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405말씀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고린도전서 15장 1-4절) ...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1절부터 4절까지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절부터 4절까지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오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주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절부터 오늘 8절까지의 내용을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이 이 말씀을 어떤 면에서는 시급하게 이렇게 해야 되는 그 이유가 교회 속에 있었습니다.
근데 고린도 교회 같으면은 바울이 언제 개척한 교회죠 바울이 1차 2차 3차 전도 여행 이렇게 하게 되는데요.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에서는 주로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개척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할 때 어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해서 이 쪽 위쪽으로 이렇게 소아시아 지역을 돌면서 다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저쪽에 또 터키 약간 중부 쪽이죠.
중부 쪽에 비시디아 안디옥이라고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리아 안디옥하고 비시디아 안디옥하고 헷갈리면 안 되는데요.
수리아 안디옥은 이제 시리아 과거에 같으면 시리아 지역의 안디옥이죠.
지금은 이제 터키의 약간 동쪽이면서 이렇게 남쪽인 지역인데 거기서 선교 거점을 삼으면서 바울이 이제 1차 전도 여행 끝내고 또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2차 전도여행을 이번에는 저쪽에 빌립보까지 해서 유럽으로 해서 그 아래로 테솔로니가 그렇죠 베레아도 선교하고 아덴도 선교하고 그다음에 그 그렇죠 고린도 지역 아가 갑자기 아가보 아니 잠깐만 헷갈리네요.
고린도 교회 전도하고 다시 이제 에베소로 해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나중에 최종적으로 돌아오는 그런 선교 여행을 하게 되고요.
그리고 3차 전도 여행도 바울이 이제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해서 유럽 쪽으로 한 번 더 이렇게 돌면서 선교 여행을 하게 되는데 바울이 우리 2차 전도여행에서 가장 힘을 많이 썼던 선교지 거기가 고린도 교회라고 한다.
그러면 3차 전도 여행 때는 에베소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2차 전도 여행 때 고린도에서 한 1년 6개월 동안 있었으니까 한 곳에 상당히 오랫동안 있게 되고 3차 전도 여행 때는 이제 에베소에서 거의 한 3년 가까운 기간 동안 있게 되니까 그 두 지역을 얼마나 중요한 선교적 거점으로 삼았는지를 알 수가 있는 거죠.
고린도 교회 같은 고린도 지역 같으면은 그 지역이 로마의 입장에서 볼 때는 굉장히 중요한 이제 도시인 거죠.
로마가 관할하는 식민지 가운데 아주 중요한 도시 빌립보나 다른 지역들도 중요한 이제 도시죠.
그런데 특별히 고린도 교회 고린도 지역 같으면은 항구 도시면서 또 그 당시 경제적으로 로마의 입장에서 볼 때는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고 특히 고린도 지역 같으면은 로마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실제로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살았고 또 로마의 법이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실질적인 로마와 마찬가지라고 할 만한 제2의 어떤 로마라고 할 만한 그런 도시가 고린도입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는 항구 도시다 보니까 이제 그 상당히 물질적인 어떤 문화가 팽배했겠다 하는 것을 금방 생각해 볼 수가 있고 또 고린도에 이제 그 지역의 가장 높은 지역에 아데미 신전이 있었어요.
그 신전이 딱 그 도시의 중앙에 있으면서 그 전체 도시를 영적으로는 이렇게 아우르고 있는 그런 어떤 분위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에만 보통 여성 사제들만 해도 한 천 명이 거기에 상주하면서 있었는데 그 아데미 신은 다산의 신 풍요의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이 그 곳에 이제 하나님 신의 어떤 축복이 임하기 위해서는 어떤 남녀 간의 어떤 성적인 결합을 통해서 그것이 이제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런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가 또 고린도입니다.
그래서 방탕하고 엄난한 도시에 하면 그 대명사가 고린도라고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 고린도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시대 사람들은 거기 방탕한 도시 그렇죠.
