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503말씀 복 있는 사람은(시편 1편 1-2절)...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1편 1절 2절 말씀입니다.
시편 1편 1절 2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아멘 시편 1편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 익숙한 말씀이어서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가를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많이 읽어서 웬만한 분들은 이 말씀을 암송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저는 다 암송 못합니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모르는데 제가 암송을 못 합니다.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그러는데요.
복 있는 사람은 의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자로다.
이렇게 말씀을 열면서 이 시편 1편 말씀은 이 시편 전체를 잘 소개해 주고 있다고 시편 전체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시편 1편 특히 1절과 2절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다고 이렇게 말해도 무방한 그런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익숙하고 또 암송하는 분들도 많은 그런 말씀이긴 한데요.
이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소화하고 있다고 이렇게 어떤 것을 우리가 보면서 그것을 판단을 할 수가 있는데요.
이렇게 한 번씩 판단을 해보면요. 우리가 이 말씀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먼저는 저도 제 자신부터도 이 말씀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가 제 삶을 통해서 제 신앙생활 속에서 잘 드러나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많은데요.
어떤 부분이냐 하면은 특히 1편 2절 말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렇게 이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묵상한다고 하는 이 말이 결국은 이제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하면 첫 번째가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죠.
여호와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인데요.
이제 그 여호와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살려고 할 때 잘 살려고 한다고 하면 어떤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죠.
근데 어떤 과정이 필요하냐 하면은 말씀을 묵상하는 그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래서 묵상하는 이 과정을 우리가 통과하면서 실제로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또 말씀의 어떤 지배 아래에서 잘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는데요.
우리가 문제는 뭐냐 하면은 이 묵상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건지 묵상한다고 할 때 가장 어떤 중요한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를 좀 잘 생각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을 드리려고 그러는데요.
일단은 이 시편 1편을 우리가 전체적으로 이렇게 한번 보게 되면은 두 사람들이 나오죠.
복 있는 사람 그러니까 의인들이 나오고요. 그리고 그들과 대비해서 악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서 의인과 악인도 어느 정도는 분류를 또 해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뭐냐 하면 이 복 있는 의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사실 전체를 가르치는 겁니다.
그리고 악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키는데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기본적으로 언약을 맺은 백성들입니다.
언약 관계 속에 들어가면서 이들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택했다.
너희는 내 백성이다. 심지어는 너희는 내 장자다 하고 이렇게 불릴 수 있는 그런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이제 복 받은 사람들인 거죠.
이게 이제 팔복의 말씀하고 같은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과 팔복의 말씀이 같은 말씀인데 팔복에서도 우리에게 뭐를 먼저 가르쳐 주냐 하면은 이 복 받은 사람들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가르키는 겁니다.
예수 믿는 분들은 다 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미 주어진 복이 어떤 건가 하는 것을 팔복이 가르쳐 주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은 그 팔복의 요소들이 다 이렇게 나타난다고 한 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죠.
그렇죠 팔복의 요소가 다 나타나 그것이 때로는 선명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좀 희미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또 어느 때는 팔복의 그 요소들이 이렇게 전체적으로 잘 안 나타나고요.
한 개 정도만 좀 나타나는 것 같고 나머지는 잘 안 나타나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내가 생각할 때는 여러 가지 이제 어떤 상황들이 나타날 수가 있는데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만약에 그중에서 한 개라도 나타난다고 하면은 실질적으로는 다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이제 점점 확인하게 돼요.
우리에게 이제 신앙이 이렇게 성장하거나 그렇죠.
또 때로는 신앙의 어떤 성장과 조금 무관하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할 때가 있거든요.
그때 우리는 그 팔복의 그 복이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팔복에서 복되다고 할 때 복받은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 복받은 사람들 그렇죠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들, 온유한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 심령이 청결한 사람이 복 받은 사람, 하나님과의 어떤 관계 속에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팔복은 어떤 부분을 보여주냐면은 그 마음이 이렇게 낮아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있는 사람이어서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어떤 면에서는 가난함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그 가난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어떤 영적 파산 상태를 말하는 거거든요.
