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531말씀 역사하는 기도 • 야고보서 5장 15-18절 •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야고보서 5장 15절부터 18절까지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5장 1 5절부터 18절까지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주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말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조금은 독특한 기도에 관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가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 다들 인정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믿죠 잘 믿는 분도 있고 좀 우리가 믿음이 충분치 못한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있는데요.
그런데 이 야고보서는 좀 똑똑한 가르침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너희가 기도하면은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들어주시는데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어떤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있는데 우리가 어떤 사람의 예를 들어서 그것을 한번 확인해 볼 수 있느냐 엘리아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구약의 그 엘리야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이적을 베풀어 주셨을 때는 그런 이적들은 기본적으로는 뭐냐 하면은 어 어떤 구속사적인 어떤 그 관점에서 그 이적들을 우리가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이적도 마찬가지이기는 한데요. 예수님의 이적은 뭐냐 하면은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어 뭐 사사들을 통해서도 또 모세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적을 많이 행하시는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장 이적을 많이 행했던 사람은 누구죠?
엘리사입니다. 엘리야가 아니고 엘리야의 사는 엘리아의 한 2배 정도의 이적을 행해요.
그래서 엘리사 같은 경우는 정말 그리스도를 예표할 만한 그런 분인데 구약의 그 모든 이적들은 장차 메시아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그 어떤 이적인데 그 이적은 어떤 이적이냐 메시아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한 요소를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한 나라의 한 어떤 측면을 메시아를 통해서 드러내게 되는데 구약의 그 이적도 그 메시아의를 통해서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한 성격을 보여준다는 거죠.
그래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와서 구약의 그 이적들이 다시 나타나고 특히 소경이 눈을 뜨는 이런 일들이 만약에 일어나게 된다면 그 사람은 메시아인 줄 알아라 하는 게 구약의 예언의 말씀들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의 이적은 구약의 하여튼 약속의 성취적 사건이고요.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이적은 예수님이 예수 메시아로 오셨다고 하는 것을 증언하는 어떤 그런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기본적인 거죠. 그래서 구약의 그 이적의 말씀도 장차 메시아를 통해서 도래하게 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가를 구약에서도 어렴풋이 이제 나타나고 있고 그 것이 특히 이적을 통해서 조금 더 이렇게 풍성하게 나타난 그런 측면이 있는데 그래서 우리가 이적을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그런 어떤 틀 속에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게 대단히 중요한 강조점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신학을 그런 큰 흐름 속에서 이제 이렇게 충분히 이렇게 배우고 나서 이 엘리야에 관한 야고보 선생 야고보 선생이라고 우리가 제가 그러죠.
사도는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말씀할 때 조금은 당황스럽습니다.
엘리아의 그 사건을 들어서 너희도 엘리야와 같이 기도하면 똑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하고 이렇게 딱 얘기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성취적 사건으로서 이적을 지금 야고보는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그 야고보가 기도하고 응답받은 그 이제 행위 그것만 가지고서 너희들도 동일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다 하고 얘기를 해 줍니다.
그리고 이제 그대로 우리가 이걸 믿어야 되는 거죠.
그것을 믿고 우리도 그래서 기도에 대한 능력을 그 기도의 능력을 믿게 될 때 어느 정도까지 우리가 믿어도 사실은 괜찮은가 일단은 뭐냐 하면은 엘리아가 기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그것이 너희 시대 그러니까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반복되어질 수 있는 그런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하는 것을 엘리 야고보는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이제 좀 이해하고 소화할 필요가 이제 있게 되는데요.
일단 우리가 이 야고보서를 를 조금 보게 되면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고요.
사도는 아닙니다. 야고보는 기도의 사람이라고 불릴 만한 불렸던 그런 사람이에요.
야고보가 기도를 많이 해서 그의 무릎이 낙타 무릎과 같이 되었다고 이렇게 전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기도를 야고보가 많이 했던 사람이고 또 야고보서 전체를 보면은 어 다른 어떤 서신보다도 기도에 대해서 많은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기도에 대해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야고보는 어떤 기도에 대한 강조점을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냐면 어 두 마음을 품고 기도하지 말아라라고 얘기하고 있죠.
그리고 너희가 4장에서도 어 너희가 어 얻지 못하면 4장 2절이죠 얻지 못하면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런 얘기도 해요. 그러니까 얻으려면 구하라 그러고요.
