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614말씀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여호수아 6장 1-21절)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6장 1절부터 21절까지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장 1절부터 21절까지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 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12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3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14 그 둘째 날에도 그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15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주님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이 사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여리고성 전투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 가나안 땅에 이제 들어가게 되면서 첫 번째 치르게 되는 전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만나를 매일 거두면서 또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로 40년 동안 훈련되어졌고요.
그 과정전이 다 지나서 하나님께서 이제 40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제 동편 그렇죠 요단 동편 시팀이라는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진을 치면서 거기서 여리고성을 공략하기 위해서 정탐꾼을 2명을 이렇게 보내게 되고 정탐꾼이 돌아와서 우리가 볼 때 그들은 우리로 인해서 벌벌 떨더라 간담이 서늘해 하더라 하고 이제 보고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38년 전에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꾼 12명을 보냈을 때 그들이 보였던 반응과 이제 38년이 지난 후에 다시 시 팀에서 그들의 정탐꾼을 보냈을 때 보였던 그 반응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하는 것을 지난주에 우리가 좀 생각을 해 봤었습니다.
그래서 어 정탐꾼이 들어 이제 돌아와서 어 우리가 이 가 헤리쿠 섬을 충분히 이제 공략할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이 사실 주어지는 거죠.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여리고성 점령이 이제 앞으로 있게 되는데 그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서 먼저 어떤 일을 큰 이적을 경험하느냐 하면은 요단 강을 이렇게 건너가는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과거 사
3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던 그런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 홍해를 모세와 함께 건넜던 그 역사가 거의 재현되는 것 같은 그런 사건을 한 번 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제 그것과 조금 스케일이 다르긴 한데요. 어쨌든 요단 강 같은 경우는 평상시에는 강이 물이 많지 않고 그냥 일반적으로 그냥 보통 이제 어른들 같으면 그냥 이렇게 걸어서 다 갈 수 있는 그런 물인데요.
이게 이제 비가 많이 오는 그런 계절이 되면은 그 강이 이렇게 범람하면서 큰 강이 되게 되는데 이때는 아마 그냥 이렇게 건너갈 수 있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비가 많이 아마 와서 그 강에 물이 가득한 그래서 물이 그야말로 한 번 더 갈라져야지 지나갈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이제 요단강을 앞에 두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 요단강을 이제 건너 갈 때 그 요단강을 너희가 마른 땅같이 건너가게 할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어 언약궤를 이제 어깨에 짊어지고 발을 탁 내딛었을 때 그렇죠 그때 요단강이 이렇게 쫙 갈라지는 그 광경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40년 전에는 모세를 통해서 이제 홍이가 이렇게 갈라지는 일이 있게 되는데 지금은 모세는 돌아가셨고요.
그렇죠 이제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해서 요단강을 건너가게 되는데 그 건너갈 때는 제사장들이 가장 이렇게 먼저 앞서서 가게 되는데 제사장들이 간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맺고 있는 언약의 그렇죠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언약계다 그러면 언약궤 자체가 그들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나중에 성막이 이렇게 세워지게 되면은 그 성막 지성소에 언약궤가 이렇게 안치가 되게 되는데요.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는 하나님의 발등상이다 이렇게 부르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발등상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해 계신다고 하는 그렇게 표현하는 거죠.
그렇죠 이제 언약 이외에 하나님이 이렇게 다 계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제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계시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 그렇게 표현하면서 이 신인동형론적인 그런 표현이죠.
그렇게 표현하면서 하나님이 그 언약궤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표현했는데 그 언약궤를 이제 짊어지고 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전쟁에서 가장 앞서서 마치 이제 사령관이 제일 앞에서 막 말을 타고 달리는 그런 모습을 연상케 하는 거죠.
제일 앞서서 가시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되고 그 제사장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그렇죠 앞서서 이렇게 쭉 건너가시는데 나중에 이렇게 보게 되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이 하나님의 큰 은혜로 말미암아 갈라진 것을 그래서 그것을 마른 땅 건너가듯이 건너간 것을 기념하면서 그 강의 가운데에 돌을 이렇게 세워서 기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학자들마다 약간 견해가 조금 다른데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에서 큰 돌을 취해서 그러니까 지파마다 돌을 하나씩 가져오게 하거든요.