그 파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결국은 이제 하나님이 우리의 부유함이 되어 주셔야 되는데, 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그 충만하신 부유함을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세요.
그래서 우리가 아직까지 마음이 이렇게 좀 높아져 있거나 내가 뭔가 이렇게 채워져 있다고 생각이 든다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제 충만한 복을 내리시는데 문제가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복을 지연시키거나 때로는 이제 주시지만은 충만하게 이렇게 주시는 부분을 하나님도 자제하세요.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가 마음이 이렇게 높아져 있는 상태에서 그 복을 이렇게 자꾸 이렇게 경험하게 하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궁극적으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기를 원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가 존귀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 시편에서도 그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시편 기자가 우리 하나님 왜 숨어 계십니까? 그런 말씀이 있어요.
숨어 계신다고 그래요. 그래서 나에게 구원자로 다시 얼굴을 비춰달라고 막 강구하는 그런 부분들이 있거든요.
그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이 계속해서 이렇게 낮아지기를 원하세요.
그래서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낮아지도록 하도록 하기 위해서 뭘 하시냐면은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실질적으로는 은혜를 베푸세요.
은혜를 계속 베풀어 주셔 가지고 이제 우리에게 고난 같은 거 있지 않습니까?
고통 그것조차도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수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네 그래서 때로는 심지어는 뭐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은혜 베푸는 수단이 되게 하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짓는 것조차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것도 사용하셔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베푸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거죠.
굉장히 놀라우신 분이세요.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이제 은혜와 자비는 정말 청량할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점점점점 이렇게 알아가게 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는데 그렇게 은혜를 계속 베풀어 주셔서 어느 시점에 우리의 마음이 그러니까 은혜를 받으면 우리의 마음이 계속해서 나도 모르게 가난해지거든요.
낮아져요.
그래서 하나님의 뭘 의지하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을 점점점점 깨달아가면서 우리가 그 신앙의 자리에 딱 들어가게 되거든요.
그때 우리는 정말 이 팔복의 말씀이 복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시편의 이 복도 사실 그런 복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뭐냐 하면 이 복도요. 구약에 이렇게 나와 있는 모든 복들을 우리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팔복이라고 하는 그 말씀을 이렇게 선포하면서 이 복의 실체를 사실은 드러낸 겁니다.
왜 우리 구약에 보면 이 복이 상당히 어떤 물질적인 거 그렇죠 그런 것과 관련되어 있는 거 분명히 그것도 관련이 되어 있어요.
다 관련이 있어 건강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적으로 명예롭게 되는 거 영예롭게 되는 것도 다 그것도 관련이 분명히 있는 겁니다.
네 다 있는데 그 모든 복에서 만약에 이 팔복의 그런 복의 요소가 빠지면 그것은 복이 아니고요.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망가뜨리는 또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거죠.
그렇죠.
그런데 우리가 그런 어떤 과정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그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복의 상태에 우리가 딱 들어가게 되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이 이복으로 그렇죠 더 은혜를 더해 주시는 어떤 수단으로 나에게 지금 주어지고 있다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가 막 이렇게 고통스럽게 가난을 막 어떤 고통과 어떤 것을 견디면서 살도록 그렇게 하는 분이 아니세요.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상태에서 어떤 이것이 부유함이다 하고 있잖아요.
고백할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에서 사실은 기 바라시는 분이시죠.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 마음이 실질적인 하나님의 본심인데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도록 돕는 과정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실질적으로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이 주고자 하는 그 은혜의 자리에서 자꾸 자꾸 이탈을 해서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자리로 돌아오는 데에 실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죠.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아니고 마음대로 이렇게 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 어려움 가운데서 무엇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나타내 보이시냐 하면 인내하시는 거죠.
하나님은 인내하시면 안 되잖아요. 원래 우리가 인내하지 않으셔도 되도록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인내하셔야 돼요. 오랫동안 참으셔야 되는 일이 발생해요.
그것도 하나의 우리와 관계를 회복하는 방식이고요.
