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새생활교회 당회장 박주동 목사

예배/말 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2025.05.18 박주동 목사

예배하는 사람 2025. 5. 19. 22:49

 

 

 

 

2025.05.18예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18절 말씀입니다.

5장 16절에서 18절까지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우리가 함께 모여서 주님 앞에 경배해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경배드리러 나올 때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해 드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경배하는 자리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초청하셔서 우리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 아래 거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시간 되게 해 주시고, 참으로 우리가 주 앞에 나올 때마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께 나아오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이 시간에도 저희가 그러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오니 주님 말씀을 통하여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뭐죠?
그걸 뭐라고 그러죠? 기독교 관련된 이렇게 액자 같은 거 그렇죠 이렇게 팔고 하지 않습니까?
가면은 이제 항상 이렇게 살펴보게 되면은 이 말씀과 관련된 것들을 쉽게 접하게 되는데 그만큼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대단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면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아마도 열심히 하나님 앞에 살아가면서 어 기도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이제 가진 분들이 이 말씀을 좋아할 수밖에 없고 또 우리가 실질적으로 살아가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많이 발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어떤 소망이 많기 때문에 이 말씀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우리가 이 말씀을 좋아하는 만큼은 좋아하는 만큼 실질적으로 이 말씀의 의미를 그만큼 풍성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이 말씀을 좋아하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좋아하고 가까이하고 암송하고 하는 것은 너무너무 귀한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의미가 얼마나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충분히 이렇게 몰라도 우리 한국 교회가 이 말씀을 귀하게 생각하고 가까이 두고자 한다는 것은 대단히 귀한 그 자체가 귀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을 붙여놓고 자꾸 이렇게 보다 보면은 조금씩 조금씩 살아가면서 이 말씀의 어떤 풍성한 의미들을 이제 조금씩 조금씩 깨닫게 되는데 어쨌든 가까이의 말씀을 두고 그렇게 이렇게 살아가면서 어 그런 어떤 배움의 과정을 겪는 것 자체가 대단히 기여한 일인 것 같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은 사실 이 한 구절 한 구절이 대단히 중요한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정수를 다 담고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구절도 빠짐없이 그 점수를 담고 있는 말씀인데 그래서 사실 시간이 된다고 한다면 이 말씀을 이렇게 한꺼번에 다 이렇게 살펴보는 것이 아니고 그렇죠 한 구절 한 구절을 이렇게 어떤 면에서는 한 몇 주에 걸쳐서 살펴봐야 되는 그런 풍성한 의미들을 이 말씀 속에 담겨 있거든요.
그래서 기도에 관한 말씀만 해도 그렇죠 여기서 보면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우리가 기도에 관해서도 해야 될 말들이 있죠.
생각해야 될 것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약 성경에서 기도에 대한 교훈들이 아주 풍성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가 복음서에서도 보게 되고 또 사도들의 교훈 속에서도 야고보서라든지 로마서라든지 로마서 같은 경우에도 바울이 로마서 한번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로마서 10 2장 12절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하고 내용이 같기 때문에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 보면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그렇죠 우리가 야고보서에서 또 기도에 대한 좋은 교훈을 얻지 않습니까?
그래서 야고보서 5장에 보면은 5장 13절 그 뒷부분에 이제 기도에 관한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너희 5장 13절 보면 이렇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하면서 그 뒷부분에 보면은

그러므로 너희 16절에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함이니라 말씀하고 있고 또 야고보서 앞부분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1장 6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왜 기도의 응답 을 받지 못하는가 질문하게 될 때 또 이런 구절들이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관한 부분만 해도 사실 우리가 다루고 생각해야 될 것들이 많고 또 범사에 감사하라 과 관련해서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앞부분에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다시 이렇게 잘 그 근본적인 이유를 다루다 보면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고 배워야 될 것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지만은 어쨌든 최대한 이 말씀과 관련해서 얘기를 말씀을 드려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제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통해서 전달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솔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어 이 마게도냐 지역에서 들렸던 한 지역이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베인 베레아 사람들하고 이렇게 비교되면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그런 모습을 사도행전 17장에 보면은 우리가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만 해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떤 몇살 신앙이 좀 많이 어리고 연약했던 그래서 말씀을 듣는 태도도 많이 부족했던 그런 어떤 상황이었는데 이제 이 서신을 보내는 그 시점이 됐을 때 사도 바울이 우리가 나중에 데살로니가전서 앞부분을 보면은 그들의 신앙을 칭찬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데솔레니가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많이 이렇게 성숙해져 가고 있는 어떤 그런 것들을 감사하고 또 격려하면서 이 말씀을 전해주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당시에 바울이 이제 1차 2차 3차에 걸쳐서 전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 그 교회는 교회들은 그렇죠 기본적으로 우리 핍박 가운데 놓여져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바울의 사역 과정 속에서 유대인들 그렇죠 유대인 유대인들이 바울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계속해서 바울을 이렇게 핍박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되고 바울의 사역의 어려움을 주고 그런 것을 볼 수 있고 또 바울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제 성도들이 됐을 때 그 당시 그 시대 속에서 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처럼 편안하고 그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 어떤 신분의 차이만 해도 우리와는 다른 그렇죠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 노예적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적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노예의 그렇죠 주인 그들이 교회 속에 함께 이렇게 공존하는 그런 모습도 교회 속에 나타나곤 하는데 그 자체도 사실은 어려움인 거죠.
그리고 예수 믿으면 그 자체로 또 대단한 어떤 사회 구조적인 어떤 압박 속에서 살아야 되는 어려움이 생기게 돼요.