취해서 그 돌을 나중에 요단강을 건너서 길가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 길 갈 땅
도를 세웠다고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호수아 말씀을 이렇게 보게 되면 그곳에만 세운 것이 아니고 요단 강을 이렇게 건너갈 갈 때 그 강 가운데도 12개의 돌을 세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게 두 곳에 세웠는지 아니면은 요단 강에서 그냥 돌을 갖고 와서 그 길가에 세웠는지 이걸 약간 헷갈려 하는데 대체로는 두 곳에 세웠다 그래서 한 곳은 뭐냐 하면은 요단 강에 이제 세워서 만약에 물이 다시 이렇게 범람하게 되면은 그 돌은 보이지 않는 거죠.
그곳에 세웠고 또 길가에 세웠다고 우리가 생각해 보면 되는데 그 요단강을 그렇게 큰 은혜 속에 건너간 후에 길가에 이렇게 진을 치면서 이제 당 여리고성을 본격적으로 공략을 하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이 여리고성을 이들이 길가에서 어떻게 이렇게 공략하려고 하는지를 한번 이렇게 들여다보면은 어 여기에서 우리가 이제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 메시지 교훈을 찾아보게 되는데요.
오늘 제가 좀 생각해 보려고 하는 바는 뭐냐 하면은 우리 지금 이렇게 예배드리지 않습니까?
이 예배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를 한번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려고 그러는 겁니다.
지금 이들이 그 요리 고성 그렇죠 을 공략하기 위해서 그 전투 앞에 이렇게 놓여져 있는 그 상황과 지금 이제 우리가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이 지금 상황이나 사실은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라는 거죠. 우리도 여전히 이곳에서 그런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인 거죠.
긴장하게 하는 그런 상황이거든요. 전투 앞에 놓여있기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 하는 어떤 그 문제와 맞닥뜨려야 되는 거거든요.
근데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도 사실은 그런 현장입니다.
네 영적인 전투 앞에 놓여져 있고 어떤 면에서는 그 전투 현장 가운데 있는 것이고 거기서 어떤 면에서는 승리와 실패가 이렇게 갈라질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우리 예배의 자리다 하는 것을 한번 잘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잘 너무나 분명하게 확인을 하게 돼요.
그러니까 모든 이스라엘 전쟁사 전쟁사만 보더라도 그 전쟁사들이 보면 그렇죠.
다 뭐와 연결이 되어 있냐 하면은 기본적으로 뭐냐 하면 다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단독으로 그렇죠. 하나님과 어떤 무관하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그냥 본인들이 이렇게 판단해 가지고 이렇게 막 전쟁하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 경우는 주로 어떤 경우냐 하면 불순종할 때 그런 모습이 나타나요.
하나님의 뜻에 이들이 기본적으로 잘 순종하고 있을 때는 항상 어떤 모습이 나타나냐 하면 그들이 전쟁할 때뿐만 아니라 실제로 가나안에 나중에 들어가서 이렇게 먹고 사는 그 과정에서도 항상 뭐냐 하면 자신들의 그 모든 삶과 그 삶의 행위 그 모든 것들이 항상 하나님과 연결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데요.
그 하나님께서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항상 하나님이 원하는 어떤 태도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 태도는 뭐냐 하면 너희가 나를 잘 믿고 의지하는 그 신앙의 상태 속에 있어라 하는 거죠.
그런데 그 잘 믿고 그렇죠. 하나님 앞에 잘 서 있는 그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이 관계 속에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원하는 온전한 그 예배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온전한 그 예배의 자리를 하나님이 요구한다는 걸 알 수 있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 이제 예배와 예배를 중심으로 해서 그렇죠.
하나님의 놀라운 승리를 계속해서 펼쳐 가세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그 가장 영적으로 어두웠다고 할 수 있는 시대가 어 히스기야 시대인 거거든요.
그 이전에 아버지 시대 때 그 남 유다가 완전히 신앙이 이제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최고로 바닥으로 떨어진 거죠. 그리고 나중에 언제 또 떨어지냐면은 요시야 왕이 등극하기 전에 또 그래요.
그때도 그러고 히스기야 시대 이전에도 이제 그런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때 어 이스라엘이 국제적으로는 대단히 큰 어려움 가운데 있게 되죠.
특히 히스기야 시대 때에 그 시대에는 아수로가 세계 최강대국이었고 아수로에 의해서 이미 북 이스라엘은 멸망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앗수르가 남유다까지 삼키려고 하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 산해리비 100만 몇 만이죠.