그리고 경제적으로 아주 부유하고 로마의 어떤 정치나 문화가 그대로 이렇게 있는 그런 도시였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이 고린도 교회도 이제 그 영향 속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그들의 그 사상이 교회 속에도 쉽게 파고들어올 수 있는 여지들이 많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이제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에 주로는 이제 회당을 중심으로 해서 선교를 하다가 해당 선교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이제 느끼면서 사도행전 18장에 이렇게 나오는데요.
이방인 중심의 선교로 이렇게 전환하는 큰 계기가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사하게도 사역 초기에 회당장 이제 그리스보라는 들어보셨죠?
기억나죠 그리스보 이 가정이 예수님께 돌아오면서 회당장이니까 상당히 그 회당에서 종교적으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예수님 믿으면서 고린도 교회가 이제 본격적으로 선교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그 가정을 중심으로 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게 되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그 바울의 사역을 보면서 대단히 위기의식을 느꼈고 바울을 로마 총독 갈리오에게 고소하는 그런 사건도 있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 종교는 우리와 다른 종교고 새로운 신흥 종교다 해서 마치 로마가 이제 신흥 종교에 대해서 늘 좀 경계하면서 가능하면 그렇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어떤 면에서 법적으로 이렇게 억압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그것을 이용해 가지고 이들은 자기들이 믿는 율법과 다른 것을 이렇게 전한다 하면서 마치 그들의 문제가 바울의 문제가 법적인 문제인 것처럼 다른 법의 문제인 것처럼 교묘하게 했잖아요.
하면서 총독에게 고소를 하는데 갈리오 총독이 이렇게 잘 들여다봤죠.
보니까 자기가 볼 때는 지금 예수 를 증거하는 바울과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그 유대 종교의 한 분파 정도로 보이는 거예요.
크게 자기가 볼 때는 다르지 않는 같은 것을 전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것은 유대인들 자신들의 자체적인 문제다 이렇게 결론 짓고 그 고소를 기각하죠.
그때 또 유대인들이 회당장 이제 그리스보 이후에 그 회당장을 이어 아마 받았을 걸로 추정되는 회당장 소스테네를 막 때리고 핍박하는 그런 장면도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가 초기 그런 어떤 분위기 속에서 이제 교회가 잘 이제 형성이 되어졌는데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후에 한 3년에서 많게로는 한 5년 정도 뒤에 나중에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하면서 에베소에서 많이 머물렀다 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고린도 교회에 이제 편지를 보내서 고린도 교회 문제를 다루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3년 짧게 보면 3년 길게 보면 한 5년 정도 뒤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듣고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의 문제를 이제 교정하려고 하는데요.
고린도 선서를 우리가 쭉 전체적으로 보면은 고린도 교회에 한 10가지 정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이제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그 10가지 문제가 이렇게 살펴보면요.
오늘날 우리 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 거의 대부분이 그대로 고린도 교회에 있어요.
이제 우리도 사실은 대단히 이제 우상의 익숙한 그런 민족이고 대부분의 이제 민족들이 사실 그런데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또 우리도 대단히 물질적이고 또 방탄한 그런 면들도 있고 그리고 이 세상의 어떤 가치로 철저히 훈련된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인데요.
특히 고린도 지역이 갖고 있는 그 모습은 오늘날 굉장히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히 부유함을 누리고 있는 우리 시대의 교회들 우리 시대에 그렇죠 비슷하고 우리 시대의 교회들이 그 고린도 교회 고린도 교회 속에 나타났던 그 문제가 많이 발생할 수 있겠다 하는 것을 쉽게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서를 우리가 한번 이렇게 쭉 나중에 읽어보시면요.
거기에 여러 가지 이제 문제가 등장하는데 바울이 먼저는 아덴에서 2차 전도여행 때 선교하고 나서 그 선교를 교훈 삼아서 고린도교에서는 새로운 어떤 선교 전략을 구사해요.
아덴에서 바울이 사도행전 17장 16장 그 정도에 이제서 아덴 선교하면서 그 철학자들하고 막 이렇게 논쟁하는 굉장히 철학적인 진술을 해 나가는 그런 바울의 설교를 보게 되는데 나중에 고린도에 가서는 자기가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만 전해야 되겠다 하고 다짐하면서 설교 전략을 수정하는 그런 모습이 나타나는데요.