그래서 예수 믿는 어떤 도예 출신의 사람이 예수 믿게 됐을 때 그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대단히 이제 어렵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분명히 그런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인데 그 사람들이 그렇죠 예수님을 믿게 되면은 그 사회로부터 또 어떤 따돌림을 당한다든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그래서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심지어는 유대인들조차도 배타적이기 때문에 그 유대인들의 또 영향을 받았던 많은 이방인들도 교회들에 대해서 대단한 그 배타성을 적 적이죠.
그것을 가지고 있던 그 어떤 시대적 환경이 먼저 우리가 좀 이해가 되어야 된다라는 거죠.

그 상황 속에서 사도바울이 이 다살루가 교인들에게 편지하는 것을 이렇게 보게 되면 이 데살로니가 서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보냈던 옥중 서신들 그렇죠 특히 옥중 서신들 빌립보서 같은 경우가 우리가 대표적으로 그 바울이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해야 된다 하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는 대표적인 서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기쁨의 서신 그래서 심지어는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럽니다.
기뻐하라 하고 그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이 데사로리가서에서도 그렇고 빌립보서에서도 그렇고 또 다른 많은 서신들 속에서도 사도 바울이 우리가 저 안에서 기뻐할 것을 심지어는 명령하고 있는 그런 말씀들을 우리가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서신을 이렇게 쫙 살펴보게 되면 바울이 어떤 근심하는 것이 이렇게 우리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어떤 어려움과 고난 그것에 대한 어떤 관심이 별로 없어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제 그 교회 속에 아주 강하게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든지 핍박 가운데서 고난받고 고통 당할 수 있는 그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바울이 너무나 잘 알죠.
그런데 바울이 그 우리 서신들을 보면 그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고난과 그죠 핍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기술하고 그걸로 인해서 얼마나 우리가 고통당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심지어 뭐냐 하면 바울이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죠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실은 엄청난 어떤 핍박과 고난 가운데 살아간 사람이죠.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보면 자기가 얼마나 이렇게 고난 받았는가를 이렇게 기술하는 그 말씀이 나오는데, 이렇게 말씀을 보면은 남의 일 얘기하듯이 얘기해요.

내가 한 세 번 죽을 뻔했고 50에 하나 강한 매를 몇 번을 맞았고 그렇죠 파산할 뻔했고 그런 얘기를 남의 얘기하듯이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근데 사실 이렇게 들어보면 그 바울이 받았던 그 고난에 하나도 그 한 가지도 우리가 받았다고 하면은 정말 그렇죠.
충격받을 수밖에 없고 감당하기 쉽지 않은 그런 고난들을 바울이 다 감당 하면서 살았던 사람인데 바울이 그런 바울이 이렇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의 내용들을 보면은 그런 어두운 구석이 없다는 거죠.
밝아요. 밝고 기쁨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바울이 지금 이 데살로니가서에서도 항상 기뻐하라 이렇게 딱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 바울 마음 내면 속에 기쁨이 있는 거거든요. 그 기쁨이 있고 자기가 적어도 그렇죠.