또 구하는데도 받지 못하는 것은 너희가 정욕으로 쏘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또 그런 얘기도 해주고 그리고 5장에 와서는 이제 기도하라 하고 성도들에게 권면하면서 기도하라 하고 권면하면서 그 너희의 기도는 어떤 성격이 있는가 하면서 엘리야에게까지 들려주게 됩니다.
기도에 관해서 야고보가 많이 교훈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되고요.
우리가 야고보서를 대할 때 하나 염두에 두고 이렇게 봐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야고보서는 바울의 서신서보다도 더 일찍 쓰여 졌다고 보는 서신이죠.
그러니까 에디 한 45년에서 50년 그 사이니까 대단히 이런 식이거든요.
바울의 저작들이 이제 50 60년에서 65년 그렇죠 55년에서 65년 아마 그 사이쯤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 어 상당히 이른 시기에 쓰여진 책이고요.
이 책이 야고보는 초대 예루살렘 공의회에 그러니까 오순절 있고 난 이후에 이제 사도들을 중심으로 해서 큰 교회가 형성되지 않습니까?
그 초대 교회 공의회의 우리로 말하면 이제 노예죠 노예 최초의 노회 총회라고도 할 수 있겠고 그렇죠 그 총회의 말하자면은 총회장입니다.
총회장이고요. 사도들이 어떤 서로 이렇게 약간씩 의견이 다를 때 문제를 총회에서 논의하게 되는데 그 전체적인 그 회의를 주관하고 때로는 의견을 이렇게 조율하고 바로잡고 그렇죠 최종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결론을 내자 하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회의를 주관하고 조율까지 하는 그런 리더십을 보여주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대단히 중요한 그 위치에 있었고요.
우리는 이제 사도적 권위 위에 우리 교회에 세워져 있는데 기본적으로 야고보에게서 그런 사도적 권위가 그 사도들에 의해서 이미 인정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야고보 같은 분은 이제 사도적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인정 하고요.
일단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야고보인데 예수님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거의 신앙이 없었던 것 같아요.
예수님이 이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나서 야고보에게 나타났다고 이제 고린도 서에 그렇죠 15장에 보면 나옵니다.
내 형제 야고보에게도 나타나고 그 외에 500여 형제들에게 나타났다 하고 이렇게 그래서 야고우가 그때 아마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눈을 뜨게 되고 내 동생이 동생이 아니고 나의 주님이라고 하는 것에 눈을 뜨게 된 거고 그러면서 초대 교회에 아주 지도적인 이제 리더십을 가진 그런 일꾼이 되게 됩니다.
그런 분이 이제 아고본인데 그래서 이 야고보 서신은 상당히 초기에 쓰여져 있어서 어떤 측면이 있냐 하면은 우리 교회의 대단히 이렇게 표준적인 가르침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어요.
우리는 이제 표준적인 가르침이 로마서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의 가르침이 표준적 가르침처럼 이렇게 생각해요.
당연히 표준적 가르침이죠. 그런데 우리가 야고보와 야고보와 바울을 이렇게 두 분을 놓고 이렇게 비교해서 보면은 우리가 이 바울의 야고보의 이 생각을 중심으로 해서 바울의 이 생각과 관점을 한번 바라봐야 될 필요성을 느끼게 해준다는 거죠.
야고보가 어떤 분이냐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보통은 반대로 생각해요.
특히 이제 우리 교회가 루터의 영향을 좀 받아가지고요.
루터가 야고보서를 좀 많이 이렇게 뒤로 젖혀 놓은 그런 책으로 다룬 면이 있거든요.
지푸라기 쓰신 것 같다 이렇게 얘기할 정도로 그러니까 야고보가 왜 이 서신을 루터가 좀 약간 좀 폄하했느냐 하면요.
자기가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 루터가 눈을 확 떴거든요.
그거는 맞아요. 그런데 야고보서를 보니까 계속 뭐냐 하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그래요.
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다고 그러고 그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 행함으로 구원받는다.
심지어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구원받았다 그래요.
그러니까 되게 당황스럽거든요. 이것을 그때는 충분히 이렇게 조율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실제로는 사실은 다 같은 말이거든요. 실제로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도 결국은 그걸 얘기해요.
야곱하고 똑같은 얘기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 참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행함이 수반되어지는 믿음인 거죠.