그 고린도 교회 같은 경우에도 어떤 문제가 있냐면은 그 당시에 그 헬라의 굉장히 수준 높은 철학 어떤 지혜와 관련된 사상들이 많이 이렇게 들어와 있는 상태고 바울이 이제 그런 것을 이렇게 또 바라보면서 그런 쪽으로 어떤 면에서는 물들어 있는 영적으로 보면은 병 들어 있는 그런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딱 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잘 이렇게 표현해내는 그런 어떤 수사학적인 능력을 가진 뭔가 이렇게 사람들이 그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그러면서 이렇게 사람들이 어떤 인간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더 뛰어나고 유능한 사람들인가 하는 그런 이제 의식이 교회 속에 딱 들어오니까 교회가 뭐가 발생하는 겁니까?
파당이 발생하는 거죠. 아플로파 개바파 바울파 이렇게 파장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더 뛰어난 사람인가 나는 누구의 계보가 하는 것을 따지면서 이제 따지는 그런 문제 근본적으로는 뭐냐 하면은 복음의 능력이 약화되면서 그들 속에 그런 누가 더 어떤 운면적이고 수사학적인 능력 또 과거의 지혜를 잘 사용해서 좀 더 이렇게 멋있게 복음을 가르치는가 하는 그런 이제 문제가 교회 속에 이렇게 파고들어온 거죠.
그러니까 그만큼 복음이 약화되고 있는 그런 문제 그리고 또 고린도 교회 속에 아까 얘기했던 그런 예상되는 게 음란과 관련된 문제 있겠죠.
그죠 음행에 관한 문제 이것을 특별히 바울은 고린도 편지에서 전서에서는 강조하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이렇게 많이 안 나오는데 그리고 막 자기들끼리 또 막 고소하고 고발하고 이제 또 그래요.
그래서 그 문제도 결국 근본적으로는 복음이 약화된 문제 또 그 외에도 이 고린도 교회 속에 제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요.
나중에 한번 10가지 정도 되는데 10가지가 어떤 것인지를 한번 쭉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뭐냐 하면 그 문제를 종합해서 볼 때 우리가 금방 무엇을 알 수 있냐 하면은 이 교회 속에 복음이 약화되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것을 지적하면서 끊임없이 뭐냐 하면 중간중간에 복음에 대해서 다시 이렇게 진술해 주고 그들이 근본적으로 이렇게 복음으로 돌아오도록 처방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뭐냐 하면 그 각각의 문제들은 뚜렷한 어떤 면에서 문제의 그런 주제들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 주제에 대해서도 물론 바울이 건면을 하기는 하는데 그 전체적인 문제를 어떻게 우리 이제 교회가 우리 성도들이 접근해서 문제를 해결해 가야 되는가 하는 것을 바울의 그 예를 통해서 우리가 상당히 많은 교훈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 속에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은 이 고린도 교회와 비슷한 문제들도 발생할 수 있고 이게 서로 이렇게 또 하나 되지 않는 문제 서로 어떤 다투는 문제 심지어는 이 고린도 교회처럼 어떤 큰 음행의 문제라든지 어떤 고소의 문제 이런 것들도 발생할 수가 있거든요.
그 외에도 성찬에 관한 문제 또 은사에 관한 문제도 있고 그러잖아요.
그렇죠 그런 문제들이 우리 교회 속에도 나타날 수가 있는데 그런 문제를 이렇게 탁 이렇게 나타날 때 우리가 기본적으로 어떤 것을 교훈받게 되느냐 하면 이 모든 것들이 복음이 약화돼서 복음에 우리 신자들이 굳게 서지 못해서 나타나는 문제다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국 교회를 이렇게 자꾸 들여다보면요.
사실 우리 속에도 그 한국 교회의 그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고 또 조금 더 확장해서 한국 교회를 보게 되면 그 문제를 우리의 가지고 있는 문제이면서 때로는 이제 우리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보면은 이 교린도 교회와 비슷한데요. 한국 교회가 이렇게 분위기가 뭐냐 하면요.
