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005말씀 .... 말도 안되는 기도와 응답 .... 임형택 목사
사도행전 9장 36절부터 43절까지입니다. 제가 받들어 읽겠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아멘
하나님 말씀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데 꿈이라든지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체험을 했다든지 그리고 기적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늘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되면 정말 신앙이 틀어질 수도 있고 특별히 신앙도 비뚤어질 수가 있어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말씀에 비하면은 꿈이라든지 기적이라든지 어떤 흔히 말하는 영적 체험 이런 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근데 왜 이렇게 호기심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오늘은 이에 대해서 강론하려고 합니다.
기적이 일어난다든지 기적 같은 일이 생기면 좋지 않겠습니까?
정말 기분 좋은 일이지요. 저는 기적을 바라고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 번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성경에는 많은 기적이 기록돼 있지만 그렇다고 일상은 기적을 바라고 살면 안 됩니다.
성실하게 사는 법 배우고 열심히 사는 법을 배워야 돼요.
기적 자체는요. 일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늘 기적을 베풀지도 않으세요? 늘 일어난다면 그건 기적도 아니지요.
또 그런 분들 다시 말해서 기적을 바라고 살기보다는 성실하게 사는 분들 그러는 분들이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그런 분들보다도 훨씬 삶을 잘 삽니다.
세상에는 분명히 기적이 있습니다. 기적은 아닐지라도 기적 같은 은혜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삶의 위안이 되지요. 위안이 됩니다.
또 희망도 좀 생기고 마치 목말라 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생수를 한 잔 얻어 마시면 얼마나 시원합니까?
그렇게 삶이 시원해지고 유쾌해지기도 해요. 여하간 기적이 일어나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또 항상 그렇지 않지만 신앙적으로도 약간은 유익이 있어요.
많은 유익이 있는 거 아니에요 심지어 기적도 많은 유익이 있는 거 아닙니다.
약간의 유익이 있어요. 꿈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밤잠을 자면서 많은 꿈을 꾸지만 어떤 꿈은 선명하고 어떤 꿈은 선명하지 않아요.
또 어떤 꿈은 맞지만 되게 잘 맞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꿈의 신봉하고 꿈이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뜻 하나님 말씀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위험한 겁니다. 위험한 거예요. 어쩌다 맞았다고 해도 그것은 복불복이지 꿈이 늘 맞는 것도 아니고 그게 하나님 말씀을 대신할 수가 없어요.
제가 모여서 꿈 얘기하지 마시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서로 나누기보다는 꿈 얘기 나누는 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다 허구입니다. 허구
그러면 기적 또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그 은혜는 누가 베풀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베푸시지요. 기적은 하나님의 섭리 사역 중에 하나입니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일으키신 것 중에 하나라는 거예요.
총신대학원을 세우신 박형용 교수님이라고 계세요.
그분하고 박영선 박사님이 총신대학원을 세우셨습니다.
근데 그분의 조직 신학의 조직 신학 책에 보면 섭리 가운데 비상 섭리가 있다 이런 말이 나옵니다.
비상 섭리 요즘 조직 신학에는 이런 거 잘 나오지도 않아요.
근데 비상 섭리가 있다 했는데 이 비상 섭리가 뭐냐 하면 기적을 말하는 거에요.
바꿔 말하면 기적은 하나님이 비상하게 베푸시는거에요. 따라서 우리는요.
기도할 때 기적을 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항상 기적을 바라고 기도해서는 안 되지만 정말 절박할 때 정말 필요할 때 기적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기적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다는 거예요.
본문을 보면 욥바에 살았던 다비다라고도 하고 도르가라고도 하는 여 제자가 나옵니다.
그 제자는 개인 재산을 다 털어서 과부들을 힘껏 도왔어요.
좀 본받아야 될 부분인데 과부들을 힘껏 도왔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속옷과 겉옷을 지어줬다고 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속옷은 우리의 한복에 비유하자면은 바지 저고래요.
치마 저고리 그것도 명절 하나 입는 비단 옷이 아니고 그냥 옛날 농부들이 그냥 입던 그냥 무명 옷 그 정도예요.
겉옷은 우리의 두루마이에 해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디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긴 포대기이에요. 긴 포대기를 몸에 이렇게 두르고 다닌 것이죠.
당시 속옷은 누구나 입는 기본적인 옷이었지만 겉옷은 웬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갖지를 못했어요.
