 든든한 요새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을 그런 분이세요 하나님이 그런 분이 나와 함께하시면서 나의 변호자로 계시고 그죠 대연자로 계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딱 생각하면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확실하고 또 안전한가 하는 것을 이제 생각하게 되고 우리가 그런 성령의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나타내시는 그런 사역들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경험하면서 그죠.
그런 탄식하는 인간의 하나님의 뜻대로 탄식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한 번 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네 그런 것이 실질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들이에요.
우리가 탄식하는 내 모습을 이렇게 생각해 보면요.
어떤 것을 느끼냐면요. 하나님을 안 믿었을 때 내 나라면 도무지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대단히 낯선 모습이거든요.

그게 우리가 뭐 그런 거 가지고 탄식하고 하나님 뜻대로 못 살아서 그렇죠 막 그런 분들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네 그러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우리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 마음에 근심이 있고 때로는 탄식하는 나를 봐 보면요.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어떤 정서 성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그런 나 자신을 살피면서 너가 정말 제대로 예수 믿기는 믿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너가 하나님의 사람이 맞기는 맞는가 보다 우리가 그런 나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이제 우리가 실질적으로 우리에게는 그렇게 오는데 성령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과 관련해서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다 하고 우리가 사실 많이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공부하는 그 공부 분야가 이제 성령론이라 학자들이 성령론이라고 하는 그 주제를 가지고요.
그걸 체계적으로 다루는데요. 그 성령론을 사실은 공부를 하면 지금 방금 말씀드린 이런 부분들이 그냥 쉽게 확인이 됩니다.
아주 명료해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만약에 성령에 대해서 조금 더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거죠.
성령론을 조금 더 가르쳤다면 우리 한국 교회의 이 구원에 대한 확신 이 문제가 훨씬 더 그렇죠.
풍성하게 우리 교회 속에 이렇게 나타나는 예전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우리 교회들이 충분하게 가르치지 못하면서요.
실제로 우리가 누려야 되는 이 구원의 풍성한 은혜를 못 누린 면도 있다고 하는 것도 생각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아까 그랬잖아요. 우리가 잘못하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세요.

그렇죠 거기에서 그런 사역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성령님은 어떤 분이시냐고 성경이 말하냐면요.
회계의 영이시다. 성령님은 회계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이끄시는 진리로 우리를 이끄시는 또 진리의 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정말 기이한 일이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월이 가면 점점점 하나님을 깊이 깊이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특히 우리 믿음의 선배 중에서 뛰어난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그런 미국의 1700년대의 대부흥의 주역이었지 않습니까?
그 도라산 에드워드가 쓴 책이 있어요. 신앙감정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신앙감정론 그 당시에 이제 부흥의 역사가 있었어요.
부흥이에요.

그러니까 막 어떤 이것이 참된 부흥인가 이게 참된 은혜인가 하는 것을 그 당시 신학자로서 에드워드가 면밀하게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성경적으로 분석한 책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은 성령의 역사 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도 이렇게 그런 감정들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양한 감정들 속에서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도 신뢰할 수 있는 정말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신뢰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구나 하고 확신하게 하는 그 결정적인 요소가 뭐냐 답은 아까 말씀드렸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냐면 신적인 사랑이라고 표현해요.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서 그 인정, 내가 하나님을 인정한 그 대상을 내가 사랑한다고 하는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잘 얘기하면서 우리가 에게 만약에 그러한 일이 있다고 하면 우리가 다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은혜를 정말 제대로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딱 얘기해 줍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경은 뭐냐 하면 우리 성령님은 사랑의 영이시다.
그리고 성령님은 또 양자 영이시라고 그렇죠 여기 로마서에 보면은 그래서 양자의 너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이런 식으로 표현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성령님은 양자의 영이시구나 별명이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하나님 아버지라고 이렇게 부르는 그 일이 가능한 것은 양자의 영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아들의 영이 그래서 아버지라고 이렇게 막 부르면 행복해요.
아버지라고 부르면 내가 아버지 앞에 있다고 하는 그 든든함이 있죠.
우리 안에 바로 이렇게 생겨요.