상당히 사실은 이제 우리가 지금은 익숙해져서 잘 피부로 잘 와닿지 않는데 한국교회는 상당히 기복적인 어떤 교회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크게 보면요. 그리고 한국교회도 상당히 물질적인 어떤 그런 특징 거기에 이제 기복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는 그리고 예수님 잘 믿어서 정말 이렇게 잘 되는 거 있잖아요.
그야말로 예수님 잘 믿어서 이렇게 뭔가 성공하는 입신양명하는 그런 쪽의 어떤 생각들이 우리 교회 속에 사실 굉장히 팽만해져 있어요.
그래서 이제 그런 것을 잘 추구하게 하는 그런 교회나 그것을 이제 잘 독려해서 그렇게 열심히 하게 하는 그런 어떤 영적인 무브먼트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걸로 이렇게 오해 착각하는 그런 정도까지 이미 교회가 상당히 이제 와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교회의 역사를 이렇게 좀 살펴보게 되면 우리 문제가 얼마나 이제 이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는지를 사실 좀 더 인식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신학적으로 우리 시대의 복음을 그래서 신복음주의에 가깝다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주의라고 하는 우리 전통적인 우리가 따르려고 하는 어떤 신앙적 신학적 그런 입장이 있는데요.
복음주의 그 복음주의라고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이 이제 새로운 이거는 복음주의인데 이것을 구분해서 신복음주의라는 표현을 써야 되는 그런 상황까지 가게 되는데요.
그 신복음주의라고 하는 그 영향 속에 우리 20세기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특히 미국의 교회까지 해서 다 그 바운다리 안에 들어가게 돼 있어요.
이 신복음주의의 특징은 뭐냐 하면 기본적으로 복음이 많이 약화되고 교회에서 더는 이제 교리를 자세하게 가르치지 않는 상당히 반지성적인 어떤 그런 면들이 이렇게 오게 되고요.
그래서 이제 대단히 이렇게 감정적인 것을 추구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원래 누리고 그렇죠 가지고 있어야 될 그런 정서들에서부터 실질적으로는 멀어지는 그런 현상이 우리 교회 속에 이렇게 있는 겁니다.
실제로는 그러니까 우리 복음주의에서 우리가 우리의 감정의 문제를 다룰 때 사실은 제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뭐냐 하면요.
예수님의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게 항상 전제되는 거거든요.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느냐면 죄에 대한 더 깊은 고백과 그거로 인한 슬픔이 있게 되는 거죠.
그러고 나서 그는 우리를 다시 위로하시고 정제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는 그 오늘 이제 이 말씀에서 또 이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이 부활의 능력이죠.
그 능력을 우리가 부여받으면서 우리 마음에 큰 그 담대함과 확신 그리고 기쁨이 충만한 제대로 정말 그야말로 기쁨이 충만한 그런 모습으로 우리 교회의 모습이 잘 이렇게 나타나야 되는데 실질적으로는 이 복음주의가 그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많이 이렇게 전락시킨 면이 있어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뭔가 우리가 감정적으로 많은 것들을 이렇게 경험하긴 하는데 정말 경험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그 애통함이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 부분에서는 우리 교회가 이렇게 점점점점 멀어지고 있는 그래서 우리 교회 속에 실질적으로는 복음에 관해서 많은 것들이 가르쳐지지 않고 특히 죄와 회개와 그렇죠 이런 용서에 관한 문제 그리고 칭의에 관한 그걸로 칭해와 성화에 관한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우리 교회들이 많이 가르치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보게 되고 실질적으로는 우리가 대단히 성경에 대한 가르침이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냥 이렇게 예의 바르고 교향이 있고 무엇이 있게 살 것인가 하는 어떤 그런 쪽으로 어떤 설교라든지 가르침과 교육이 많이 이렇게 치우쳐 가는 그런 모습을 우리 교회 속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딱 이렇게 바라보면서 진단을 잘 못해요.