산해리비 대군을 이끌고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이제 공략해 들어오게 되는데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줘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군사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산해리의 그 전 군대가 다 진멸되게 되거든요.
근데 그때 어떤 일이 발생하 있었냐면은 히스기야 시대 때에 그가 왕으로 등극하면서 뭐가 회복이 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이 드려야 되는 그 예배가 회복이 돼요.
그게 핵심입니다. 절기 회복이 돼요. 이게 다 즐기는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 그 예배의 중심이거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에 다 모여가지고 뭐 하냐 하면 제사 드리고 이렇게 하는 모든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거거든요.
그 절기에서 그래서 그 절기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그 대표적인 은혜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거를 기억을 하고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면 우리는 그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가가 저절로 답이 나오는 건데요.
그게 뭐냐 하면은 그렇게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생각하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렇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감사하고 찬양하는 그 노래를 올려드릴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그것을 절기를 보내면서 계속해서 회복하는 거예요.
가장 중요한 구원의 은혜들을 회복하는 거거든요.
회복해서 그것이 이제 그들이 절개를 마치고 돌아가면 그 일상의 삶 속에서 이제 그 지역에 있는 제사장들과 또 장로들을 중심으로 해서 서로 이렇게 말씀을 배워가고 때로는 예배를 드리는 그 모습을 지속해 가는 거거든요.
이스라엘 백성들 그 절기를 중심으로 해서 결국은 어떤 공동체냐 하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거든요.
그 예배하는 공동체 가 이렇게 깨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망하는 겁니다.
예배가 깨지면 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히스기야 아버지 시대 때 이미 그런 부분들이 다 망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서 우상을 예배하는 삶으로 그들이 신앙이 완전히 뒤바뀌어진 거죠.
그것을 이제 히스기야가 보고 분노하면서 우상을 이제 척결을 하는 그 종교적 갱신을 이루고 그 일이 요시아 시대 때도 다시 한 번 더 이제 일어나게 되는데 그 갱신이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면서 그 갱신의 중심에 히스기야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아수로의 그 대군이 처음 침략했을 때 하나님께서 결국은 뭐냐 하면 히스기야의 기도를 받으면서 어 이렇게 탁 물리치는데 그냥 히스기야가 기도 간절히 했기 때문에 응답해 주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긴 하죠. 그런데 그 이전에 거국적인 종교 개혁이 이미 단행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히스기야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 그렇죠 예배 공동체로 회복된 것을 보면서 승리를 주시는 거거든요.
근데 이게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항상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무엘 시대 때도 보면은 엘리 대제장 시대 때에 블레셋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굉장히 괴롭힘을 당하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사무엘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종교적인 갱신을 이루고요.
사무엘이 한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한테 돌아다니면서 성경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그래서 그들이 예배의 삶이 다시 회복되도록 하는 그 일을 해요.
그리 나중에 한 20년 정도 이제 블레셋과의 전쟁 이후에 20년 정도 지나서 이들이 나중에 미스바에서 이렇게 모이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사무엘 상 7장에 보면 나오거든요. 거기서 보면은 이제 어떤 표현이 나오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블레셋의 블레셋으로 인한 그 고통이죠.
그러면서 그들이 마음이 막 가난해져 가지고 이제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그 모습이 나타나요.
그때 거기에서 이제 사무엘이 너희들의 그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그들이 회개하고 이렇게 막 물을 붓는 그런 장면들이 나오거든요.
우리 회개합니다 하면서 그 회개를 딱 받으시고 하나님이 뭘 베푸시냐면은 그때 대성회를 하고 있는데 블레셋이 침공을 하는 거거든요.
그러고 있는데 그때 얼마나 위험해요 다 모여가지고 그렇죠 집회를 하고 있는 거거든요.
전투 준비하는 게 아니고 그런데 그때 이렇게 쳐들어오거든요.
그것을 하나님이 허용하신 거거든요. 왜 허용을 하셨는데 그 가장 전쟁에서 이기기 힘든 상황이거든요.
과거에 언약궤를 메고 전투하러 나갈 때는 전투하려고 그러고 나간 거예요.
군대를 채비를 해서 간 건데 지금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 그때 큰 자연 어떤 이적을 사용하셔가지고 블레셋 군대를 대파시키거든요.
그 장면에서도 잘 드러나는 거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항상 뭘 요구하시는가 하는 것이 그런 사건에서 잘 나타나요.
우리가 하나님께 이제 예배드린다고 하면은 예배드린다고 하면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찬양 부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요.
