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102말씀 기도에 대하여 … 히브리서 4장 16절 …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주께 경배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함께 주의 은혜 안에서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시고 또 우리 심령에 주께서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주의 말씀 저희가 다시 한번 살피면서 우리가 주의 은혜 앞에 우리의 주님 존전에 다시 우리 자신을 세우고자 합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네 이 제목이 기도에 대해서 인데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강론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또 쉬울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대단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가 아 언약교회에서 사역하면서도 설교를 이렇게 어떤 주제를 가지고 많이 했는가 이렇게 살펴보면 기도에 관해서 설교를 제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이제 설교만 한게 아니고 또 제가 기도에 관해서 생각이 나면 또 우리가 이제 기도를 하고 나면 기도에 관한 글을 이렇게 쓰게 되거든요.
기도를 하고 나면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배운 것들이 있기 때문에 자꾸 이렇게 써보게 돼요.
기록을 남기게 되는데 이제 많은 양을 이렇게 남겼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항상 어떤 이제 그것을 도전해 보게 되냐 하면 이것을 좀 이렇게 설교로 말하면 한 편의 설교로 이 기도의 전체를 한번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없을까 그런 어떤 생각을 늘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한 편의 설교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해 보려고 또 이렇게 펜을 들고 이제 쓰게 되요.
이제 타이핑을 치게 돼요. 그런데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설교문만 기도에 관한 설교문만 계속 이제 늘어나요.
저기 앞에 보면 이제 작은 이렇게 편집한 책자가 하나 있는데 저거는 이제 다섯개의 기도에 관한 강설이고요.
그 안에 보면 두 개의 강설이 있고 제가 들고 있는 요 강설이 또 있어요.
그런데 이제 이거 말고도 기도에 관한 많은 이제 강설을 하고 또 글을 쓰고 했는데 기도에 대해서 한 번만 이렇게 딱 표현하기가 불가능하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제 이렇게 이번 시간에 이 시간에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때 제가 이 기도에 대해서 이것이 기도다 하고 이렇게 너무 이렇게 분명하고 또 강력하게 만약에 말씀을 드리게 되면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 외에 우리가 다뤄야 되는 기도에 관한 많은 내용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그런 내용들을 결국은 간과하거나 그렇죠 놓치게 될 수 있는 그런 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이제 많이 이제 공부하고 계속해서 배워가게 되는데 오늘은 그 가운데에서 기도에 관한 어떤 중요한 어떤 점들을 좀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특히 이 히브리서는 독특한 이제 어떤 분위기가 있지 않습니까?
다른 서신서들과 다르게 히브리서가 구약의 말씀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을 쭉 보시면 알 수 있고, 특히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어떤 제사와 관련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관한 일들을 표현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는 누가 저술을 했는지는 우리 교회 역사가들도 명확하게 이제 좀 보기 어렵다 이렇게 결론을 갖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사도 바울이 아닌가 이렇게 많이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사도 바울의 문체와 이 히브리서 저자의 문체가 많이 다르다.
그래서 바울은 아닌 것 같다 뭐 바나바가 아닌가 이렇게 보기도 하고 사도 바울의 어떤 사역했던 그 시점에서 동역했던 그러니까 사도들과 아주 이렇게 가까웠던 사람이 아닐까 이런 생각은 하는데 아직도 명확하게 이제 모릅니다.
그리고 이 수신자들은 도대체 어떤 지역에 있는 교회 성도들인가도 아직도 명확하지는 않거든요.
근데 이제 히브리서를 보면은 그 이스라엘에 대해서 특히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걸 알 수가 있고 또 그것을 이렇게 얘기했을 때 금방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겠다 하는 것은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렇죠 네 그런 면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에서 이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소개해 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분과 관련해서 결국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얘기하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가 수신자들에게 뭘 결국은 강조하려고 하는가 하면은 너희가 지금 아주 고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것은 잘 안다는 거죠.
그러니까 히브리서를 이렇게 읽어보면은 이 수신자들이 어떤 격려나 위로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떤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담대하게 신앙적 어떤 견고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이렇게 강조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상당한 고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예상해 보게 돼요.