이 교회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게 워낙에 이게 이제 이런 문제를 이렇게 복잡해 보이는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바꾸는 거 그 때로는 이제 뭐 그렇죠 어떤 프로그램을 바꾸는 거 그렇죠 뭔가 이렇게 전략을 바꾸는 거 하여튼 나름대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처방을 막 이렇게 내리긴 내렸는데 보면은 그것이 해결책이 되지 않고 실제로 교회의 기본적인 어떤 모습은 바뀌지 않는 교정이 되지 않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계속 보면서 지금 가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고 우리 교회들도 마찬가지고 또 우리 개인적인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같이 이제 적용해 볼 수 있는데 근본적으로는 뭐냐 하면 우리 속에 복음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 문제다라는 거죠.
복음이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복음이지 않습니까?
이 복음이 바울이 보면은 이제 자기가 고린도 교회에 이 복음을 전했는데요.
2절에 보면요. 대단히 사실 무시무시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하는데요.
이게 바울의 하는 말을 잘 지키면 구원받는다 이런 말은 아닙니다.
네 복음을 믿으면 복음을 제대로 듣고 그 복음을 믿는 그 믿음에 너희가 굳게 서면 그 믿음으로 너희는 구원받는다는 것을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은 여기서는 자세하게 설명을 하지 않죠.
그것은 로마서에서 이제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여기서 어떤 표현이 우리에게 이 눈에 확 들어오냐면 헛되이 믿을 수 있다는 거를 딱 얘기해 주는 거죠.
그러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딱 이렇게 보면서 그 단어가 이제 떠오른 거 아닙니까?
사실은 그들이 헛되이 믿을 수 있다는 믿는 사실 요소들이 많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바울이 너희가 헛되이 그렇게 믿으면 너희가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너희 그 구원이 너희의 것이 될 수 있겠느냐 사실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죠.
그렇게는 못하네요. 너희가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는 이 긍정적인 표현으로 지금 표현해 주고 있는데 바울의 머릿속에는 그들의 어떤 모습에서 지금 헛되이 믿고 있는 그 교회가 누가 개척한 교회입니까?
바울이 개척한 교회죠. 바울이 개척한 디모데가 가서 같이 막 사역했던 그렇죠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디모데를 잠시 보내기도 하고 그래요.
보내서 그 문제를 수습하고 돕고 막 이렇게 하는 바울이 개척한 그 교회 그죠?
사실 그래도 다른 교회하고 다르게 무려 1년 6개월 동안 그리고 바울이 사실 그 이후에 한 번 이렇게 방문하고 나중에 이제 3차 전도 여행 후에도 이렇게 방문하는 대단히 공을 많이 들이는 이제 교회가 고린도 교회인데요.
그렇게 해서 세운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속에 나타날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이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등장하게 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울이 이 심각한 이 질문을 던지는 거죠.
너희가 지금 헛되이 믿고 있는 이 문제를 잘 해결해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고린도후서에서 또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제기해요.
그러니까 고린도후서를 보면은 몇 가지 문제는 교정이 이제 돼 가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음행에 관한 문제 또 고소 서로 고소하고 이런 문제들은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데 고린도후서에 보면 나중에 어떤 문제가 등장하냐면 거짓 선지자들이 그 속에 있어서 바울의 심지어는 사도권을 부정합니다.
그런 심각한 문제까지 있게 돼요. 그러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다가 권면을 이제 막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몇 가지는 교정되는데 많은 부분이 사실은 잘 교정이 안 된 상태로 있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데 그것을 이렇게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들이 방향을 어디로 잡느냐 하면요.
바울의 이 겉면 자체를 그 권위 자체를 무너뜨리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우리는 그 바울 당신의 그 권면을 받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 어떤 대적하는 모습까지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게 돼요.
그래서 바울이 자기의 사도권을 다시 한 번 더 변호하고 그렇죠.
고린도후서에서 그리고 내가 한 번 더 가면 그때는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고린도후서에 마지막에 보면 그런 말까지 해요.
내가 다시 가면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그런 말까지 하면서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의 그 말씀의 권위를 이렇게 강조하는 그래서 이 교회가 얼마나 이제 심각한가 하는 그것을 우리가 한번 엿보면서요.
바울이 이 교회를 다시 회복시키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한 이 복음을 이들에게 다시 가르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를 새롭게 하려고 했다 하는 것을 우리가 한번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요.