그리고 사도 요한 같은 경우도 너희가 이제 사랑하라고 하면서 형제를 보고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보고도 구제할 마음 사랑 섬겨줄 마음이 너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게 너희가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 하면서 그건 사랑이 없는 거다 요한이 사랑이 없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믿음이 없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이런 서신들을 우리가 이렇게 통합적으로 잘 이해해야 돼요.
종합적으로 결국은 바울과 야고보가 또 요한이 하고 싶은 말은 뭐냐 하면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들은 한 번도 강조한 적이 사실은 없습니다.
가만히 이렇게 보면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대전제예요.
그리고 그 부분을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아주 잘 드러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이렇게 뭐랄까 돋보기로 이렇게 쫙 확대해서 보여줘 좋다 좋다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자칫하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로마서만 해도 잘 이렇게 쭉 읽어보면 뒤에 가면 계속해서 구원받은 성도가 어떤 모습이 나타나야 되는가에 대해서 계속 얘기를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야고보도 뭐냐 하면은 구원받은 성도는 삶이 어떻게 나타나야 되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 삶 속에 구원받은 사람다운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너희의 믿음을 한번 점검해 봐라 하고 사실은 뭐냐 하면 이게 예수 믿는 사람들한테 보내는 책이거든요.
야고보서가 근데 그들 교회의 성도들한테 너희가 이렇게 행함이 없으면 너희는 구원도 못 받은 사람이다 고 말하는 것 같아요.
느낌에는요. 그러니까 상당히 여기에는 어떤 부분이 있냐 하면 그 성도들을 이렇게 충격을 주려고 하는 면이 있습니다.
요한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표현을 그 부분을 강조해서 그렇죠 우리가 바울이 믿음을 강조했다면 이 행위를 또 강조해 가지고 이쪽 측면에서 강조해서 우리가 정말 믿음 사람이 맞는가 한 번 더 생각해 보도록 사실은 직접적으로 이렇게 도전하고 있는 그래서 충격을 주고 깊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그런 말씀이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이렇게 쭉 보면 한 7가지 정도의 성도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야고보가 딱딱 지적하면서 너희가 그런 어떤 어 부분에서 믿는 사람다운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가 점검해 봐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한 7가지의 문제가 그 교회 속에 이미 다 나타나고 있었던 거죠.
이미 다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의 말대로 우리가 좀 그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보면요.
문자적으로 만약에 보게 되면은 그 야고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을 다 구원 못 받은 사람처럼 보여요.
그 교회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이 아닌 거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서 12 보면은 1절에 보면 12 지파에게 내가 무난하노라 하면서 이제 2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그러죠.
내 형제들아 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된 너희들은 하면서 이제 사실은 편지 하는 거거든요.
그것이 기본적으로 전제돼 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야고보가 어떤 그들에게 나타난 그 문제를 좀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데 그 이렇게 건면하고 나서요.
바 야고보가 이제 내가 너무 좀 세게 고민한 것 같다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중에 이제 5장의 뒷부분에 보면요. 너희가 지금 힘든 줄 안다는 거죠.
신앙생활을 하는 게 그렇지만은 우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왔다 그래요.
5장 8절 보면 그렇죠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그러죠.
그러면서 이제 너희가 13절 보면요.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러면 기도할 것이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하고 13절에 그리 말씀하죠.
그러니까 어 이제 그들이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또 여러 가지 교회 속에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감당하려고 할 때도 그들이 인내해야 되고 또 한편으로는 고난을 감당해야 되는 그 상황 속에 놓여지게 되는데 그들에게 너희가 인내하라 하면서 인내하는 게 힘들다면은 기도해라.
그러니 기도면 사실은 뭐냐 하면 이 야고보의 권면에서 기도하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베풀어 주셔야 할 그 은혜가 다 기도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야고보가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도 더 확실하고 있는 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삶을 그가 살았고 기도를 강조하면서 그가 이 성도들에게 기도하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사실 생각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야고보가 어디까지 이제 그들을 사실 격려하냐면 엘리아 같은 경우에는 우리와 성전이 같은 사람이지만 그가 기도했을 때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셨던 것처럼 너희도 그 정도 어떤 위치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사람이고 너희도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너희의 기도도 기꺼이 들어주실 것이다 하고 이야기를 해 주는 겁니다.
이제 우리 이제 엘리아 사건은 다들 잘 아시는 사건입니다.