그래서 그러면서 이제 고난 가운데 있는 너희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그 문제를 어떻게 이렇게 감당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제 코멘트를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히브리서 믿음장 같은 데도 보면은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쭉 얘기하는데 그 믿음에 관한 예들을 살펴보게 되면 그렇죠.
그 내용들이 대단히 큰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지 않습니까?
그런 정도의 이야기가 필요했다는 것은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비슷한 어떤 고난과 핍박 박해 속에 있었겠다 하는 것을 예상해 보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상황 가운데서 결국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이 세상 속에서 이제 어떻게 인식해야 되고 또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신앙 그리스도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렇게 해주게 되는데, 그중에서 오늘은 이제 기도에 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그 어려움을 우리가 잘 이기면서 믿음의 중심을 지키고 이렇게 쭉 살아가야 되는데, 그 신앙의 어떤 여정 속에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그런 측면에서의 지금 기도를 얘기하는 거거든요.
그런 기도를 감당해 가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이제 중요한가 하는 것을 얘기해 주고 있고 또 실질적으로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히브리서는 조금 더 우리에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른 서신이나 어떤 또 복음서 같은 데서는 그냥 항상 기도하라 기도하라 기도하라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라 그러기도 하고 기도해라 해야 된다 하는 그런 점을 얘기하는데 이 히브리서에서는 어떤 점을 우리가 주목해서 보게 되냐 하면 우리가 이 기도하는 것이 갖고 있는 의미가 도대체 뭔지에 대해서 잘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이 말에서 말씀에서 보면요.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거든요.
이 모습이 그런데 그 기도하는 우리의 기도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그런 의미로 지금 어 표현하고 있는 거죠 그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하면요.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렇게 나아가는 행위거든요.
그래서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나가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서 이렇게 나아가는 거죠.
보좌 앞에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잘 생각하지 않고 그냥 기도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고 그렇죠.
한편으로는 대단히 두려운 일이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영광스럽고 영예로운 거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근데 그런 점들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기도하면서 얻고 싶은 것들도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구해서 받고 싶은 거 응답받고 싶은 거 이제 그런 것들 중요하죠.
그런데 우리가 구하는 것 중에 아마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귀한 것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렇게 나아가는 그 기도하는 그 행위 자체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면서 무엇을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그렇죠 이렇게 나아가는데 우리가 기대하는 어떤 것보다도 그렇죠.
실제로는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서 나아가는 그 행위 기도하는 그 자체 그게 사실은 대단한 거라는 거죠.
그게 진짜 놀라운 겁니다. 그것을 이제 우리 한국 교회가 좀 생각을 잘 못합니다.
그 부분을 그래서 이제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가 기도하게 된 것이 어떤 그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서 그래요.
그래서 이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고 하는 것을 이제 사실은 그 좀 더 구약적인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에서 그렇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그 모형을 사용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는 것을 훨씬 더 실감나게 표현해 주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 같은 경우 하나님의 성소에 나간다고 하는 거 특히 성소를 지나서 그렇죠 휘장을 지나서 그다음에 지성소까지 가는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정말 어떤 면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일이거든요.
꿈도 못꿔요 꿈 꿀 수도 없는 왜냐하면 지성소까지 나아가는 것은 일반적인 제사장도 할 수 없는 거거든요.
오직 대제사장만 그것도 1년에 한 번 나가게 되는데 그냥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나아가려면 반드시 자기 대신에 뭐가 죽어야 되요
뭐가 죽어야 됩니까? 염소나 이 정도가 아니고요.
반드시 황소가 죽어야 되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속죄 받을 때는 전체가 속죄 받을 때 황소를 사용해요.
우리 개인은 양도 사용하고 염소도 사용하고 비둘기도 사용하고 막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 앞에 대속을 받으려면 반드시 황소를 사용하거든요.
물론 이제 양도 사용합니다. 양도 사용하는데 그 대제사장이 나갈 때는 반드시 황소를 사용해서 자기 대신 죽게 그래서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하는 것이 거기에 표현되고 있거든요.