이제 우리가 그동안 사실은 예수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해서 계속 많은 이제 이렇게 말씀을 나누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꼭 어떤 문제를 이렇게 드러내고 그것을 이렇게 그 자체를 이렇게 해결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복음으로 다시 잘 돌아가고 복음의 우리 신앙의 터가 잘 놓여지게 되면 그래서 바울의 핏 고백대로 너희가 우리가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그 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실질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저절로 이렇게 싹 이렇게 구름이 이렇게 안개가 걷히듯이 자연스럽게 해결되어져 가는 그런 모습들을 우리가 점점 보게 이제 될 것입니다.
그런 이제 은혜의 역사들이 실제로 우리 속에 조금씩 조금씩 나타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감사한 마음이 많고 또 먼저는 제 자신도 다시 한 번 복음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특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이렇게 부활하셨는데요.
십자가 지시고 나서 3일 뒤에 부활하셨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이제 부활이 그 역사적 사실을 우리가 이제 부정하는 그런 모습은 우리 교회 속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실제로 우리 교회 속에 우리의 삶을 통해서 어떻게 이렇게 표현되어져야 되는가 하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 이제 생각을 많이 못한 면이 있고요.
또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의미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교훈들 신학적 함의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좀 더 많이 공부해 가야 되고 그동안 공부한 것들을 또 우리가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나의 지식으로 계속해서 체계화시켜가는 그런 과정도 우리에게 이제 계속해서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이제 열심히 지금 공부하고 그래도 있는 편입니다.
그렇죠 열심히 공부해서 이제 이렇게 딱 얘기하면은 지난번에 얘기했던 거구나 그만 그런 생각이 들곤 하실 텐데 우리가 그동안 그동안 이제 많이 공부했는데요.
다시 한 번 잠깐 생각해 보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제 우리 바울의 표현 들어보면요.
여기 4절에 3절에 성경대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4절에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이 부활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가지고 이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사건 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 적어도 이제 한 이사야 시대 때 같으면은 한 700년 전에 그렇죠 그리고 다윗의 시편의 말씀을 보게 되면 약 또 천년 전에 모세의 또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제사 제도 모세를 통해서 게시해 주신 모든 그 제사와 관련된 특히 또 절기와 관련된 것도 마찬가지죠.
그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속재 사역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통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실 그 구속에 관한 사역을 이미 성경은 말씀해 줬다는 거죠.
그리고 구약의 역사 속에서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련된 예표들이 장차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그 구속에 관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그 구약에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그 제사 제도를 하나님이 주셨을 때 그 제도에 따라서 제사 드리기도 바빠요.
그것을 뭐 나중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뭔가까지 생각할 그 정도까지 계시가 주어진 것도 아니고 그것을 충분하게 이해하기가 되게 어려운데, 그런데 그 속에서도 보면요.
다윗의 말씀 또 그 고백을 보면은 예수님이 장차 누군가가 오셔가지고 썩지 않고 음부에 들어가는데 서울로 떨어지는데 썩지 않는 어떤 그 누군가에 대해서 얘기를 해요.
시편 16편 10절 보면은요. 이게 이제 예수님을 이제 가리키는 건데 그런 어떤 깨달음이 이제 계시를 통해서 주어지는 거죠.
그런 것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구속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 실제로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내지시는 그 순간까지도 그 당시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도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그 사역을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광에 대한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훨씬 더 많았던 그런 이스라엘 그 당시의 사람들의 반응을 보게 되는데 그때의 모습을 보면은 이제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맞나 싶은 그 시대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는 그런 면이 있는데요.
실제로 구약 시대에 게시된 그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을 우리가 잘 주의 깊게 들여다보게 되면 그 실제로 장차 올 메시아가 고난받는 메시아로 온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죠.
그래서 이사야서 같은 경우는 아주 분명하게 장차 오실 메시아가 고난받는 메시아라고 잘 기록이 돼 있어요.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사실 고난 받으리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볼 때는 좀 이상해요.
왜냐하면 이사야서 같은 말씀을 보면 53장에 그 고난받는 메시아는 그는 실로 이제 우리의 질고를 지고 하면서 그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좀 기술해 나가거든요.
또 시편 22편에도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단 말이에요.