다 잘 아는데 또 아는 것 같은데 막상 생각해 보면 또 잘 기억이 안 나는 그런 사건인데요.
엘리아 우리 요한이 어디 가 요한이 들어야 되는데 이제부터 네 엘리아와 관련된 사건은 이제 11개서에 잘 나타나는데 오늘 이 말씀과 관련된 사건은 요란기서 17장 1 18장에 열란기 사항 17장 18장에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이 야고보서 말씀 보면은 그때 이스라엘에 기근이 있었다.
비가 내리지 않아서 가뭄이 3년 반 동안 지속됐다는 것을 얘기를 해 주죠.
그죠 실제로 11기서를 보게 되면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 북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던 왕이 누구였습니까?
아합이었습니다. 아 아합은 이스라엘 북이스라엘의 19명의 왕 중에 일곱 번째 왕이에요.
북 이스라엘은 9개의 왕조가 이렇게 교체됩니다.
왕조가 남유다는 하나의 왕조가 계속 지속되는 거고요.
20 19명 의 정통성을 가진 왕들이 남유다에 있게 되고 그 이스라엘은 19명의 이제 왕들이 다스리게 되는데 9개의 왕조가 바뀌는데 이 왕조는 세 번째 왕조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오므리인데 오므리 왕조의 이제 두 번째 왕이고요.
전체적으로 보면 일곱 번째 왕이거든요. 아이 근데 그때 이스라엘이 탈락이 극에 달해요.
그 전에는 초기만 해도 여러 보함이 나라를 이제 시작할 때만 해도 그래도 상당히 신앙적 면모가 있고 또 재단도 이렇게 세워 가지고요.
예루살렘으로 이제 못 가니까 나름대로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을 잘 섬겨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기는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정통성에서 이제 살짝 벗어나는 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합 시대 때가 되면은 그 정도가 아니고 이제 이세벨과 같은 부인을 얻으면서 이스벨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뭐냐면 바을 숭배하는 신앙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면서 그야말로 우상숭배가 이제 만연해지는 그렇죠 만연해지는 그런 역사의 중심에 아합이라는 사람이 있고요.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들어오면서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에게 그 풍요를 가져다주는 특히 이제 농사 잘 지으려면 비가 내려야 되잖아요.
바알 신은 번개의 신이거든요. 비와 관련된 신이에요.
그래서 발신을 잘 섬기면 비가 이렇게 때에 따라 잘 내려서 우리가 풍요롭게 될 것이다 하는 게 그 바 신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거든요.
그 신앙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왔을 때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했던 거죠.
그 이유는 뭐냐 하면은 바울이 너희들을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그럼 기도해 보라는 거죠. 바울에게 구해 보라는 거예요.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때 바울을 믿는 사람들 그렇죠 바울 신을 바울을 의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바울에게 간구했고 기대했겠어요.
3년 반 동안 아무 일이 없는 겁니다. 비가 와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거예요.
그 와중에서 우리 이제 보면은 엘리야를 하나님이 그 기근 속에서 사르밭 새 과부를 통해서 구원하는 그런 장면도 이제 나타나고요.
나중에 이제 시간이 흘러서 하나님이 다시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냅니다.
아합에게 보냈을 때 아이 아니 엘리야가 아합을 딱 만났을 때 너가 바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불러서 갈멜산에 모이게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이제 누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지 한번 대결을 한번 해보자.
그래서 아합이 파바를 다 보내서 바울 선지자들을 다 모으게 됩니다.
그 장면을 보면은 아세라 선지자들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맞죠 아세라 선지자들은 등장하지 않고 바 선지자들이 450명이 등장하게 되는데 다 왔을 수도 있고 그냥 기록해서 뺐을 수도 있는데요.
안 왔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450명의 바울 선지자들이 갈멜 산에 이제 모이고 그때 엘리야도 그곳에서 이제 어떤 일을 하냐면은 두 개의 재단을 쌓죠.
두 개의 두 마리의 송아지를 하나하나씩 분배해서 그 재단을 쌓고 그 위에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고 그리고 나서 우리가 우리가 믿는 신에게 불을 내려서 불을 내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이 재단을 불사하게 한번 해보자.
그래서 불사하게 하는 그 신이 진짜 신이다고 우리 그렇게 봐도 되지 않느냐 하고 이제 엘리야가 딱 제안을 합니다.