그래서 지성소를 지나서 성소를 지나서 휘장을 지나서 결국 이제 지성소까지 나아가는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나아가고 그곳에서 뭐 하냐면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되요.
그래서 그 지성소에 들고 갔던 그 피를 언약궤에 이렇게 좌우로 뿌리면서 거기에서 이제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죠.
그 하나님의 어떤 영광을 보기도 하고 대제사장이 때로는 거기서 죽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자칫하면 그래서 이제 허리에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허리에 방울을 이렇게 차도록 그렇게 돼 있어요.
옷에 옷에 방울이 있어요. 그래서 움직이면 방울 소리가 나서 살아 있구나 확인할 수 있도록 왜냐하면 못 들어가니까 그리고 또 실제적으로 이렇게 제사장들은 끈이 끈이 있어서 끈을 길게 사실 이렇게 이렇게 해서요.
한참이 있는데도 안 나오면 밖에서 끈을 당겨서 수거하는 거예요.
시체를 그런 어떤 한편으로는 대단히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대제사장이 그렇죠 그런 과정을 거쳤는데도 불구하고 자칫하면 죽을 수 있는 일이 발생하는데 왜 죽었는지 이제 아무도 알 수가 없죠.
아무도 알 수는 없지만은 어떤 그런 어떤 불상사 자기들이 볼 때는 그렇죠.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정확히 공의의 어떤 집행이죠.
사실은 그런 일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제사장도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부담스러운 거고 대제사장은 정말 목숨 걸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냥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하나님을 뵙는 것인데 하나님을 뵙는다는 것은 그런 거예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예요.
원래 그래서 자칫하면 죽을 수 있어요. 그런 것이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일반 백성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만난다는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네 기대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 일이 자기에게 발생해서도 안 되는 거예요.
네 그 정도로 두려운 일이거든요. 자기들한테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전달하고 할 때는 보통은 뭐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지 하나님이 직접 이렇게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는 것은 너무 무시무시하고 두려운 일이거든요.
그런 얘기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그 자리에 우리가 모세가 이렇게 시내산에서 올라가서 하나님과 40일 동안 두 번에 걸쳐서 40일 동안 있으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말씀 듣는 어떤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데 우리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부름 받을 때도 보면 굉장히 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이제 두려운 광경이죠.
그렇죠 두려움 어떤 두려움 앞에 딱 서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의 발에 신을 벗어라 하면서 이곳은 거룩한 곳이다 그랬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모세가 그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는 자격은 없습니다.
그 모세가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설 수 있었던 겁니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기에 서 있는 거예요.
그나마 하나님이 모세는 살려두신 거예요. 그리고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만나는 그 자리라고 하는 것이 아 그렇게 두려운 일이구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단히 또 영광스러운 일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나아간다고 할 때 어떤 것이 요구되는지가 금방 이제 우리가 생각하게 되냐면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를 통해서 또 모세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장면을 통해서 뭘 알게 되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한 것을 요구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거룩해야 되요.
근데 얼마나 거룩해야 되냐 하면 온전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해야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어요.
그런 사람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견딜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 안에 이 작은 티끌만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그 죄 때문에 그 사람은 죽어요.
그 즉시 거룩하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고 하는 그 존재 앞에 인간은 탁 서는 순간 죄인은 그 자리에서 탁 죽어버립니다.
이게 무시무시한 거거든요.
그런 분이 우리 하나님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인데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빼고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은 사실은 꿈을 꿔서도 안 되고 그게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아야 되고 내가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내가 스스로 나를 죽여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뭐 구하고 이렇게 할 여지도 없이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 자리로 나아가는 거거든요.
그런 게 이제 사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거든요 그 과정에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도 죽지 않는 거 그 앞에 나가는데 그냥 나가는 정도가 아니고 여기 본문에 보면 뭐라고 그럽니까?
담대히 나가라고 그러잖아요. 담대히 나가라고 막 두렵게 나가고 이런 거 아닙니다.