이때까지 예수 믿고 고난 가운데서 살았던 누구보다도 많은 어려움 가운데 살았던 사람이 자신인데, 적어도 자기가 예수 믿고 난 이후에 살아보니까 그렇죠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수밖에 없는 실질적으로 기쁜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예수 예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라고 한다.
그러면 나조차도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바울이 고백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바울이 그 정도면 다 그렇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은 너무나 잘 아는 거죠.
그래서 그 바울이 왜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그렇죠 잘 알죠.
그래서 기뻐하라고 이렇게 말하는 측면도 있지만 바울이 실질적으로 이 기뻐하라 이런 말 속에 그렇죠 자신의 그런 신앙적 그 확신과 고백이 있는 겁니다.
그것을 그래서 선언하는 거거든요. 항상 기뻐해라 빌립보서에서는 그렇죠 그때는 상황이 사실 더 안 좋았어요.

이때보다 빌립보서를 보낼 때는 바울 본인이 이제 옥중에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훨씬 상황이 더 안 좋습니다.
근데도 우리가 종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 그러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 새 이 구절 이 구절이 어떤 부분을 우리에게 기본적으로는 인식하게 해주냐 하면은 이 세 구절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이런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그런 우리 존재의 변화가 있는 사람들이다 하는 것을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라 기뻐할 수밖에 없고 기도할 수밖에 없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거거든요.
그런 우리는 존재됐기 때문에 사실은 뭐냐 하면 이 바울이 이것을 이렇게 이제 명령하고 있기 되네요.
기뻐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이렇게 명령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이거는 뭐냐 하면 이렇게 명령하지 않아도 그렇죠 우리 내면에 이미 그렇게 하고 싶은 거거든요.

우리가 벌써부터 그렇게 살고 싶고 그렇죠 주님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 삶의 모범적인 부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담고 싶고 그렇게 따라가고 싶은 그런 어떤 거룩한 열망이 이미 우리 속에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명령하면 바울의 명령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내면 속에 이미 그렇게 나도 살고 싶은 거거든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제 예수님 믿은 지 한 35년 정도 이렇게 됐거든요.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예수님 믿었는데 그전에는 저는 뭐 기독교에 관심이 없었고 우리 여동생 둘 그다음에 위에 위로 형님이 하나 둘이 있는데 그중에 한 분이 교회 다녔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분들을 제가 뭐 이렇게 많이 핍박은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형들이 형하고 동생이 교회 못 가도록 성경을 책을 이렇게 숨긴다든지 그리고 또 좀 구체적으로 이렇게 또 따져야 되잖아요.
그래서 시편 그때 시편 읽고 그랬었어요. 시편 이렇게 쭉 읽어보니까 교회는 안 가도 되겠더라고요.

예수님이 안 믿었을 때 제가 시편을 읽었는데 읽어보니까 교회 안 가고도 신앙생활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만 좀 잘 읽어라 교회 가지 말고 그랬었어요.
막 핍박하고 그랬었는데 저는 이제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어머님이 우리 동네 한 손님이 이렇게 찾아오셔가지고 우리 집 그 가족들 이렇게 뭘 봐줬습니다.
사주를 다 봐주셨어요 봐주셨는데 뭐 다른 형제들은 별로 얘기를 안 하고 제가 셋째였는데 저보고 이 셋째는 나중에 큰 스님이 된다고 그랬습니다.
대단한 분이세요. 어 그래서 그분이 이제 그렇게 얘기를 하셔가지고 저는 아 나 내가 그 얘기를 딱 듣는 순간 제가 그 마음에 아 이게 내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불교를 또 좋아하고 왠지 전에 갔을 때 항상 좋았던 그 기억이 있고 혼자서 이렇게 도 닦고 이런 것들이 내하고 적성에 맞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우리 목사님들 중에 저를 참 잘 아는 분들은 저보고 도를 닦지 말래요 도를 왜 도를 닦느냐 하면 제가 주로 많이 닦는 도가 이 서도입니다.
서도 붓글씨 쓰는 거 후글씨 쓰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글씨 쓰는면서 도를 닦고 그다음에 제가 또 어릴 때부터 많이 했던 게 태권도를 했단 말이죠.
그것도 도잖아요. 그럼 태권도 무술로 도 닦고 그러다가 아 내가 선임을 하면 나하고 참 잘 맞겠다 북 글씨 쓰는 것도 좋아하고 이렇게 하니까 그래서 대학교 들어가서 한 1 2학년 정도 마치면 뭐 공부 더 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제 출발을 하려고 일자리 마음을 이렇게 다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갖고 있었는데 대학교 1학년 때 이제 예수님 이제 믿게 되는데 우리 CCC 선교 단체라는 데 있지 않습니까 거기 그 위에 순장님이라고 그래요.
그 순장님이 성경을 이렇게 가르쳐 주시는데 그래도 이제 조그마한 책자로 6번을 이렇게 가르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그 공부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는데 친구가 저한테 페스티벌 가고 있는 저를 붙잡더니 정말 좋은 데가 있다는 거예요.
페스티벌보다 더 좋은 데 그래가지고 페스티벌 안 가고 그 친구 따라 정말 좋은 데 이제 간다고 봤거든요.
근데 친구가 빈 강의실에 이렇게 3명이 공부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 저를 초대한 거예요.
그래서 가서 공부를 했어요. 일단은 근데 공부 끝나고 나서 우리 순장님이 뭐라고 했냐면 다음 주에 또 10시간에 공부 이제 하겠습니다 하고 그렇게 약속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약속을 거절할 틈도 없이 약속을 하고 네 그렇게 이제 답변을 했죠.
그런데 제가 예수님 믿기 전에 지금보다도 더 잘 지켰던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약속 약속을 제가 지금보다도 더 잘 지켰어요.
그때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래서 이제 그 선배님하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지키는 거예요.