회개하는 것 하나님을 부르는 거 그렇죠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거 또 기도하는 거죠.
이런 것이 다 이렇게 포함된 그리고 하나님 앞에 번제를 올려드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죠 우리는 이제 그것을 뭘로 표현하냐면 본문을 올려드리면서 표현을 해요.
봉은 올려드리면서 봉은만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고 이제 우리는 구약 시대도 물론 그렇지만 구약 시대보다 훨씬 더 뭘 인식하고 드리냐 하면은 우리의 생명 자체를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재물로 올려드리는 거거든요.
항상 매주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이 포함되어진 이스라엘의 삶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어떤 삶이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 맺으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민족으로 부르셨다고 하는 것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불러서요.
그들은 뭘 하려고 뭘 하는 사람들을 불러내느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로 불렀다는 것을 우리가 잘 확인하고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이제 중요한 정체성이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냐 예배하는 사람들 그 예배하는 사람들로 우리가 서 있으면서 그 예배하는 자리에서 사실 우리는 뭘 하냐면요.
모든 것을 다 해요. 예배하면서 농사 짓고 예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사실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하는 거거든요.
전쟁하는 거예요.
예배하면서 모든 이제 먹고살아가는 삶을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이렇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그 삶이 뭘 중심으로 해서 구성이 돼 있냐면은 안식일을 중심으로 해서 딱 구성이 돼 있거든요.
그 안식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만 보내라고 이렇게 주신 날짜 날짜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그렇죠.
그 한 날을 다 바치라고 그것을 연습하라고 주신 날짜인데 그 안식일을 주신 것은 뭐냐 하면요.
안식일만 그렇게 살아라고 준 게 아니고 모든 날을 그렇게 사는 사람들로 너희가 앞으로 변화돼 가라고 이렇게 주신 겁니다.
다른 날도 이제 이렇게 살아가다가 이제 안식일날 이렇게 살면서 아 우리는 이런 예배를 드리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 있구나 우리 존재 자체가 그렇구나 하는 것을 그 안식일을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교육받는 거거든요.
그 교육이 반복되면서 그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우리 자신이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면서 나머지 6일도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로 계속해서 성장해 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7일을 주신 의도거든요.
7일 안식을 중심으로 한 이 7일을 주신 의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안식일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의 삶이 예배자의 삶이 되도록 하나님이 어 이렇게 디자인하셨다고 하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고 어 이스라엘의 제사장들 같은 경우에는 나중에 이제 성막과 성전에서 그 직무를 수행할 때 항상 뭐냐 하면요.
하나님 앞에 매일 번제를 드리도록 이렇게 명령하세요.
매일 번제를 상번죄라고 해 가지고 매일 아침과 저녁에 번제를 드리도록 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일상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살아서 있어야 된다는 것을 사실 아주 분명하게 그것을 통해서 선포하세요.
그게 제사장들만 예배드리는 사람들로 살아가라고 이렇게 한 게 아니거든요.
제사장들은 뭐냐 하면은 요렇게 너희는 살아야 된다고 모델로 본받으라고 이렇게 대표자들로 세워주신 거거든요.
우리 직분을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시대에 직분은 특별하게 이렇게 그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구별을 하셨죠 근데 그렇게 하신 가장 큰 이유는 뭐냐 하면 집사와 장로 또 장로 중에서 가르치는 장로 목사 장로죠 를 도와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삼중직이라고 하는 거죠.
그리스도의 삼중직이 있습니다. 제사장직 왕직 그다음에 선지자 직 이게 이제 삼중직인데요.
그 사역이 직분자들을 통해서 먼저 표현이 잘 돼야 되는 거예요.
표현이 잘 되고 나머지 분들은 그 직분자들이 이렇게 잘 보면서 전체 교 교회가 그런 모습이 잘 나타나고 또 우리 개개인의 신앙도 그렇게 이렇게 나타나도록 사실은 의도되어졌다고 하는 것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이제 좀 생각을 해보려고 하는데 이 예배 적 어떤 모습이 이 여리고성 이 전투 속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한번 확인해 보려고 그러는 겁니다.
우리가 이제 쭉 읽으면서 금방 확인이 다 됐지 않습니까?
말씀을 안 드려도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이제 공략을 하게 되는데 그 공략할 때 하나님이 이렇게 자세하게 명령을 해 주십니다.