아 혹시 어떻게 뭐가 잘못되지 않을까 이렇게 염려하면서 나아가라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모세도 정말 두려움 가운데 나갔던 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하게 나아가게 됐다는 거죠.
그래서 그러니까 이제 나중에 이렇게 뒷부분에 보면 나오는데 그 휘장을 지나서 새롭게 난 길 그죠 그 사이로 우리가 담대하게 쭉 나아가는 그 얘기를 이제 하는데 그 이미지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들을 담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리신 거죠.
그렇죠. 드려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그 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예표하는 그렇죠.
그 제사는 해마다 드려야 되는 제사 그리고 그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실제적으로 속죄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 제사를 받으시고 우리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죄하실 때 하나님께서 그 속죄의 근거는 뭐냐 하면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속죄를 받은 것도 그 양의 어떤 핏값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양의 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해서 그들도 속죄를 받는 거예요.
양의 피로 인간의 죄를 속함을 받을 수가 없죠. 나중에 이제 그 얘기예요.
짐승의 피로는 인간의 죄를 속할 수 없다고 그랬죠.
로마서에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정결케 되고 그 피를 덧입은 사람, 옷 입은 사람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도 죽지 않는 거거든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피를 흘리신다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은 죽음으로써 우리의 죄에 대한 죗값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죄의 삯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지불하신 거예요.
그 사건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하나님의 진노를 다 쏟아부으신 사건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에게 쏟아부으실 수 있는 진노가 이제는 없습니다.
진노를 다 쏟아부으셨어요. 더 이상 진노를 쏟아부으실 게 없어요.
하나님이 그러면 그다음에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면 어떻게 심판하시느냐 그렇죠 어떻게 심판하셔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거 가지고 심판하세요.
딱 그거 하나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제 의롭다고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렇죠 가족으로 받아주는 그 일이 있게 되고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그렇죠 그것 때문에 결국은 이제 영원한 심판에 떨어지게 되는 거거든요.
그 심판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거기에 있어서 우리가 이제 예수님 믿어라 이런 말을 이제 계속 하는 거죠.
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제 기도할 때 이 부분을 좀 항상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그 구속에 내가 근거해서 그것을 의지해서 나아가는 사람이다 하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렇게 딱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하러 이렇게 딱 나갈 때 아 내가 지금 상태가 좀 어떻고 뭐 그렇죠 내가 지금 기도할 컨디션이 어떻고 기분이 어떻고 그런 거 따지면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우리는 그렇게 내가 오늘 기도하기에는 내가 좀 뭔가 준비가 덜 된 것 같고 덜 된 것 같고 좀 죄송스러운 것 같고 일단은 뭐냐 하면요.
기도하러 딱 나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상태 내 형편과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으로 쭉 나아갈 수 있는 이 자체 그렇게 된 것 자체를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됩니다.
무조건 일단 그것부터 감사하고 봐야 돼요. 네 그것부터 감사하고 우리 마음에 내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사실은 그 즉시 충만해져야 됩니다.
근데 우리가 충만해지지 쉽게 충만해지지 않는 이유는 뭐냐 하면 그런 의미를 우리가 좀 잘 이렇게 배우지 못한 거 그렇죠.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그런 문제가 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좀 더 우리가 생각을 늘 더 많이 사실 해야 되는데 구약을 배우면서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어쨌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를 의지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옷 입혀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본적으로는 뭐냐 하면 의인으로 여기고 우리와 교제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내면의 상태는 기본적으로는 항상 부패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선도 결국은 그 하나님이 보실 때는 빛나는 악이다 그랬죠 그죠?
루터가 빛나는데 우리가 볼 때는 빛나는데 그것도 하나님 보실 때는 다 악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해도 그래요. 그런데 우리가 받아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우리에게 옷 입혀져 있기 때문에 그 피뿌림이 우리의 마음에 이미 이렇게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이죠.
그 피의 효력이 실질적으로 효력 있게 하세요. 성령님께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냥 이렇게 나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혼자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 그렇죠 딱 나아가는 대단한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삶이 하나님과 교제 속으로 이렇게 들어가게 되는데 성부 하나님 계시면요.