그 약속을 어길 수가 없어서 결국은 여섯 번을 다 공부를 하고 나중에 막 수련회도 가고 그랬어요.
그래서 수련회 가서 거기서 큰 은혜를 이제 받게 됐습니다.
옆에 앞에 앞에 앉아 있는 분이 그 자매님이었는데 계속 기도할 때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해달라는 거예요.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하는데 저게 뭐지 나도 똑같이 한번 해봐야 되겠다 해가지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해 주십시오.
이게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요. 그때는 그런데 진짜 지금 돌아보니까 그때 성령으로 충만해져 가지고 너무 막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때 받았던 그 기쁨이 지금까지 이렇게 한 35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게 우리가 살면 다 기본적으로 많은 고난을 당하지 않습니까?
어려움도 있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이제 그 이후로 교회를 개척을 두 번 하고 교회를 개척을 두 번 했습니다.
벌써 그리고 또 부교역자 생활도 하고 지금도 이제 언약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고난이 이제 있죠.

있는데 결론적으로 뭐냐 하면 하나님 처음 믿었을 때 나에게 주셨던 그 기쁨이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렇게 그렇죠 그 고난 가운데 있었던 사도 바울이 항상 기뻐하세요 하고 이렇게 말하면 공감이 됩니다.
저만 이제 사실 그렇지 않고 우리 권사님들 장로님들 집사님들도 사실 이제 다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내면 속에 물론 이제 우리가 순간순간 어떤 마음의 기쁨이 실제로 사라지고 때로는 분노하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두렵거나 슬퍼하기도 하고 그러죠.
그런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누리고 있는 이 기쁨이 그렇죠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 굉장히 놀라운 어떤 경험을 우리가 다 갖고 있는 겁니다.
사라지지가 않고 심지어는 뭐냐 하면 예수님 믿고 그때 이렇게 기뻤던 그거보다도 즉 세월이 가면 갈수록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그 기쁨의 깊이와 강도가 그렇죠 점점점점 더 커져요.

그래서 20대 때는 막 그냥 기뻐가지고 그냥 막 이렇게 몸이 있잖아요.
주체를 못하는 거죠. 너무 기뻐서 그래서 자취방에서 한 번은 기도를 하는 기도를 하는데 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밤에 한 10시 정도 됐었는데 은혜를 많이 받아가지고 이게 답답하니까 이 좋은데 이 표현을 못하니까 답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밖에 나가 가지고 어 제가 사는 곳에서 캠퍼스까지 한 3킬로 정도 되는 거리인데 이 강을 따라서 가야 돼요.
원래 강 옆으로 이렇게 지나가면 좀 무섭거든요. 밤에 그런데 이게 꾸불꾸불한데 정말 그 지역에서 가장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그 지역을 지나가야 돼요.
낮에도 거기 혼자 지나가면 기분이 안 좋거든요. 그런데 밤에 그 길을 지나서 갔는데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왜냐면 거기서 지나가는데 너무 그때는 예수님인지 믿은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찬양을 아는 곡이 한 곡이 없었거든요. 그런데도 그 기뻐서 계속 캠퍼스까지 가서 캠퍼스에 잔디밭에 앉아서 계속 이렇게 뭔가를 불렀어요.