세례 요한이 옷 두 벌 입는 자는 한 벌 주라 라고 했을 때 이 옷이 겉옷이거든요.
옷 두 벌을 가졌다고 하는 얘기는 겉옷을 두 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부의 척도였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겉옷이 없었거든요. 근데 두 벌을 가졌어 그런 것을 나눠줄 줄도 모르면서 세례 받으려고 해 그런 자들에게 세례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겉옷이 두 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한벌 나눠줘라 이렇게 말한 거예요.
겉옷까지 지어줬다. 속옷만 아니라 겉옷까지 지어줬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최선을 다해서 넉넉하게 도왔다는 뜻입니다.
다비다가 그런 거예요. 다비나는 과부들로 도울 때 정말 힘껏 도와준 겁니다.
넉넉하게 도와준 거예요. 이런 사람이 병들어 죽으면 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의 죽음을 아까워하겠죠.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라고 생각했죠.
그때 그 과부들이 그렇습니다. 이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죽은 이 다비다를 살려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있는 방식이 없지요. 그런데 마침 베드로 사도가 욥바에서 가까운 룻다에 와 있었는데 그들이 베드로 사도에게 부탁해서 오게 해서 살려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미 죽었는데 베드로 사도인들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살릴 수 있겠냐고요. 그것은 이성적인 사고로 볼 때 말도 안 되는 부탁입니다.
그걸 기도해요. 말도 안 되는 기도지요.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그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받고 죽은 다비다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기도했을까요? 한참 기도한 뒤에 다비다에게 말했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다비다에게 일어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다비다가 누운 채로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 거예요.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려주신 기적을 베푸신 겁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어찌 죽은 자가 살아난단 말입니까?
근데 세상에는 기적이 있잖아요. 하나님은 그 말도 안 되는 기도를 듣기도 하세요.
응답도 하시고요. 우리는 그 말이 안 돼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네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그 말도 안 되는 기도를 들으실 때가 있으시다고요
기도에는 이런 기도도 있습니다. 때때로 상식 밖의 것을 구하는 기도도 있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베풀기도 하시고요.
물론 그렇게 기도했다고 해서 늘 기적을 베푸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베푸시고 어떤 사람은 왜 베풀지 않으시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왜 어떤 경우는 들어주시고 왜 어떤 경우는 안 들어주시는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것은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처럼 말도 안 되는 기도를 들으시기도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요. 절박할 때 정말 절박할 때 그냥 쉽게 포기해 버리고 안 된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거예요.
그냥 절망하고 포기하고 포기하기보다는 말도 안 될지라도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할 수 있다는 거에요
그리고 어떻게 하실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하나님이 살려주실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지 알 수는 없어요.
그 결과는 기다려 봐야 됩니다. 어떻게 하실지
제가 말씀드린 요점은 하나님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기도를 들으시기도 하시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했을 때에 우리의 판단에 이건 틀렸다 안 돼 쉽게 포기하거나 절망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정말 절박할 때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들어주신 경험들 그런 경험들이 있을 거예요.
당연히 그렇게 기도 했는데 끝까지 안 들어주신 경험도 있을 거예요.
그게 그런 겁니다. 들어주시면 너무너무 좋겠고 근데 안 들어주시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기적과 같은 은혜가 그럽니다.
허나 그런 경우에 그냥 포기하기보다는 기도해야 된다는 거예요.
믿음 가지고 안 들어주셔도 어쩔 수 없지만 들어주시면 좋잖아요.
그래서 들어주시라고 구해야 된다는 거에요.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믿음을 이 종류별로 쭉 정리하면 네 가지 정도 됩니다.
첫 번째는 역사적인 믿음이고 두 번째는 일시적인 감정의 믿음 세 번째는 이적의 믿음.
네 번째는 참된 구원의 믿음입니다. 이 중에서 이 네 가지 중에서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될 믿음은 네 번째, 참된 구원의 믿음이에요.
참된 구원의 믿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나의 구세주라는 것을 알고 영접한 믿음이에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져야 돼요. 역사적인 믿음과 육체적인 감정의 믿음에는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도 교회 다닐 수 있어요.
봉사도 할 수 있어요. 특히 하나님 말씀 듣고 너무 기뻐하고 너무 좋아할 수도 있어요.
적어도 사람이 보기에는 믿음이 있어 보이고 믿음이 좋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역사적인 믿음이나 일시적인 감정의 믿음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이적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또는 나를 통해서 이적이 나타날 것으로 믿어버리는 믿음이에요.