성자와 성령 하나님과 함께 확 들어가는 거예요. 대단한 거 아닙니까?
대단한 건데 이게 왕이신 하나님 있잖아요.
생각하면 그 하나님의 있잖아요 옆에 어떻게 우리가 그렇죠 보호를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그렇죠 보호를 받으면서 팔장을 탁 끼고 하나님 보좌 앞으로 딱 나아가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순간 속으로 들어가는 그렇죠 사람들이다 하는 거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존재예요.
우리가 그래서 그것을 이제 우리가 기본적으로는 잘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이미 베풀어지고 있는 부어지고 있는 그 지난번에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 그렇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생각해야 됩니다.
그 부분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돼요. 우리는 거기에서 은혜로 그 속에서 은혜 받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그 부분이 쫙 빠지고 그렇죠 우리가 뭔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때문에 내 신앙이 이렇게 좋은 것 같고 때로는 내가 좀 하나님 앞에 조금은 더 떳떳할 수 있을 것 같고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 싶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이렇게 판단하는 그 자체도 사실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의 어떤 공로 내 의를 내세우고자 하는 어떤 그 태도의 한 측면이죠.
그렇죠 네 그것도 그 면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런 우리가 이제 이게 이제 바뀌어져야 됩니다.
신앙이 점점점점점점 성장한다는 것은 그런 우리의 어떤 판단 생각 이런 것들이 점점점점 약해져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그 타락한 본성 자체가 그것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사람들로 있어요.
예수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잘 안 바뀌어요.
이게 돌아서면 우리는 내가 대단한 것 같거든요. 내가 예수님 믿어주는 게 막 내가 막 기특해요.
내가 기특해 진짜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녀들도 보면 이제 그렇잖아요.
막 부모님 헌신 받아서 섬김 받아서 겨우 이 정도로 애들이 막 걷고 뛰고 이렇게 자라는데 자기들이 자기들이 갖고 있는 어떤 능력으로 막 이렇게 서로서로 서고 걷고 자라는 것 같이 우리가 이제 그런 면이 있는데 세월이 갈수록 이제 우리가 뭘 경험하냐 하면 반복적으로 아 정말 살아보니까 신앙생활을 해보니까 내가 한 게 없더라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살았더라 하는 것을 반복해서 끊임없이 경험하면서 이제 우리가 그것에 체득이 되는 거죠.
이제 머리로만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점점점점 이제 정말 내 존재 전체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 의를 주장하는 그렇죠 내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 어떤 이렇게 이렇게 힘이 딱 들어가는 거 있잖아요.
내 의가 딱 있을 때 우리가 힘이 딱 들어가야 되거든요.
자신감 그야말로 자신감에서 나오는 힘이 딱 들어가요.
목에 힘도 좀 탁 들어가고 손의 힘도 탁 들어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빠져요.
그래서 이제 물에 빠진 사람이 힘이 쭉 빠져야 사는 것처럼 점점점점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내가 살려고 하는 그런 바둥거리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포기하고 조금은 더 빨리 우리 주님께서 이미 나를 이렇게 붙들고 계시는데 그 주님의 손에 나를 맡기거든요.
그러면서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점점점점 이제 눈을 떠가게 되는 겁니다.
점점점점 그렇게 하면서 이제 신앙이 성장해 가고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어떤 일이 발생하냐면 이제 그런 분들은요.
이렇게 내가 이렇게 은혜를 받는데 뭐 이렇게 시간이 필요가 없어요.
제가 이제 이렇게 우리 동네에서 늘 새벽 기도하고 그러는데 새벽 기도 하다 보면 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안타까움이 어떤 게 있냐 하면은 저는 이렇게 앉으면은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없기 때문에 너무 감사하거든요.
그래서 근데 딱 앉으면 눈물이 쫙 나요. 진짜로 근데 우리 이제 기도 이렇게 한 50명 어떤 때는 막 100명씩 이렇게 할 때가 있는데 이렇게 하다 보면 우리 이제 권사님들 기도 소리 들리지 않습니까?