찬양은 모르니까 찬양을 이렇게 작사 작곡해 가지고 계속 너무너무 기쁜 그때는 그렇게 기뻤는데 이제 요즘은 그렇게 그렇게 기쁘지는 않은데 기쁨의 어떤 깊이 실제로 또 내면에서도 이게 막 이렇게 솟아나는 그 어떤 기쁨의 강도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보다 더 강렬한 것 같아요.
조금 전에도 이렇게 찬양 부르시는데 옆에 듣고 또 같이 부르고 하는데 이렇게 지난 세월 동안에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고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을 쭉 생각하면서 그 내면에 이렇게 기쁨이 다시 금방 이렇게 확 이렇게 차오르는 그런 것을 이제 보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 명령이 우리가 정말 같이 공감할 수밖에 없고 또 바울이 이렇게 명령하지 않아도 우리 내면에 정말 기뻐하면서 신앙생활 해야 되고 또 실질적으로 우리가 기뻐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새로운 어떤 신분이 된 사람들이구나 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 구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렇게 먼저 잘 말해줍니다.

제가 방금 이렇게 말씀드렸던 이런 부분들이 뭐냐 하면은 우리가 막 노력해 가지고 이렇게 얻는 그런 것들이 아니단 말이에요.
기뻐하는 것이 기뻐한다고 기뻐하고 싶다고 기뻐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요즘 이제 사람들이 감사하는 운동 많이 하려고 그래요.
감사 일기 쓰려고 하고 감사 목록을 찾고 예수 안 믿는 분들도 그런 노력을 많이 합니다.
긍정적으로 살면 뭔가 이렇게 더 잘될 것 같고 그래서 어 긍정적 삶에 있어서 제일 좋은 이제 수단으로 감사의 어떤 목록들을 막 의지적으로라도 찾으려고 그래요.
그런 것들은 참 참 감사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분들은 이렇게 막 감사 제목을 내가 막 찾아야지 이렇게 산다고 그렇게 해서 해야만이 이렇게 찾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냥 그냥 감사한 거거든요.
감사함이 내면 속에 기쁨이 충만해요. 감사함이 충만해요.

그래서 감사하라고 이렇게 사실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감사한지 알고 그 감사 의 어떤 그 세계 속으로 이렇게 자기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이렇게 발견 그런 나의 어떤 존재를 보면서 사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내 모습을 보면서 대단히 놀랍죠.
감사하고 기뻐하는 나의 자신의 모습을 보면은 내가 예수님 안 믿고 살았으면 저렇게 살았을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라는 거죠.
금방 이해하게 되죠. 저렇게 도저히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거죠.
우리 자신들이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보면은 감사하면서 기뻐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습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그런 어떤 존재로 바뀌었다는 거죠.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 된 사람들인가를 바로 이 말씀이 잘 보여주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존재인가 그러면 바로 이 모습이 나타나는 존재인 거죠.

그러니까 우리 이제 여기에는 어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고민해야 되는 부분이 있냐 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살아가지 못할 때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 교회가 때로는 신앙이 이렇게 떨어지고 약화되면서 이런 모습이 약해지거나 또 잘 안 나타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볼 때도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뭐냐 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이런 어떤 새로운 신분 새로운 어떤 삶 그 거기에서 실질적으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은혜에 의해서 떠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죠.
그런데 일단은 뭐냐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어떤 우리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들을 일단 이제 두고요.
그 부분이 나타날 때 우리가 이 부분은 또 어떻게 극복하고 해결해야 되는가 하는 것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근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이렇게 결국 들여다보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이 모습 속에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분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래요.
뭐가 저렇게 좋아 가지고 늘 웃고 막 기뻐하고 감사하고 그런지 막 안 믿는 사람들은 그 모습 보면서 제가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때로는 막 화를 내기도 하고 그럽니다.
나는 그렇게 감사하고 기뻐할 만한 그런 상황이 아닌데 그런 결국 비슷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그런 모습들이 굉장히 어떤 때는 위선적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실제로 저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저렇게 해서 뭔가 이렇게 예수 믿으라고 하려고 그러는가 교회 나오라고 전도하는 어떤 수단으로 저렇게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저것도 훈련돼서 그런 거 아닌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우리 이제 교회 역사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모습 가운데 결국은 살아가는 것을 이 세상이 바라보면서 실질적으로는 가장 뭐냐면 복음의 능력에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복음의 능력이 어떠한 거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거죠.
그래서 그 교회가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나면서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가 이렇게 굳이 이렇게 막 전도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요.
사람들이 또 눈치가 빨라가지고 정말 좋은 것은 딱 알거든요.
어디로 가야 되는지 가야 되는지 그렇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무엇을 내가 소유해야 되는지 이런 것들을 늘 그게 고민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가고 있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딱 보면 안 믿는 사람들이 그걸 딱 알아요.
그래서 어느 시점이 되면은 딱 물어봅니다. 너 교회 다니냐 저는 이제 이렇게 생활하다 보면은 저보고 조금 이렇게 젊었을 때는 저보고 전도사님이세요 아니라고 그럽니다.
아닙니다. 그래요.