그 백성들이 들어보니까 아 그렇지 그거지 실제로 그 재단을 불 붙이지 않는데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그것을 태운다면 그 태운 신이 참 신이다 하고 다 그렇게 동의를 합니다.
동의를 받고 나서 이제 바울 선지자들이 어 오전부터 정오까지 막 이렇게 어 자기들이 믿는 그 신에게 불을 내려달라고 막 춤추고 막 그러거든요.
정오까지 안 되니까 그다음부터는 막 칼과 창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면서 피를 흘리면서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바알 신에게 그만큼 헌신한다는 거예요.
다 바친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요청하는데 아무런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 그때 그 장면을 보면서 엘리야가 놀려요.
그 바 선지자들을 너희들 더 열심히 해라. 지금 신이 늘 발신이 지금 주무시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모른다.
어디 잠깐 마실 나갔을 수도 있고 그렇죠 아니 그러니까 깨우거나 빨리 불러봐라는 거죠.
그렇게 해서 불을 태워 보게 해라 했는데 그들이 아무리 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어 엘리아가 이제 그 사람들에게 요청합니다.
물 네 통이죠. 물 네 통을 물을 가득 담아서 재단 위에다가 막 이렇게 붓게 해야 합니다.
그거를 세 번을 해요.
그러니까 세 번 정도 하니까 이 재단을 둘러싼 그 도랑이 도랑을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데요.
그 도랑에 물이 가득 찰 정도로 그렇게 이제 물이 흥건해서 어 그 젖은 재단에 이렇게 불을 갖고 와서 붙이려고 해도 붙일 수가 없는 그 정도 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엘리야가 믿음이 대단해요. 그 상태에서 하나님께 엘리야가 딱 기도하거든요.
한 번 기도하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뭐까지 다 태우냐면은 재단을 다 태우고 도랑에 물을 다 태우고 돌까지 다 태워요.
재단의 재단을 만들 때 12개의 도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도를 해서 재단을 수축하거든요.
엘리아가 그 수축하고 나서 기도했을 때 그 불이 내려와서 돌까지 다 거의 태워버리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는 것이 그 자리에서 선명하게 선포가 되고 그것을 보면서 어 그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었구나 하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엘리아가 그 선지자들을 잡아서 죽이라 했을 때 이제 그들을 시내에 데리고 가서 잡아죽이고 그 일로 인해서 큰 어떤 하나의 종교 개혁적인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사건을 이제 야고보 선생은 생각하면서 다른 것은 이제 다 이렇게 빼고요.
엘리아가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데 딱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 들었고 비를 내리셨고 아 비가 내리지 말라고 기도했을 때 비가 그쳐졌고 3년 반 동안 그 이후에 비가 내려 달라고 기도했을 때 비를 내려주신 그 하나님에 대해서 지금 야고보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기도할 때 보면은 이제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갈매산 정상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비해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사원에게 기도하면서 저기 그쪽이 이제 갈매산 쪽이 지중해 쪽이 이렇게 보이는 바다가 보이는 곳이거든요.
저는 안 가봤는데 이 장면을 보면 그렇습니다. 바다 쪽에서 구름이 이렇게 오는지 한번 봐라는 거예요.
이제 일곱 번까지 이렇게 가게 하는데 여섯 번째까지 가도 그 바다 쪽에서 비가 올 조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엘리아가 7번까지도 가라 해서 나중에 일곱 번째 보니까 이제 이렇게 구름이 주먹만한 구름이 손바닥만한 구름이 동시에 떠오르는 걸 봤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엘리야가 바로 그럽니다.
왕에게 빨리 마차를 준비해서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은 이제 별공이 있는 곳이거든요.
그곳으로 빨리 서둘러 가라고 해라. 지금 이제 폭우가 내려지기 때문에 이렇게 사실은 이제 빨리 피하라는 거죠.
그래서 실제로 이제 왕은 마차를 타고 이스라엘로 돌아가고 그때부터 이제 천둥이 저 비가 이제 막 쏟아지는 겁니다.
이제 거기 장면을 보면 엘리아가 마차를 타고 가는 아합보다 더 빨리 막 달려서 이스라엘로 가요.
어떻게 갈지 모르겠는데 막 날아간 것 같아요. 네 그런 장면까지 나옵니다.