그래서 두려움에 떨다가도 아버지 하면 심지어는 그 두려움과 염려도 우리에게서 막 떠나가는 실질적으로 그 양자의 영으로서 성령이 그렇게 역사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거든요.
그 외에도 성령님의 별명이 많습니다. 선교의 영 생명의 영 그죠 그래서 제가 방금 말씀드린 요 몇 가지만 좀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진리의 영이시고 성령님 회개의 영이시고 사랑의 영이시고 양자의 영이시다라고 하는 이 정도만 우리가 딱 생각을 해도요.
그것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보면 내 구원이 어떻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좀 더 확신이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확신이 우리에게 더 이렇게 보여주고 그래서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잘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요.
또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 때 우리가 이게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렸던 이런 부분들을 이런 지식을 다시 소환해서 그렇죠 다시 한 번 우리 구원을 절감하면 그 회복이 빨리 일어날 거 아닙니까?

빨리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가고 있는 그 길을 정상적으로 가는 사람들로 다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이게 이제 구원의 초 초보 기초 기초 그죠 대단히 중요한 기초이다.
근데 이 기초가 이제 부실한 거예요. 이리 가다가 더 빠지면요.
그 기초를 다시 닦는데 또 너무 고생들을 많이 하세요.
예수님 믿는 분들이 그러니까 은혜가 빨리빨리 이렇게 회복이 안 돼 근심하고 때로는 자기를 질책하고 막 그 그렇게 하다가 이제 충분히 자기를 학대하고 나서 이제 좀 이 정도면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가도 안 되겠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게 아니거든요. 형님 그런 모습이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안타까운 모습이에요.
그래서 우리 속에 여러 한국 교회 세계 사실 그런 요소들이 많아서요.
이 구원의 이 은혜를 많이 누리지 못하고 우리가 그 은혜가 이렇게 빨리 회복되고 그렇게 해서 그 은혜가 빠르게 이렇게 강화되는 방식으로 우리 교회가 나타날 때 우리 교회는 어디로 갔냐면요.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죠 향해서 우리 개인의 개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제 넘어서서 내 형제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 그렇죠 그것을 소망하면서 우리가 헌신하게 되고 우리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제 넘어서서 그 하나님의 통치가 그렇죠.
우리 국가의 또 전 세계 속에 계속해서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헌신하는 사람들로 나타나아가게 된다는 거죠.
그 힘이 다 결국은 거기서 나타나는데 우리가 그 힘이 너무 약하고 그렇죠 너무 이미 좀 생기다가 없어지고 생기다가 없어지고 이러다가 세월 다 버리는 분들 너무 많아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그렇죠 이루고자 하시는 그 일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정말 감격하는 사람들로 나타나게 되거든요.
그 자리에서 감격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감격하는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다 있을 때요.

하나님이 정말 영광 많이 받으세요 그런 것을 이제 우리는 우리 교회에서 부터 꿈꾸면서 같이 열심히 잘 해갔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또 로마서 말씀 살피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우리 각 사람에게 임해 있고 그 은혜의 역사가 우리 속에 성령님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최종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보내시고, 우리를 그 길로 끊임없이 인도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소망을 바라보며 때때로 낙심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고, 때로는 두려워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 오나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늘 우리의 그 모든 문제들을 우리로부터 이제 물리쳐 주시고 우리 안에 큰 구원의 확신을 회복시키셔서 더 큰 사랑의 은혜와 사랑 안에 살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나아가게 하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 우리 교회 속에 그런 은혜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잘 나타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미 허락하신 이 복음의 그 기초 위에 우리의 신앙이 견고하게 지어 세워지게 하여 주시옵시고, 그 신앙에 의지하여서 우리가 믿음의 길을 더 힘 있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