근데 이적이 나타나는 거예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을 구하고 할 때 가질 수 있는 믿음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베풀기도 하십니다.
그렇다고 이적의 믿음에는 다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따라서 나를 통해서 어떤 기적이 나타났다 병든 자가 병이 나았다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병든 자도 고치고, 저 사람은 진짜 하나님의 종이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다. 우리 그렇게 말해요. 아니요.
그게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제가 시간상 성경을 다 찾아서 증언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을 보세요. 그렇게 가르쳐요.
이적의 믿음이라고 다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정말 절박할 때 가질 수 있는 믿음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고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고 은혜 주시기를 믿고 구하는 믿음입니다.
도와주시라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세요.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많은 병든 자를 고치셨는데 그런 경우 그들의 믿음을 보고 고치셨습니다.
물론 항상 믿음을 보고 고치신 것은 아니에요. 그저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신 경우도 있습니다.
또 믿음이 부족한데도 고쳐주신 적도 있어요.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많은 경우는 믿음을 보고 고쳐주셨어요.
그런 경우에 믿음을 이적의 믿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알아야 될 것은 이적의 믿음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게 구원받은 증거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직장암에 걸렸었습니다.
그 후배 목사님이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40일 작정 기도를 하기로 금식 기도하기로 작심을 했어요.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야 사십일 지나고도 하나님이 안 고쳐주시면 어떻게 할래?
그때는 병원에 가도 기력이 없어서 치료도 못 받을 건데 금식을 하고 싶으면 일주일만 해라 그래야 뭐 병원 치료도 받지 않겠느냐 그랬어요.
일주일이 지난 그날 아침이었어요. 아침에 새벽 기도 끝나고 서재에 앉아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무서워 죽겠습니다. 왜? 화장실에 갔었는데 화장실에서 아무래도 암이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야 하나님이 고쳐주신 것 같다. 야 병원 한번 가봐라.
저도 소름이 쫙 끼치더라고요. 탔어요. 병원 치료받은 게 아닙니다.
낳았어요.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 히스기야 왕처럼 15년만 더 살려주십시오라고.
네 지금 20년도 지났는데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재훈이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재훈이가 청년 때 아주 건장했습니다.
전공도 유도였어요. 재훈이가 군에 입대했을 때 누가 아플 것이라고 생각을 했겠어요.
근데 재훈이가 훈련을 받다가 감기 바이러스가 뇌로 침투해서 그냥 전신마비가 되고 전혀 의식이 없는 상태가 돼버렸잖아요.
제가 면회 가서 보니까 알아보는 것은 둘째치고 의식이 없는 거예요.
그냥 축 늘어져 있더라고요 재훈이 부모님이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재훈이 위해 또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하나님 재훈이 살려주세요 하고
이게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요. 말도 안 되는 기도를 들으시는 게 성경을 기록한 그 시대만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그러므로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쉽게 절망하고 자기 판단은 틀렸다고 끝낼 것이 아니라 설령 자기 판단에는 아니라고 싶으면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잖아요. 그때는 안 된다고 포기하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수 있을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기가 좋지요.
하지만 주의해야 될 것도 있습니다. 목사는요. 기도하면 다 고쳐주시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를 해도 기도만 하면 다 들어주시는 것처럼 이렇게 설교하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면 교인들이 좋아해요. 그렇게 해야 기도할 것만 같다고.
근데 현실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기도는 들으시지만 어떤 기도는 안 들으시잖아요.
우리는 알수 없는거에요.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거예요. 그거는 그러므로 기도하며 기도만 하면 다 고쳐주실 것처럼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실 것처럼 그렇게 설교하지 않아야 되는 거예요.
또 기도한 사람은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셨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지 않아야 됩니다.
실망이 되겠죠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약해질 만큼 실망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럴 수 있어요. 안 들어줄 수 있어요. 왜 그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저도 몰라요.
그리고 기적을 베푸시거나 기적과 같은 은혜를 베푸셨을 때는 그 은혜를 잊지 않아야 됩니다.
정말 겸손해야 돼요.
하나님이 어느 누구에게도 베풀지 않은 특별한 은혜를 주셨잖아요.
진짜 겸손해야 돼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정말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너그럽게 봐주셨습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도 정말 너그럽게 하셔야 돼요.
제가 이런 말씀드린 것은 목사 중에는 기도만 하면 다 고쳐주시는 것처럼 가르친 분이 있기 때문이에요.