이제 우리가 볼 때는 그냥 그 일은 엘리아만 할 수 있는 일이고 네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우리도 기도하면 응답을 해 주시는데 우리가 그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야고보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 들어주신다고 지금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엘리아의 그 사건과 같이 그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면은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은 우리가 어떤 한계를 설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어떤 기도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간구할 수 있는 기도 제목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일단은 우리한테 딱 가르쳐줘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항상 이 장면을 딱 생각하면서 뭘 생각해야 되냐면 우리가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우리가 그것은 너희가 너희 어떤 수준에서 기도할 어떤 내용이 아니다.
그거는 뭐 엘리아 정도 엘리사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어떤 구속사적인 역사 속에서 특별히 하나님이 보여주신 특별한 어떤 은총의 어떤 역사였다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그 그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기도 제목도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는 분 그리고 들어주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전제되어 있는 그것을 우리가 기본적으로 다시 한 번 생각을 잘 해 봐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오늘 말씀 제목을 제가 역사하는 기도 이렇게 잡았는데요.
이 말씀에 보면은 그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어 16절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이게 조건의 어떤 요소들이 여기에 첨부돼 있죠.
그렇죠 그러니까 죄를 서로 고백해라 이 공동체가 함께 기도해라 하는 것이 나타나고 있고요.
그리고 병 낫기를 위하여 기본적으로 뭐냐 하면 서로 기도하라 그럽니다.
서로 기도하라 이게 그 교회 공동체가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야 된다 하는 것이 여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이제 조건적인 부분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고 4장에서 우리가 기도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하는데요.
어 어떻게 구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뜻대로 이렇게 구해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는 기본적으로는 뭐냐 하면 어 이게 들어주실까 들어주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구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해라는 거예요.
믿고 구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을 해주시는데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그 응답은 항상 최상의 것이다는 거죠.
네 응답이 지연되면 그게 지연되는 게 지금 당장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보다 더 좋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최상의 것으로 우리에게 들어주신다고 하는 그리고 내가 지금 현재 구하는 것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근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서 이제 나타난단 말입니다.
나타나는데 이게 즉각적으로 안 나타나고 천천히 나타나는 것이 또 그게 하나님 우리에게도 유익할 수 있다는 거죠.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하는 그 모든 어떤 하나님의 응답의 방식 자체가 다 우리에게 최상입니다.
그래서 어 나중에 이제 나타나는데 비가 내리는데 처음에 안 내리고 그렇죠 사원 보고 7번 가라고 그러잖아요.
엘리야는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7번 기도했을 것 같아요. 기도하고 한번 가 봐라 그 불신이 있어서 정말 비가 내릴까 내릴지 한번 확인해 보려고 이렇게 보내는 게 아니고 확신을 갖고 보내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두 번째 기도하잖아요.
그러면 또 들어주실까 이렇게 하고 있잖아요. 보내는 게 아니고 확신을 가지고 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현재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을 때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은 하나님의 그 기도에 이미 응답의 전체적인 틀 속에서 봐야 되는 거죠.
이미 하나님의 기도는 응답이 된 겁니다. 그 응답되고 있는 된 것을 이제 어떤 응답을 해 주시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좀 더 유익한 방식으로 이렇게 드러내시는 거거든요.
그래서 어떤 때는 바로 이렇게 기도를 들어주시고요.
어떤 때는 시간을 대단히 우리 아브라함처럼 한 20 5년 만에 아들을 낳지 않습니까?
그렇게 긴 기간을 사용해서 기도를 들어주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기도 응답이 뭐냐 하면은 그 이삭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아들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25년 동안이라는 긴 세월 동안에 하나님이 누구를 낳았냐면은요.
아브라함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낳으신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질 만한 그렇죠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놀라운 선물이죠.
그게 이삭 얻은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아브라함 개인의 신앙에서 볼 때는 내가 25년 동안 그 하나님을 끝까지 이제 믿는 사람으로 그래서 나중에 이상을 바칠 수 있는 그 정도의 사람으로까지 그가 신앙이 형성됐다고 하는 것이 자기가 볼 때는요 최고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이제 신앙생활을 해보면 기도하면은 기도를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들 을 경험하면서 사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우리 기도하면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얼마나 즉각적이신지 몰라요. 기도를 하면 은혜를 받잖아요.