여리고성을 이제 공략하는데 너희가 맨 먼저 앞에 군대가 그렇죠 이제 무장한 군인이 제일 앞에 딱 서고 그다음에 언약궤가 가운데 있고 그 뒤에 또 군인이 쭉 줄 서는 그러니까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의 전체 가운데 딱 서는 어떤 그런 구조에 좀 가깝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마 군대가 이렇게 반반이 반반으로 이렇게 나눈 거는 아닌 것 같고 이제 정의 군사들을 앞에 이렇게 두고 그다음에 언약궤가 두고 나머지 분들은 이제 제 뒤에 쭉 서 있는 그런 어떤 구조 일 텐데요.
길가에 진을 딱 친 상태에서 이것을 이 전쟁을 수행할 때 이제 7일간 수행을 하게 되는데 그 진영을 갖추어서 6일 동안 17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이렇게 돌고 오라는 겁니다.
그냥 간단해요. 한 바퀴만 돌고 오라. 그때 어떻게 행진을 하냐면은 이제 언약궤를 짊어지고 가야 되고요.
또 언약궤에 앞서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각각 아마 한 명당 1개의 양강 나포를 진이고 이제 출발할 때 아마 양강 나팔을 불렀겠죠 가자 하고 불고 또 아마 행진하면서 여기 보면요.
읽어보면은 계속해서 나팔을 불렀다 하는 것을 볼 때 아마 어 계속해서 나팔을 불렀을 것 같아요.
어떻게 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팔을 계속해서 불고 이렇게 행진해서 한 바퀴를 이렇게 돌고 오는데 이게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이 전쟁을 7일 동안 수행을 하세요.
그냥 하루 만에 전령하실 수 있는 분이세요. 이렇게 지금 이 역사를 보면요.
하나님이 하루 만에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신 거 분명해요.
그런데 그렇게 안 하세요. 7일 동안 딱 채워서 이거를 하는 것도 대단히 의미가 있는 거죠.
6일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돌기만 한 돌 때 나팔 소리는 들리는데 너희가 뭘 하지 말라고 하냐면은 너희들끼리 떠들고 시끄럽게 하지 마라 이래저래 무슨 말 하지 마라는 거예요.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고 입 딱 다물고 그냥 성벽을 이렇게 한 번 돌게만 하라는 거예요.
근데 이게 이제 이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 어떤 일이 사실 먼저 있었냐면은 길가에서 이 사람들이 할례를 행하는 일이 먼저 있었어요.
길가에서 그러니까 광야 생활 동안에 그들이 할례를 제대로 하나님 앞에 준수하지 못한 이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 맺은 언약의 백성인데 그들이 할 일을 아직까지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그 언약 관계가 이렇게 공식적으로 마무리가 덜 된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는 할례거든요.
그 할례를 행하면서 그들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이렇게 확인이 말하자면 인준이 되는 거거든요.
체결이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보호 속에 살기는 살았는데 본인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 속에서 행해야 되는 의무를 준수하지 않았던 그 일이 이제 지적이 됐고 그 계기에서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할례를 행하게 되면은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네 전쟁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이 상황에서는 할례를 할 상황이 아니에요.
전쟁하려고 지금 딱 있고 저쪽에서 도 있잖아요. 이 이스라엘 군인이 자기들을 언제든지 침공해 들어올 거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보면 여기서도 열리곱성의 왕과 용사들이 문을 굳게 잠그고 그 안에서 탁 방비를 하고 있는 거거든요.
예 이제 그렇게 하면은 어떤 식으로 방비하냐면은 그 성 밖에서 막 농사 짓고 하던 분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분들이 성 안으로 다 들어오세요.
그렇죠 다 들어오셔서 이제 그 안에서 곡식을 이렇게 확 비축하고 거기에서 장기적으로 이제 수성전 있잖아요.
전쟁할 준비를 딱 하고 이렇게 딱 있는 거거든요. 물론 그 열구성은 큰 성은 아닙니다.
아마 지름으로 따지면은 한 250미터에서 300미터 정도 되는 운동장 한 2개 정도 크기의 성밖에 안 돼요.
실질적으로는 그러니까 한 바퀴 돌면 한 70 800미터밖에 되지 않는 그런 이제 곳이어서요.
조그마한 성이기 때문에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군이지 않습니까?
벌써 대군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렇게 염려하지 않고 할례를 행할 수 있는 그런 면도 있긴 있는데 어쨌든 그 상황 자체가 전략적으로는 좀 좋은 거는 아니죠.