그리고 나중에 조금 더 나이가 드니까 저를 딱 보면은 목사님이세요 딱 물어요.
목사님 같아요. 저보고 그럼 일단은 아닙니다 그래요 왜 아닙니다 라고 말하냐면요.
그 목사입니다. 전도사입니다. 이러면은 전도사하고 목사이기 때문에 저러는 거다 그렇게 생각할까 봐 아닙니다.
그러면서 계속 지내요. 그리고 마음이 이제 이렇게 지내다 보면은 원인들이 막 열립니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뭐가 그렇게 기쁘냐고 이렇게 물어요.
그러면 이제 그거에 대해서 이렇게 쭉 얘기해줘. 그래서 이분이 마음이 많이 열리고 관계가 이제 형성되면 제가 목사입니다 이렇게 얘기 해요.
그때는 그 어떤 선입견이 없죠. 그냥 받아들여요.
그리고 우리 교회 오라고 그래요. 어디서 사냐고 여쭤보고 그 동네 가까이에 장로 교회 가라고 얘기를 합니다.

장로교 그렇게 하면서 전도하고 그렇게 하는데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그 모습을 이렇게 예수 믿는 분들이 결국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살면서 우리 교회가 계속 이 세상 속에서 사실은 대단히 힘 있게 이렇게 생존했고 그렇게 지탱돼 왔고 그 교회의 힘 에 의해서 이 세상이 계속해서 복음화되어 가는 것을 우리가 이제 봤죠.
그래서 그 교회가 그렇게 이 세상 속에 유지하고 이렇게 복음을 힘 있게 선포해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그 본질적인 요소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이 말씀과 관련이 있는 거 그리스도인들에게만 나타나는 이 기쁨 그다음에 감사함 그리고 끊임없이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이렇게 교제하는 그 모습 대단히 정말 놀라운 모습이죠.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시다 보면은 이걸 잊어버립니다.

뭘 잊어버리냐 하면 이렇게 우리가 식당 같은 데 가 가지고 이렇게 밥을 먹을 때 기도하지 않습니까?
또 사람들이 이렇게 때로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기 전에 기도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기도 말하면서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게 굉장히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놀라운 표현이거든요.
어떻게 그렇죠? 어떤 대상에게 하나님 그것도 아버지 이렇게 우리 아버지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우리가 어색한 그런 때가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러면서 또 하나님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대단히 사실 이게 낯설고 또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그 표현 자체가 사실 대단히 충격적으로 와닿아요.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 가지고 그게 얼마나 충격적인지 잘 모르고 살 때가 많은데 제가 그 충격이 아직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릴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리고 CCC 순장님하고 성경 공부하는데 선장님이 사랑하는 그 순장님 뭐라고 기도했냐면 사랑하는 주님이라고 그래요.
사랑하는 주님 와 이거 막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몰라요.
성경 공부하는데 사랑하는 주님 아휴 이게 그게 어떤 느낌이냐 하면요.
우리가 이순신 장군 좋아하잖아요. 사랑하는 이순신 장군님 이렇게 해봐요.
얼마나 이상해요 그렇죠 이상하잖아요. 사랑하는 이순신 장군님 아 뭐 표현이 불가능해 우리는 할 수가 없는 그런데 사랑하는 예수님 사랑하는 주님 이렇게 표현하니까 그때 저는 엄청나게 충격 받았거든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대단히 사실 중력적이거든요.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그게 충격도 받지만 뭘 받냐 하면요.
정말 저 우리 순장님이 믿는 부르는 저 사랑하는 주님이 정말 주님이 주님이시지 않고는 저렇게 저 사람이 할 수 없다 하는 거를 느꼈어요.

그래서 저 선장님이 그냥 가식적으로 저렇게 하는 건 아니다는 것을 아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그 모습을 사실은 이제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살려고 사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그렇게 하는 거 아니거든요.
우리가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새로운 존재로 이렇게 바뀌었는데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그냥 살아가는데 이게 이 세상을 향해서는 대단히 강력한 빛을 진리를 선포한다는 거죠.
그래서 이 세상 우리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이 세상에 정말 등불입니다.
빛이고 그렇죠 또 부패를 막는 그렇죠 썩어지는 것은 이 세상은 계속해서 사실 썩어지잖아요.