우리가 뭘 잘했다고 은혜를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내면에 은혜를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세요.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뭐냐 하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부분에 있어서는 지체함이 없으세요 하나님이 그런데 어떤 부분 주로는 이제 뭐냐 하면 아 우리 마음에 이거는 좀 음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고 내 뜻에 가까울 수도 있다 싶은 그런 것들이 있어요.
근데 우리는 그게 더 절박하거든요. 성령 충만하면 사실은 그것보다 더 귀한 게 없어야 되는데 그것보다 우리는 내 아들이 좋은 대학 가는 거 건강한 거 그렇죠 건강이 회복되는 거 그러니까 우리는 그것이 더 훨씬 더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가 많은데 그런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다실 때 보면요.
우리한테 이렇게 기도를 바로바로 안 들어주세요.
그런 부분은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것을 들어주기 시작하면 그런 게 너무 많아요.
10가지 들어주시면요. 100가지 천 가지를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면은 우리 엉망이 되거든요.
근데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들어주시는데 이게 우리에게 우리의 맞게 우리에게 더 유익한 방식으로 기도를 들어주시고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렇게 받는 그 25년간의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의 우리 불신앙이 어떻게 해서 계속해서 연단되는지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저도 어떤 부분에서 대단히 감사하냐 하면요. 기도가 이렇게 탁 응답되지 않을 때 그 느끼는 그 고통이 있습니다.
너무 답답해요. 기도를 했는데 탁 들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더 이렇게 들어주시면 내가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그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용해 가지고 뭔가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더 유익할 것 같은데 왜 안 들어주세요 그렇게 막 따지고 싶을 때가 너무너무 많았단 말이에요.
너무나도 답답해요. 그런데 그 답답함의 어떤 그 과정이 없으면요.
이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믿음만큼 절대로 자라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니까 요즘은 이제 기도 별로 안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더 좋아 좋아 그러니까 하나님 주님의 뜻을 이제 구하고 주님 뜻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돼요.
그러면서 이제 구체적으로도 물론 다 기도하죠.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어떤 기도의 제목에서 어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는 것 그런 것들이 어 이제 많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거의 이제 사라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영광이 잘 드러났으면 하는 그 간절함이 다른 어떤 기도 제목을 다 이제 제치고 이렇게 우뚝 올라서는 그 어떤 신앙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제가 다시 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제가 원하는 대로 기도를 다 들어주셨으면 하나님이 많이 들어주셨기 때문에 그 많은 체험을 통해서 내가 신앙이 더 성장했을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체험을 많이 하면 신앙이 성장할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막 경험했던 많은 이적을 봤던 무리들이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얼마나 많이 봤어요 그렇죠 셀 수도 없는 그 이적을 봤거든요.
그런데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나중에 제자들 보면요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결국은 어떻게 해서 믿음이 팍 등장하냐면요.
자기들이 생각했던 기대했던 방식에서 그 기대가 다 박살 난 거죠.
이렇게 이렇게 하면은 이제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우리는 대신이 되고 나라가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고 꿈이 반짝반짝했는데 그것이 다 깨지는 거예요.
자기들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들이잖아요.
전 주님 빨리 그런 나라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경건하고 거룩한 기도 같아요.
하나님의 나라 그렇죠.
하나님을 섬기는 그 다윗 왕국과 같은 그런 나라가 우리에게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제자들 다 기도했을 거 아니에요 예수님과 함께 그 나라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던 그런 정말 아름답고 순수한 그 비전이라고 사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확 박살 나거든요. 물거품이 되면서 제자들이 사실은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가야 될 정도로 충격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 과정이 있고 난 이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주님을 다시 딱 만났을 때 그렇죠.
그들이 완전히 이제 바닥 바닥을 친 거지 않습니까?
인생에 바닥을 쳤을 때 그들이 거기에서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눈을 뜨고 자기들이 정말 구해야 될 게 뭔지에 대해서 딱 눈을 뜬 사람들 신앙이 바뀌고요.
그들이 그 이후의 삶을 보면 정말 하나님을 일관성 있게 믿음으로 살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그 사도들의 삶을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그런 어떤 방식으로 들어주시기도 하셔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그런 분이시다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우리가 이 기도에 대해서 생각할 때 기본적으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고요.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들으셔야 되는 하나님 스스로의 약속이 또 거기에 주어져 있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으로 너희가 기도하면 내가 기도를 듣겠다 하는 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걸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깰 수는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언약 관계 속에 있다고 하는 거 언약 관계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어 그런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까지 생각하게 해 주는 겁니다.