그런데 하나님이 할례를 거기서 행하게 하시는데 거기에 순종을 하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만이 없어야 되거든요.
왜 지금 할례를 하려고 그러냐 하고 막 불만을 품게 되고 그러면은 여호수아의 지도력이 흔들리게 돼요.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전략적으로 저렇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그런 선택을 하는 여호수아의 그 리더십이 흔들리는 그게 사실 이제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어 얼마든지 그런 상황이 펼쳐질 수 있는데 그 명령을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면요.
그 명령에 잘 순종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무도 토를 안 달아요.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해서 막 이렇게 할례를 행하고 그 이스라엘 이제 군대의 모습을 보면은 여리고성을 점령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점령할 수 있는 신앙적 준비가 잘 갖춰져 있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 어떤 그들의 신앙적 상태 속에서 이 에르고성 이제 점령이 수행되게 되는데 6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같이 이렇게 하면서 돌게 됩니다.
그러니까 많은 군인이 이렇게 돌게 되는데 그것도 조용히 하면서 아무 말하지 않고 그냥 나팔 소리만 간간히 들리면서 그걸 돌아설 것 같은데요.
안에 있던 유리고성 주민들과 군인들은 굉장히 정말 간단히 서늘했던 것 같아요.
아무 말 안 하고 나팔 소리만 돌면서 울면서 이게 들리면서 그들이 계속해서 행진만 하는 것을 봤을 때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그들에게 훨씬 더 두려운 모습일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공성전을 펼치기 위해서 뭔가 이렇게 장비를 준비하고 그렇죠 거기에 맞는 군인을 이렇게 배치하고 진을 짜고 그러면은 이제 자기들도 거기에 맞춰서 그냥 여기서 싸우다 죽자 하면서 그렇게 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언약궤를 메고 그렇죠 조용히 이렇게 자기들 성을 계속해서 한 바퀴 돌 때 그다음 날 또 한 바퀴 돌 때 그 마음에 그 공포감이 엄청 났을 것 같아요.
오히려 그리고 마지막 일곱 째 날에 하나님이 일곱 바퀴를 이렇게 돌게 합니다.
다 일곱 바퀴 돌면 한 전체가 한 60,700 700m 정도 잡았을 때 한 5kg 정도 되죠 그렇죠 그러니까 한 1시간 그래서 2시간 그 사이 천천히 돌았으니까 한 2시간 잡고 그렇죠 한 2시간 동안 그때는 막 계속 도는 거예요.
천천히 도는 거죠. 그러고 나서 이제 그 명령 여호수아가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그런 때에 이제 외치라고 하는데 보면은 그 말씀이 어디에 나오죠?
20절 읽어보겠습니다. 이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러니까 나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와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 번 딱 외쳤는데 그게 쫙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외치는 것은 어떤 성격이 강하냐 하면은 어떤 면에서는 이제 승리의 함성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승리의 함성 그러니까 아직 전쟁하지도 않았는데 일곱 바퀴 탁 돌고 그들이 어떤 함성을 지르냐면 우리 승리의 함성 팍 그리고 함성을 탁 치르면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이제 순간에도 전체가 이렇게 하나 되어져 있는 그런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지금 어떤 점에서 하나로 이렇게 움직이냐 하면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하나 되어져 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하신 명령 있지 않습니까?
하루에 한 바퀴 돌고 마지막 날에 일곱 바퀴 돌고 외쳐라 그 하나님의 명령을 중심으로 해서 온전히 이렇게 환화되어 있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그런 모습이죠.
하나님 앞에 이 예배자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되는 아주 중요한 자질 중에 하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릴 때도 이 예배 속에 어떤 요소가 가장 사실은 중요하냐면은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그 순종으로서의 예배여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예배드리도록 내신 하나님의 그 방도들이 있어요.
방도들이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대로 막 예배하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이 내신 예배의 그 방도를 따라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 과거에 이제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참된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하는 것을 많이 고민하면서 이 예배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된다 그렇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되고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예배여야 된다는 것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을 기념하는 예배여야 된다 하는 것을 아주 이제 강조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모든 은혜를 중심으로 해서 사실 이게 생겨난 게 우리 교회거든요.
교회고 그 교회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계속해서 기념하면 기념한다고 하는 그 점에서 먼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공동체여야 되고 그리고 우리의 예배는 뭐냐 하면요.