죄로 말미암아 썩어지고 쇠하여지고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놓여질 수밖에 없는데 그 이 세상에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을 새롭게 이렇게 소생하게 하고 새롭게 살리는 그것이 우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는데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그런 영향력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사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때때로 전도 좀 잘 못하고 할 때도 있고 그래도 우리가 이제 밖에서 이렇게 식사하실 때 그렇죠 식사하실 때 기도하시고 식사하시고 그냥 여기도 내 예배당에 자리 생각하시고 저도 일부러 사실은 이제 그냥 식사해도 되죠.
감사합니다 하면서 숟가락 들기 전에 감사합니다.
주님 하면서 이렇게 식사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한테 정말 예수 믿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전도하는 그런 어떤 의식을 가지고 식사하도록 기도하고 또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이 언어적 그죠 표현 이런 것들을 사용해서도 내가 어떤 사람들이 들었을 때 아 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인 것 같아 느끼게 되고 또 나중에 이제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인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이 그동안 태어난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결국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거든요.
조금 조금씩 우리 한국 교회가 그 역할을 계속해서 잘 이제 해 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은 우리 한국 교회 현재 그리스도인들 수준이면 사실 우리 한국 전체가 전체에 사실 엄청난 영향을 미쳐서 우리 사회 전체가 사실 다 변화되어질 수 있는 좀 더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그런 공동체로 변화되어져 갈 수 있는 그 힘을 우리 교회만 사실 가지고 있고 또 충분히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런 부분도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체가 우리가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능력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살게 살 수밖에 없게 하신 그 은혜 그죠 그것이 우리에게 이렇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래서 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어떤 존재로 살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 부분을 오늘 이 말씀을 이제 보면서 일단 한번 잘 생각해 주시고 우리가 그런 존재로 지금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또 내가 그렇게 잘 살아갈 때 그리고 이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세상에 이렇게 선포하고 복음을 통해서 생명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그리하여서 이제 하나님 나라를 계속해서 확장해 가고 계시는 그런 부분들을 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 되었는가 하는 것을 이 말씀이 가르쳐주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제 잘 하려고 할 때 하나님 자녀답게 잘 살아가려고 할 때 어 이 세 가지를 염두에 둬야 됩니다.
일단은 뭐냐 하면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을 생각할 때는 뭘 생각하냐 하면 예수님 믿고 우리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모습이 잘 그냥 나타난다는 거죠.
이런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했지 않습니까?
이게 나타나지 않을 때는 주님의 어떤 은혜가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은혜 안에 충만히 거하지 못하고 있는 그것을 실질적으로 누리고 있지 못하는 어떤 우리의 모습을 이제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것을 금방 떠올리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는 것을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유지하면서 살아야 되는 우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지 못할 때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여러 어떤 이유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들로 인해서 우리가 이렇게 설득되면 안 된다는 거죠.
우리를 설득하고 그 이유를 그렇죠 소멸시킬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위축하게 하고 때로는 그렇죠 이 기쁨에서 감사하면서 마치 멀어지게 하는 것 같은 그런 요소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찾아와도 어 우리는 그 요소를 뛰어넘어서 다시 기쁨과 이 감사함이 회복되어질 수 있는 사람들이라 하는 것에 대한 그 믿음 그 믿음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것에 대한 믿음 이게 주님에 대한 이제 믿음인 거죠.
믿음 믿고 그다음에 그러면 우리가 이 감사함과 기쁨이 회복돼야 되잖아요.

우리 회복될 때까지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이렇게 해야 되는 그래서 이 베드로 데살로니가서에 잘 살펴보면요.
이 본문에서 바울이 너희가 은혜 가운데서 살아야 된다 하는 것을 사실은 간접적으로 말해 줍니다.
뭐냐 하면은 일단은 이제 기도하라 하는 말씀으로 가르쳐 주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너희가 14절에 보면은 약한 자들을 격려하라 이렇게 말씀이 있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이게 너희 형제들끼리 잘 살아라 이 말씀이거든요.
이걸 뭐라고 우리가 표현하냐면은 성도의 교제 이렇게 표현하죠.
성도의 교제 그리고 또 기도 그리고 이 뒷부분에 보면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0절에 그렇죠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 조금 더 해석을 하기는 해야 되지만 기본적으로 뭐냐 하면은 우리가 이제 듣는 설교 그러니까 구약의 말씀과 선지자들 선지자 사도들의 이 말씀을 신구약이죠.