그래서 장차 올 메시아는 고난의 종으로 이 땅에 오시는데 그 고난의 과정을 왜 거치시는가에 대해서도 이렇게 게시되어 있거든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 메시아는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이렇게 잘 게시돼 있는데 예수님의 시대에 대부분의 이제 그 종교인들이 그 부분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그 시대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시대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죠.
그러니까 참된 신앙이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보이지 않았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서도 뭐예요? 예수님 시대에 제자들 같은 경우는 그렇죠.
종교 지도자들하고 비교하면 성경에 관한 어떤 지식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따라다니면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어떻게 왜 오셨는지에 대해서 서서히 눈을 떠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처음에 이제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 사역을 시작하고 한 3년 정도 사역을 하시는데요.
그 3년 내내 이제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제자들이 많은 이제 고난을 받아요.
같이 제자들은 그런데 마음속에 어떤 것이 계속 있었냐면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드디어 임금으로 등극하셔가지고요.
자기들은 그 주님이 다스리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한 그런 통치자로 서게 되고 자기들 그 통치자와 함께 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을 다스릴 꿈을 꿨던 사람들이에요.
제자들이 그때 제자들에게 한 두 가지의 그 지식이 있어요.
하나는 그것은 계속 그것은 있을 것 같고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많은 말씀 속에는 뭔가 우리 주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그렇죠.
그렇게 뭔가 이렇게 장차 왕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도 예수님 계속해서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그 지식도 갖고 있는 거거든요.
근데 이 지식이 어떻게 이렇게 통합될 수 있는지 자기들은 이제 그게 이해가 되지 않는 거죠.
통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이쪽보다는 뭐예요?
권한 받고 장사 지내서 장사 지내는 바 되는 그 주님의 말씀은 듣고 분명히 주님께서 나는 고난 받고 장사되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까지 얘기했거든요.
그런데도 십자가에 체포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까지 그 말씀을 이렇게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그걸 보면은 제자들도 그 한계를 보이게 되는데요.
그 통치자가 될 왕이 되실 메시아에 대한 자기들의 어떤 꿈 그것을 끝까지 붙들고 갔던 그 제자들의 모습도 보게 되는데 어쨌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이렇게 다 부활하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비교적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게 돼요.
그렇죠 그래서 어 그 우리 주님께서 성경대로 죽으시옵고 그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몇몇 참된 신자들은 그것을 믿었고 또 그 믿은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제 우리는 초대 교회가 상당히 빠르게 확산되고 형성되어져 가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빌라도의 최종적 재판 과 함께 죽으시고 그리고 장사 지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그 역사적 사건은 우리가 이제 확인하게 되고 그것은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래도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것을 우리처럼 해석은 하지 않더라도요.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 존재하셨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고 하는 누나 이제 장사 지냈다가 부활한 그 사건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부활에 관한 자기들의 만의 설을 갖고 있는 거죠.
그러나 십자가에 죽은 그 역사적 사건을 분명하게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사건이 우리 교회에 주고자 하는 그 의미가 뭔지를 우리는 끝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고요.
우리가 그 부분에 대해서 이제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배우게 되는데 성경에 우리가 사도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그 모든 권면들 있지 않습니까?
그 겉면들을 잘 이렇게 들여다보게 되면 그 근면들이 결국 뭐냐 하면 우리를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끄는 건면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특히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게 될 때 어떤 말씀이든지 그 말씀을 우리가 깊이 묵상하고 그 근원을 잘 거슬러서 이렇게 들어가게 되면은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이 부활로 다시 돌아가게 되고 그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은 어떤 그런 문제 속에서 자신을 다시 어떻게 이제 바라보고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가야 되는가 하는 거기에 대한 답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해서 딱 생각하면 그 답이 쉽게 딱 이렇게 드러나게 돼요.
그런데 그 부분을 우리가 놓치게 되면은 이게 이제 그냥 막 복잡해집니다.
복잡해지고 뭔가 답을 이렇게 주는데 실제로 그 답이 근원적인 대안이 되지 않고 어떤 문제가 하나 해결되는 것 같으면 또 이 문제가 또 등장 또 새로운 문제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교회 속에서 사실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이렇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생각할 때 이겁니다.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이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증인이 되라 이렇게 얘기하세요.