사미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입니다. 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하나님께 드려져야 되는 예배가 우리의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3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우리 이제 믿음의 선배들이 예배드릴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 이렇게 기도 하는 것도 그 예배 속의 한 요소이긴 한데요.
그러다 보니까 어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배드릴 때 3위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생각은 다 하는데 실제로 우리의 내면에는 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가운데서 예배드리는 경우가 많거든요.
성주로는 성부 하나님만 생각해요. 성부 하나님만 생각하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드리는데 옆에서 이제 이렇게 뭔가 도와주시는 분이고요.
성자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는 사람으로 서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신 분 이 정도로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리는데요.
그런 것은 물론 다 포함돼야 되지만 그 귀에서 멈추면 안 되는 거죠.
부족한 거죠. 그래서 성자와 성령 하나님도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신 동일 본질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잘 인식하면서 우리는 이 예배드릴 때 사위 하나님께 경배를 올려드리는 모습이 잘 표현이 돼야 됩니다.
형식적으로도 표현돼야 되고요. 우리 이제 개개인이 그 사위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잘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우리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지 않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 또 우리 하나님은 동일 본질의 하나님 그 삼위일체 속에 들어가 있는 의미인데요.
동일 본질의 한 분 하나님이시다고 하는 것을 최대한 우리가 이해하면서 동시에 뭐냐 하면요.
어 우리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신데 그 각각의 그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이루신 그 사역을 다 이렇게 구분해서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 사미가 하나님이 항상 함께 사역하셨는데 그 사이 하나님이 사역적으로 주도적으로 이렇게 감당하신 것들은 또 다르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도 분리해서 이해하면서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우리가 최대한 이해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 경배를 드릴 때 그래서 찬양을 올려드릴 때 우리의 모든 찬양은 항상 사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이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 이제 예배 때에 우리 교회는 이렇게 우리 장로님 중심으로 해가지고 그렇죠 찬양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지 않습니까?
경배와 찬양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네 우리 이제 우리 장로교회에서 이렇게 그것을 하지 않고 보통은 이제 찬송가를 중심으로 해서 예배를 이렇게 드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이렇게 좀 생각을 해 봐야 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이것을 잘 이해를 잘 못하시는 분들이 또 많습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뭐냐 하면 우리 찬송가는 다 옛날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불렀던 그런 찬송가 찬양들입니다.
모든 찬송들이 다 그래 그런데 우리 이제 찬송가의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데 적절한 찬송가가 있고요.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계속하고 그렇죠 함께 이렇게 참여하기 위해서 부르는 그런 찬송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 이제 우리가 예배드릴 때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 하나님의 께서 경배받으셔야 하는 그런 부분을 우리가 찬송을 통해서 이렇게 잘 표현해 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 예배 속에 항상 어떤 것을 우리 과거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순서를 이렇게 넣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잘 서 있도록 도운 그 방식이 하나 있는데 우리 교회들이 요즘은 그 방법을 잘 쓰지 않는데 원래 우리 선배들은 예배 순서 속에서 이렇게 회개하는 시간을 거기에 뒀어요.
회개 이거 우리가 회개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게 찬양을 드릴 때 1차적으로 뭐냐 하면은 우리가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에 적절한 것을 다시 계속해서 찾아간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는 겁니다.
좋은 찬양 계속해서 지금도 우리 교회들은 새로운 찬양을 계속해서 작사 작곡해 나가야 돼요.
그래서 그것을 교회가 잘 사용할 수 있으면 너무 좋은데 우리가 어 아직까지 그것을 이렇게 탄력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 정도 유연성이 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잘 사용해야 돼요. 이 찬송가도요 잘 사용하지 않으면 찬송가만 사용한다고 다 이게 좋은 예배 더 좋은 어떤 내용이 아니다라는 거죠.
잘 사용해야 돼요. 우리도 그것을 잘 사용해서 이렇게 하려고 하고요.
완벽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경우에는 그 시간에 찬양을 드리면서 어떤 측면이 있냐면은요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기도하면서 회개하고 또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시간이 좀 우리는 길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이 좀 길게 우리가 찬양을 드리면서 가지는 그런 예배 우리가 드리고 있다.
이제 그 시간이 조금 이제 길어져서요.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성으로 이렇게 좀 더 구분해서 예배 드리는 그 부분을 우리가 조금 더 많이 가지면 좋을 것 같은데 지금 우리가 이제 예배를 한 1시간 한 20분에서 30분 정도 예배 드리거든요.