너무 기도를 힘들게 하세요. 제가 볼 때는 은혜가 빨리 이렇게 충만해지지 않아 가지고 그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아 가지고 이렇게 막 기도를 해보려고 애를 막 쓰시죠.
근데 잘 못하 잘 이렇게 이렇게 그게 잘 그러니까 이제 그렇습니다.
그게 이제 좀 안타까운 면이 있는데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께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좀 생각이 많이 부족해서 그런 지식이 그런 점에서 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것을 이제 딱 생각하면 기도하러 나가자마자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한테 나에게 충만하게 임해져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냥 그냥 감사하거든요.
그냥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제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 사도들이 그렇죠.
또 예수님께서 정말 이 복음이 뭔지에 대해서 복음이 뭔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얘기하려고 했던 이제 그 이유를 우리가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하게 결국은 소화해 나갈 때 정말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살아가고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그런 은혜 가운데서 나아가는 것이다 하는 것을 금방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어떤 이제 내가 존재로 나아간다 하는 것을 잘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하면요.
기도하러 나갈 때 정말 마음이 한편으로는 두렵습니다.
한편으로는 정말 우리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는 것이 정말 두려운 일인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정말 이렇게 담대하고 씩씩하게 나아가도 되는구나 생각하죠.
그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그렇죠.
정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하는 거 그것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은 우리 자신이 기도하는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패했는지 죄인인지를 금방 또 지각하게 돼요.
그러면 또 회개하게 되고 그 회개가 돼 우리 기도할 때 보면은 정말 회개하고 싶은데 회개가 안 돼가지고 힘들어 하잖아요.
정말 회개하고 싶은데 회개가 안 되는 거예요. 해보고 싶어도 그런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사실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불분명하고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하나님을 딱 생각하면 우리가 정말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자각하게 되고 그 하나님의 은혜의 어떤 역사 속에서 내 자신이 정말 죄인이다 하면서 슬퍼하게 되는데 슬퍼하면서 동시에 뭐냐 하면 우리를 이렇게 다시 위로해 주시고 내면에 감사와 평강과 그 기쁨을 또 이렇게 드리워지게 해 주시는 그 성령의 역사를 그 자리에서 또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기도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사실 어떤 자리냐 어떤 점에서 정말 특별한 면이 있냐 하면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데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얼마나 우리의 삶 속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지 지금도 역사하고 있는지 하는 것을 보여주는 현장이고 특별히 뭐냐 하면은 우리 하나님이 참으로 인격적이다 하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는 현장이 그 기도의 현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무엇을 느끼냐 하면은 분명히 우리 죄인으로 나가는데 그렇죠 눈물 흘려요.
뭐 눈물 흘려요. 눈물 흘려요. 그런데 눈물 한 번 이렇게 촤악 이렇게 그리고 애통해 하는 그 정도로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마음을 돌리세요.
그게 이제 그 기도의 자리에서 바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죠.
하나님이 막 오랫동안 기다리는 게 아니죠.
이렇게 기도하면서 그래 너가 이제 이 정도 했으니까 이게 한 한 달 정도 너 한 달 정도는 이렇게 기도해라 이 정도 하면 내가 한번 고려해 볼게 너한테 은혜를 베풀지 말지를 내가 한번 고려하겠다는 거죠.
그런 분이 아니라는 거지 하나님이 하나님이 기도를 이렇게 하면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그러니까 그게 사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마음을 금방 돌이키시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인격적이신 분이라는 걸 우리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거든요.
그거를 알게 돼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기도하면서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렇죠.
동시에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우리를 회개케 하고 위로해 주시고 힘을 확 주시는 그 우리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그 기도의 자리에서 딱 만나게 돼요.
그러니까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가 그 하나님을 만나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됐냐 하면요.
마태복음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 뒤에 거 우리 이제 관심이 많은데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는 그 신앙적 상태에 들어가게 돼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어도 안심할 수 있는 이제 안심할 수 있는 어떤 상태가 돼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 주고 싶어 하시거든요.