거기에 현혹되지 마시라는 얘기예요. 듣기는 좋을 겁니다.
근데 현실은 아니에요. 사실은 아니에요.
또 기도했는데 자기가 원한 그것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낙심하는 분들도 계세요.
또 기적 같은 은혜를 입고도 다른 사람에게 야박하게 인색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것은요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꿈을 꾸는 꿈이 성경에 나오는 꿈과 똑같은 꿈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성경에서 말씀하는 꿈은 하나님이 계시의 방편으로 사용했던 꿈이에요.
그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우리가 꾸는 꿈이 아무리 잘 맞았다고 해도 우리가 꾸는 꿈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어요.
성경 말씀과 대등한 위치에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꿈이 성경과 하나님의 계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저도 꿈을 많이 꿉니다. 어떤 꿈은 다 잊어버려요.
어떤 꿈은 선명해요. 선명하면 야 이거 겁나는데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아 조심해야겠다 이 정도 생각합니다.
꿈이 정말 좋으면 야 이렇게 좋은 꿈이 참 꿈을 꿨구나 아 이렇게 되면 참 좋겠다 그 정도 생각하고 맙니다.
지켜보는 것이죠. 어떻게 되는지
그게 무슨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되는 것처럼 그게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을 때 그때 정말 감사할 수 있고 그때를 아 그때 조심하기를 참 잘했구나 이런 정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할 때 어떤 특별한 경험을 주실 수 있어요.
그것은 보편적인 은혜가 아닙니다. 흔히 베푸는 은혜도 아니에요.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어떠한 특별 은혜로 여기고 어떠한 무브먼트 운동으로 여겨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그런 경우들을 많이 볼 수 있어요.
또 다른 사람들 다 그래야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도록 또 조심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들 수 있어요.
어떤 분은 꼭 뭔 얘기할 때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십니다.
아 하나님이 나한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대화 중에 그런 말을 잘해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그래서 듣는 우리에게 혼동을 주는 거예요.
제가 똑바로 해. 야 말을 똑바로 해라. 하나님이 귀에다 말씀하시더냐 하나님이 머리에다 말씀하시더냐 하나님이 마음에다 말씀하시더냐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면 어디에다가 어디로 들은 겁니까?
귀로 듣는 것이죠. 하나님이 귀에다 대고 맨날 속닥속닥 말씀해 주실까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그렇게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는 거에요.
기적이나 꿈이나 영적 체험은 정말 특별한 경험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은혜의 방편도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거나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지도 않아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는 데 더 집중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은혜의 방편이에요.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런 것들이 믿음의 방편, 다시 말해서 믿음이 자랑하게 하시는 그런 은혜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어떤 동기부여 위로나 힘은 될 수 있어요. 그러나 믿음이 자라게 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에도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냈으면 욥바에 있는 사람 전부 다 믿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말이에요.
근데 아니었습니다. 믿는 사람도 있었을 뿐이에요.
부자와 나사로에 비유해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살려서 자기 동생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왜냐하면은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하면 믿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그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했던가요?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가 있느니라.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않은 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해줘도 어떻게 한다고요?
믿지 않는다고 그래요. 이게 성경이에요. 이게 성경이에요.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표준이잖아요. 법칙이잖아요.
성경이 뭐라고 말하느냐가 중요하지 어떤 유명한 목사가 어떻게 말했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살다 보면 무슨 일을 만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평안하다고 앞으로도 다 평안한 거 아니에요 오늘 건강하다고 앞으로도 건강하라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알 수 없는 삶을 살아야 돼요. 뭔 일을 당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날에 우리 생각에 쉽게 포기하고 기도해도 다 쓸모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경우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것이 겸손이고 믿음이에요.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말도 안 되는 기도도 들으십니다.
들으시고 은혜도 베푸세요. 우리가 기도하기를 힘쓰고 낙심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우리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에게는 꿈이나 또 특별한 어떤 영적 체험이나 기적과 같은 은혜들에 대해서 호기심이 많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정말 우리가 많은 호기심이 있지만 그보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과 듣는 것임을 알고 성경 읽는 것과 말씀을 듣는 일에 더 집중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또 살다가 원치 않는 삶을 겪고 우리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일을 겪을 때에 우리의 판단으로 된다 안 된다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 주님 앞에 겸손하게 또 믿음을 가지고 은혜를 구할 줄 아는 저희가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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