다른 교회들보다 한 30분 예배를 많이 길게 드리는 편입니다.
이렇게 짧게 하는 것 같은데 금방 가요.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보면 지금도 시간이 될 것 같아.
네 그래 이제 우리가 이제 나중에 여건이 되게 되면은 그런 부분들을 조금 더 보완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우리의 어떤 현재 형편 속에서 제가 판단할 때는 대단히 좋은 예배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고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거죠.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제 실질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면서 거두는 신앙적 효과를 또 따져보면요.
제가 개인적으로는 우리 사상을 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 이렇게 은혜를 많이 받으면서 회개를 이렇게 많이 하면서 예배드렸던 때가 잘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우리 언약 새세양교회에 와가지고 그것을 매주 이렇게 경험하면서 예배 그래서 개인적으로 우리 서봉기 장로님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왜 이제 저를 이렇게 신앙생활하면서 저에게 은혜를 많이 주신 분이 없어요.
사실은 그렇게 연애 말고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계속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갚도록 하겠습니다. 네 너무너무 감사해요.
그러니까 이런 이제 그 예배가 저만 그러는 건 아닐 것 같아요.
다 이제 그런 예배 속에서 은혜를 누리면서 우리가 예배드리는 그런 모습을 보기 보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우리 그렇게 예배드린 효과 또한 대단히 바람직한 모습이 나타난다고 하는 거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어서 너무 이제 감사한데요.
어쨌든 우리가 이제 이 사건을 한번 생각하면서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도 그런 영적 전투의 현장 속에 있는 것이고 우리가 이 예배를 통해서 뭐냐 하면 어 뭐냐 우리 삶이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과 어떤 그 관계 속에서 존재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그래서 이 예배를 통해서 아 이런 관계 속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존재해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계속해서 학습하고 배워가면서 또 참여하면서 그런 사람으로 나를 한 번씩 계속해서 훈련하면서 실제로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그 하나님과 나 사이의 그 관계가 그러한 관계에 좀 더 가깝도록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12장 그렇죠 1절에서 너희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그 이제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이제 우리 가운데 잘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여리고성에서뿐만 아니고 나중에 기회가 되신다고 하면은 성경 전체에서 특히 이스라엘이 전쟁과 관련해서 전쟁과 관련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때 그들이 어떤 자세로 그 일들을 수행했는지도 한번 이렇게 살펴보면서 최종적으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모든 삶 전쟁할 때뿐만 아니라 또 일상에서 경제적인 활동을 하면서 또 여러 가지 사회적인 활동을 하면서 다 결국은 뭐냐 하면 그 예배하는 자의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요구하셔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정상적이고 그렇죠 건강한 관계 속에 있다고 할 때 그 모습이 어떤 모습에 가장 가까우냐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예배하는 자의 그 모습의 가장 그 모습이 가장 가깝다는 가장 온전함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잘 생각하면서 그렇죠 그 모습이 우리 자신에게 또 우리 가정에 또 우리 교회 속에 잘 드러나는지를 살피고 또 그렇게 드러나도록 애를 쓰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속에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열일곱 점령 사건을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모습이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또 하나님과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살아가는 그 모습임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되고 이 여리고성 전투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역사 속에서 우리가 그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그 모습 일관성 있게 요구하셨다고 하는 것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우리 교회에도 주님께서 동일한 모습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줄로, 우리가 알아서 아버지 하나님, 저희가 이렇게 함께 예배드리고 주님 앞에 살아가면서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예배드리는 이 모습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먼저 우리 교회가 이것을 깊이 의식하고 그 방향을 향해서 잘 나아가게 해 주시고,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아가게 해 주시고, 그 경험을 또 의지하여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올려드리는 그 모습이 우리 가운데 충만히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배 > 말 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강하고 담대한 믿음 - 여호수아 1장 1-9절... 박주동 목사 (0) | 2026.06.09 |
|---|---|
| 역사하는 기도 •• 야고보서 5장 15-18절 • 박주동 목사 (0) | 2026.06.05 |
| 신자의 영적 전투 - 에베소서 6장 12 - 13절 • • • 박주동 목사 (0) | 2026.05.30 |
| 주를 경외하는 신앙 - 시편 25편 14절 • • • 박주동 목사 (0) | 2026.05.24 |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3절) ...박주동 목사 (0) | 2026.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