아니 아들을 내어주신 분이 뭐가 아까워서 안 주겠어요?
하나님 정말 은혜를 베풀고 싶어 하세요. 은혜를 베푸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이 아까워하지 않는 분이세요.
정말로 그런데 우리가 그 하나님의 그 풍성하심을 이렇게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를 자꾸 이렇게 떼를 쓰고 싶고 그래요.
기도 응답받고 싶은데 떼를 쓰게 돼요.
그런 떼를 쓰는 떼를 쓰는 이유는 사실 뭐냐 하면 내가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의 세계로 그 하나님과의 관계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해서 떼를 쓰는 거죠.
그렇죠 근데 이제 이게 잘못돼가지고 하나님을 정말 쪼르기 위해서 떼를 쓰면 안 되죠.
우리가 왜 떼를 쓰냐 하면 저도 우리도 왜 저도 왜 막 기도하다가 막 주여 우리 부르짖거든요.
그게 왜 부르짖냐 하면은 하나님이 들으시라고 부르짖는 게 아니고 제 기도를 하고 싶은데 제대로 하나님 그 은혜를 깨닫고 싶은데 그게 잘 깨달아지지 않고 그 은혜 속으로 내가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한 어떤 안타까움 때문에 그렇죠 그 답답함 때문에 우리가 부르짖는 거예요.
사실은요. 그런 면에서는 또 막 부르짖어서 기도해야 됩니다.
부르짖는 이유도 정확하게 알고 부르짖어야 되는 거죠.
그렇죠 정말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때로는 그런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은 믿음이 없어요.
그렇죠 우리가 믿음이 없어요.
그 믿음이 없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마땅히 믿어야 되는데 그렇죠 믿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정도면 그 정도면 믿어야 되는데 우리가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도 하나님을 잘 안 믿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강적이죠. 그렇죠 진짜 강해요.
우리가 그러니까 그 내 강함 있잖아 그게 정말 그 깨뜨려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정말 간절하게 부르짖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우리 마음 우리가 한편으로는 좀 이제 좀 이게 그 힘도 빠지고 그래요.
사람이 두려움이 있으면 더 막 꽉 힘이 들어가 가지고 염려가 있으면 더 힘이 몸에 들어가서 우리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생명을 보존하려고 하는 그 힘이 강해지거든요.
근데 우리가 이제 이렇게 기도를 그렇게 간절하게 하면 마음에 어느 정도 담대함도 생기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조금씩 조금씩 부어지면서 이제 우리 그런 면들이 조금씩 없어지고 우리 내면에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가 이렇게 임하게 되면 그때 사실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과 이렇게 깊은 교제 속으로 이렇게 들어가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그 자리 기도의 자리 그렇죠 기도하는 그 자체가 정말 놀라운 특권이고 그리고 기도의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계속해서 회복이 되는 그래서 우리 이제 그 기도를 왜 새벽 기도하고 그러냐 하면요.
잘 안 돼서 그래요. 일상 속에서 잘 되면 새벽 기도 따로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근데 그 정도로 우리가 막 간절하게 어떤 면에서는 투쟁하지 않으면 우리가 너무 빠르게 하나님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등을 돌리고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의를 또 이렇게 쌓으려고 하고 그런 연약함에 금방 떨어져 나가는 우리 자신을 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 나는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 그러잖아요.
이제 그것만 또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네 그것만 생각하면 그 은혜를 충분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만 생각하면 율법주의에 딱 빠져요.
그러면 우리의 자연인을 다 죽여버립니다.
그게 금욕주의적인 우리 과거의 믿음의 선배들이 그런 이제 안타까움에 떨어지곤 했는데 복음에 대한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충분한 이해 그죠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이제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그런 우리의 문제 환경이 발생할 때 때로는 정말 새벽을 깨우든지 때로는 정말 밤을 새서라도 우리가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반성하는 뉘우치는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하기도 한 거죠.