대단한 거예요.
언약 관계 속에 그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데 우리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이렇게 기도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훨씬 더 좋은 곳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가시는 하나님이다 하는 것을 하나의 대전제로 잘 생각을 하시고요.
그리고 어떤 것이 있냐 하면요. 우리가 기도할 때 열심히 기도하라 그럽니다.
열심히 기도하라 낭망치 말고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그렇죠 그리고 구하고 자꾸 두드려라 포기하지 않고 구하라 그럽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서 죽기 살기로 기도하라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항상 강조했었어요.
우리 박연선 박사님 맨날 죽기 내기로 기도하라 그래요.
기도를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이 야고보가 행함으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하고 이렇게 얘기할 때 그가 강조해 주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그것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을 잘 믿는 사람은 그렇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 그런 기도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고 얘기도 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 속에 그렇게 부지런히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정말 우리 주님을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거죠.
믿는다는 것은 우리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걸 말하는 거거든요.
그 의지한다고 하는 것에 가장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이 뭐냐 하면은 주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기도할 때 내가 바라는 것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새롭게 깨닫고 발견해 가는 그 과정으로 저도 우리의 기도는 꼭 필요하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가 잘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해서 그것을 알고 그리고 우리는 뭐냐 하면 주님께서 내가 내가 드린 그 기도를 현재적으로 어떻게 응답해 가고 계신지를 이렇게 지켜봐야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이렇게 딱 지켜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들어주실까 들어주시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지켜보는 게 아니고요.
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를 주님의 뜻에 맞게 이렇게 교정해 가는 그 분은 하나님이시래요.
그 일은 하나님이 해 가시고 우리가 그 과정에서도 우리가 기도 드린 것이 그래서 어떤 그 속에 있는 우리 안에 탐욕이라든지 그렇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순수치 못한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회개하고 그래야 돼요.
근데 우리가 드리는 기도 중에서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형제가 아파요. 큰 병에 들었어요.
그 형제는 기도를 안 해도요.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해야 돼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이걸 따지면 안 돼요.
그거는 반드시 해야 되는 겁니다.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고 형제가 병이 들었는데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게 형제 사랑하는 거냐 이렇게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거거든요.
해야 되는데 우리가 그걸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되냐면은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되냐면 그 하나님이 내 기도를 이미 듣고 그 듣는 그 과정에서 그 응답해 주시는 그 과정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이렇게 계속해서 기도해 나가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어떤 기도 제목은 이제 우리가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되는 기도 제목들도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 부분들도 있습니다. 일단은 그 부분은 나중에 더 다시 공부를 해야 되는데요.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구해야 되는 거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이미 그것을 응답해 주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지금 현재 어떻게 응답해 주고 있는지를 이렇게 그 눈으로 이렇게 관찰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현재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 어느 정도까지 그 기도 응답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것을 우리가 다 살피면서요.
계속해서 기도해야 돼요. 근데 안 살펴요. 그게 왜 안 살피냐면 믿음이 없거든요.
기도를 들어주시는데 믿음이 없어가지고요. 하나님이 지금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역사해 가고 계신데 안 살펴요.
그러면 안 됩니다. 네 믿음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일단은 뭐냐 하면 믿어야 돼.
믿어 믿음이 있어야 돼. 네 엘리아와 같은 이런 케이스도 능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딱 믿음을 갖고요.
하나님이 내가 우리가 드린 기도를 이미 사용해서 역사해 가고 있고 우리는 그 현장을 잘 들여다보면서 그렇죠.
하나님이 이미 저기 구름 한 조각 둥실 떠 있는 그것이 우리 기도의 와 함께 계속해서 진행되어져 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잘 생각하면서요.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하는 그런 모습이 우리 속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야고보서 말씀을 우리가 통해서 다시 한 번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기도에 대한 성경의 마른 가르침이 있고 또 우리 하나님께 우리가 간구하는 것이 우리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답하는 그런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대화하고 함께 때로는 씨름하고 때로는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고 명령하기까지 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임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어서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것 같을 때가 많지만 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고 또 우리에게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어서이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고 계속해서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 되게 해 주시고 또 우리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게 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점점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대로 이끌어가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그 기도가 실질적으로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이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간절하게 또 쉬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는 그러한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잘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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