이 성경의 말씀을 우리 교회가 배우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제 우리 시대는 그렇습니다. 이때는 예언이 이제 있었어요.
선지자들이 있었고 아직 사도 시대에는 있었습니다.
사도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 비상적으로 그들을 사용하셔서 이제는 이제 예언을 한다든지 그렇죠 어떤 우리 시대에 사도가 있지 않죠 우리는 이제 사도 시대에 주신 이 말씀 기록된 말씀 이제 신약 성경 이신 시장 성경에 근거해서 우리가 말씀을 이 말씀을 가지고 해석하면서 듣는 거거든요.
그래서 예언을 멸시하지 마라 이 말씀은 우리 교회 공동체 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겸훤히 여기지 말고 부지런히 읽고 가르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라 하는 말씀이 거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과 기도와 이 성도의 교재 이렇게 세 가지가 다 나와요.
이걸 우리가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라고 그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은혜 받는 수단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수단 세 가지 사실 뭐 네 가지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 그다음에 기도 성도의 교재 그다음에 이제 우리 교회에서 강조했던 게 이제 성찬이죠.
성찬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말씀 그리고 우리가 이 기록된 말씀 그리고 기도하는 삶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의 성도의 교재, 성도의 교재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가 말씀 듣고 기도하고 하는 그 못지않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대단히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이제 요즘은 이렇게 교제하는 게 많이 이렇게 좀 줄어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좀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그런 부분도 있어요.
그러니까 예전 같으면은 교회가 이렇게 있으면 시골에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한 마을에 이렇게 다 모여서 살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도의 교제 강조를 안 해도 성도의 교제가 매일 일어났습니다.

자연스럽게 또 교회 예배당 중심으로 해서 일단 새벽에서부터 기도하면서 새벽 기도하면서 만나고 일터에서 만나고 이러면서 이게 그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좋은 틀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면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지내는 경우도 많은데 물론 이제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라든지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여러 수단들이 있어서 그걸 잘 활용해서 교재를 이렇게 계속해서 해 나가야 되는데, 어쨌든 우리 이제 시대의 교회들이 성도의 교제를 소홀히 할 수 있는 어떤 면이 있을 수 있겠다 하는 것을 의식하면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왜 이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어떤 수많은 은혜를 받지 못하면서 살아가는가 이렇게 질문하게 될 때 그중에 아주 중요한 이유가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발생하고 있는 문제죠.
그게 성도의 교제가 약화되고 있는 것 때문에 그래요.

성도의 교제 우리 예배 마치고 같이 앉아서 교제하지 않습니까?
그게 정말 중요하거든요. 예배 2부 예배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렇죠.
정말 중요하고 그것을 우리 교회가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서로 이렇게 만나고 연락하고 서로 신방하는 거죠.
목사님만 신방하는 게 아니고요. 서로 같이 신방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생활하게 되면은 결국은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 우리 교회 속에서 있고 그게 가동이 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는 거죠.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 건강하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이 모습이 우리 교회 속에 나타난다.
그래서 만약에 이런 모습이 우리 속에 이렇게 좀 잘 안 나타나는 것 같다 하면은 그것을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을 낯설고 당황스럽게 생각해야 돼요.

그렇게 해서 빨리 이게 회복돼야 된다 생각해야 되고 또 그런 모습이 이렇게 나타나면 이게 잘 나타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살아가고 있구나 진단도 해보게 되고 그것을 잘 유지해 갈 때 그 상태를 쭉 유지해 갈 때 우리가 그렇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서도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아주 힘 있게 이렇게 선포하는 삶 가운데 우리 교회 가운데 살아간다 하는 것도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 데살로니가 저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항상 기뻐하고 또 감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을 생각하게 되고, 우리가 주님의 큰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들 되어야 하는데, 주께서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늘 주님의 은혜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의 수단들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고귀한 주의 말씀 성경을 늘 사랑하고 가까이하고 죄로 묵상하며 사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해 주시고, 또 우리가 주 안에서 함께 뜨겁게 사랑하며 교제하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해 주시고, 또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깨어서 간구하며 기도하며 주님과 친밀한 사귄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잘 나타나게 해 주셔서 이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러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이런 모습이 우리 가운데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아서 결국 우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 주의 거룩한 이 복음의 말씀이 이 세상 가운데 힘 있게 선포되고 이제도 죽어가는 그 영혼들을 다시 살리는 이 생명 구원 역사에 우리 교회와 우리의 삶이 드려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