그렇죠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이렇게 충분하시고 우리가 구하는 게 구하고 싶은 게 뭔지 아시고 구하고 싶은 게 뭔지 아시고 있어야 되는 게 뭔지 정확하게 아세요 그리고 그것을 정말 주고 싶어 하시는 공급해 주고 싶어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은요.
잘 못 살았잖아요 이스라엘이 가만 보면 정말 형편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은 남유다도 그랬고 북 이스라엘은 더 했죠.
그런데도 북이스라엘이 그렇죠 약 칠백이십 여 년 이십삼년 칠백이십이년에 멸망했으니까 다윗 시대 때부터 하더라도 거의 한 280년 그죠 그 정도 되겠네.
그렇죠 250년 상당히 긴 세월 동안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 오래 참으심 속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역사는 우리에게 뭘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냐 하면 우리 하나님은 정말 오래 참는구나 이 정도 참는구나 하는 것을 딱 보여줘야 이스라엘은 참는다는 거죠.
이 정도 참는다. 그래서 그런 거 생각하면 우리는 사실은 이제 아무리 많이 잘못을 해도요.
괜찮아요. 사실은 한편으로는 괜찮아요. 너무 우리 자신을 너무 이렇게 막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너무 질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래도 막 아무렇게나 살라라는 얘기가 아니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내 상태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서 씩씩하게 담대하게 쫙 나가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나가는 자리는 어디냐 과거에 대제사장이 갔던 그 자리 그 정도 수준입니다.
성소를 지나고 휘장을 지나서 지성소까지 나가는데 사실은 대제사장이 서 있었던 그 지성소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 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것을 일단은 잘 생각하시고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딱 회복하시면요.
우리 기도는 99% 제가 볼때 뭘 다 한 겁니다. 네 날마다 그것을 힘쓰고 잘 하면,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러 이렇게 나아가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묵상하고 때로는 그것을 우리가 표현하자 이거죠.
그런 기도를 많이 하시고 많이 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충분하게 주셔가지고 정말 우리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 말할 수 없는 성령께서 탄식 가운데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분이시거든요.
우리 안에 간구하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게 뭔지를 우리 안에 분명하게 지각하게 해주셔가지고, 우리가 그 소원을 따라서 하나님의 소원 주심을 따라서 다 기도하는 그 일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주님을 섬기는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로 나타나게 돼요.
정말 그러면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들을 우리가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들이 이렇게 참 되기를 바라는데 조금은 안타까운 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들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우리 교회 우리 한국 교회가 좀 충분하게 이렇게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정말 우리가 은혜 가운데서 살 수 있는데 너무 좀 힘들게 신앙생활하는 그렇죠.
우리 이제 많이 웃고 사실 살아야 되는데 우리 교회들이 보면은 좀 여기 이렇게 우리 저기 새생활교회 제가 와서 설교하면서 놀라웠던 것은 얼굴이 다 표정이 엄청나게 밝으세요.
전부 다 그래 대부분 이제 우리가 다른 데 가서 이렇게 설명하고 이렇게 해보면요.
너무 표정이 굳으셔가지고 계속 은혜를 받으신 건지 내가 여기서 설교를 끝내도 될지 고민이 돼요 그런 상황이 계속 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는 막 이게 그런 것을 신경 쓰느라고 이게 설교가 안 돼요.
설교 근데 세상에 이렇게 있으면요. 너무 표정이 밝고 그러셔가지고 너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증거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한 것 같습니다.
하여튼 오늘은 히브리서 이 말씀을 통해서 이런 부분을 살펴봤고요.
나중에 기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고 더 많은 기도의 방법이라든지 또 이제 응답받는 기도의 비밀 이렇게 제목이 그겁니다.
응답받는 기도에 대한 성경적 이해 이 강설을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히브리서 말씀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나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놀라운 일인지 또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인지 깨닫게 배우게 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총의 결과인지 아는 사람들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면서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이 놀라운 특권을 실질적으로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가 더 많이 기도하게 해 주시고 더 간절히 때로는 주 앞에 부르짖으며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날마다 회복되어지는 일이 있게 해 주시고, 그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베풀고자 하시는 모든 은총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들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우리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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