죽을고 부활한 그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하는데 그 증인이 되라는 것은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해 주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삶으로 구현해 내라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이렇게 복음서를 따라서 쭉 읽다 보면은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이 나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이렇게 얘기하면 그게 이해가 돼요.
그래서 우리도 그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 하면은 나도 그리스도처럼 집착하여 죽고 부활하고 죽고 부활하는 그 삶을 실질적으로 드러내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돼야 된다고 하는 그 결론이 이렇게 탁 도달하게 되는데 우리가 이 단순한 것을 너무 지금 좀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뭐냐 하면은 십자가 그러니까 이제 생명을 주시고 자녀 되게 해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을 상속받도록 이렇게 해 주시잖아요.
예수님의 그 부활 때문에 그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 주님께서 주신 이유가 뭐냐 하면 십자가를 지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게 이제 복음의 아주 중요한 핵심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 우리가 명확하게 알고 그렇죠.
그리고 우리가 그 십자가의 주님을 믿고 믿고 그 부활의 능력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인데 그 부활의 능력을 의지해서 사는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를 지는 거라는 거죠.
그냥 이렇게 좀 더 헌신해야 된다 하는 이 정도 차원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지신 그 생활을요 지는 그 삶을 향해서 계속해서 가야 돼요.
왜 우리 처음에는 이제 십자가가 조그마해요. 작은 십자가를 지는데요.
나중에는 어떤 십자가냐면요. 주님이 지셨던 그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예수님이 못 박혀서 피 흘리서 돌아가시잖아요.
그것이 내 삶을 통해서 표현되도록 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그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적어도 사도들과 사도 바울까지 해서요.
또 초대교회에 우리 사도들의 제자들 같은 경우에 보면요.
그 삶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전부 예수님이 가셨던 그 고난을 자기들의 삶으로 따랐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 그래서 피 흘려 돌아가신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들 순교의 피를 흘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들이 증인 되어야 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도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교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전체적으로 무엇을 표현해 내야 되냐면 각각의 사람들이 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고난 받고 죽으라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 교회 전체가 끊임없이 뭘 붙들고 표현해 내야 되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표현해 내야 된다는 거죠.
그것을 가르치고 우리 교회 전체가 그 삶을 향해서 이렇게 좋아 그때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 부활의 부활 생명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필요해요.
그 부활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그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 십자가의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속에 그 십자가의 복음이 제대로 이렇게 가르치지지 않으면 결국 뭐냐 하면 그 십자가를 지는 그 삶을 우리 교회는 살아내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것을 못 살기 때문에 우리 교회들이 그것에 어떤 대체하는 거잖아요.
십자가를 지는 삶을 대체하는 뭔가 또 다른 그 삶을 그리고 그것을 하도록 하도록 그걸 향해 가도록 그게 이제 구약에 말하는 뭐냐 하면요.
평안하다 평안하다 이렇게 하면 그 복음을 전했던 그 모습하고 비슷해요.
그러니까 우리 교회들이 그런 요소들이 많이 지금 들어와 있는데 우리 교회 속에도 물론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계속 배워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부활의 그 능력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것, 그것이 주님이 가셨던 그 고난의 길을 우리도 같이 가게 하는 그 사명이죠.
사명을 위해서 주셨다고 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잘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 복음에 대해서 계속해서 배워가는 그런 은혜가 우리 속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에 관한 사도바울의 메시지를 다시 생각하고 우리 오늘날 우리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복음의 더위에 참으로 굳게 서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부활의 복음을 우리가 먼저 잘 배워가게 해 주시고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이 놀라운 은총을 저희가 굳게 붙들 수 있게 해 주시고 주님의 그 은혜와 능력을 저희가 의지하여서 주께서 우리로 끊임없이 십자가로 초청하시는데 그 십자가의 삶을 향하여서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 속에 그 거룩한 삶을 향한 거룩한 소원이 우리 세상을 교회 속에 충만케 하여 주시옵시고, 주님, 저희가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주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우리 속에 충만히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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