또 하나는 뭐냐면 때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셔가지고 은혜 우리가 말하는 어떤 복 건강이나 물질적인 어떤 이런 복도 많이 주셔가지고,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하시면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도록 또 도와주세요.
그리고 또 어떤 경우가 있냐면은 우리가 그런 것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역사를 봐도 알지만은 하나님이요.
그들에게 주었던 모든 부유함을 다 거두어 가세요.
그걸 싹 거둬가시고 뭐만 남기냐 하면 그들이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나님과 어떤 그 관계만 남기세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뭘 하려고 하냐면 그들이 잃어버린 참으로 잃어버린 그 복이죠.
그 모든 부유함과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거든요.
그래서 실제적으로 뭐냐 하면 하나님만 얻으면 다 얻은 거예요.
하나님만 얻으면 다 이제 아주 단순한 거거든요. 이 그래서 이 복도 여기 시편의 복도 결국은 뭐냐 하면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은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형성이 돼서 그 형성 관계가 지속적으로 쭉 가는 사람이 정말 이제 복 받은 사람이 그게 지속성이 오래 가지 않습니까?
그분들은 복을 더 많이 받은 분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 하나님과 관계 맺고 그 상태가 쭉 지속 된 사람들이고 복 받은 사람들인데 우리가 그렇게 잘 못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더 잘 살아라고 사실은 뭐냐 하면요.
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지 않습니까?
근데 이 계시들은 어떤 특징이 있냐 하면은 우리의 눈높이에 잘 맞춰져 있는 계시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계시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신을 하나님 자신을 다 이렇게 드러낼 내는 그 정도 수준의 계시는 아닙니다.
그걸 다 그대로 드러내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다 이렇게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느낌으로 이렇게 계시를 주고 있다고 우리가 이제 인식이 되냐면 이렇게 어린아이를 앉혀놓고 이렇게 그림책을 이렇게 보여줘가면서 설명하는 어떤 엄마 아빠의 모습하고 좀 비슷해요.
우리가 이제 어른들은 애들의 그런 그림책 동화책 같은 것을 사실은 안 봐도 되잖아요.
물론 그 한 번씩 보면요. 너무 수준이 높은 동화책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어른들도 봐야 되는 동화책도 있기는 있는데요.
대부분은 이제 우리가 그런 세계를 찾아서 굳이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아이들은 뭐냐 하면 그 동화책을 우리가 이렇게 반복해서 계속 읽어주지 않습니까?
그 내용이 그 아이들에게 다 이렇게 흡수되기까지 반복해서 막 해줘요.
근데 어른들은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거든요. 성경이 사실은 그래요.
우리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읽어도 되고 이해할 수 있는 그 수준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이렇게 착 게시해 주셔가지고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마다 사실은 뭘 보면서 감탄해야 되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어떤 그 청렴할 수 없는 그 무궁하심을 잘 표현해서 감탄하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이 이 정도로 있잖아요. 계시하신 것에 대해서 감탄해야 돼요.
그게 거꾸로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딱 읽으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이해가 되고 또 또 이렇게 반복해서 읽으면 되게 재미있거든요.
말씀들이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눈높이에 딱 맞춰가지고 하나님 자신을 이렇게 다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그 낮아지심이거든요.
그 낮아질 수 있는 그 하나님의 능력에 놀라야 돼요.
사실은 하나님이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그 하나님의 능력은 대단한 겁니다.
우리 이제 부모님들도 사실은 그래요. 왜냐하면 어떤 부모님들이 좀 수준이 높은 부모님들이냐 하면요.
애들하고 눈높이를 잘 맞추는 부모님들이 계세요.
어떤 경우에는 이제 우리가 요한이 요한이한테 어떤 책을 읽어줘야 되는지 이렇게 감이 없을 수가 있거든요.
근데 보통은 뭐냐 하면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애들이 초등학생 정도만 되면 지금 우리가 초등학교 한 5학년 6학년 정도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때 읽어야 되는 책들을 실제로 그 아이들에게 이렇게 줘보면요.
그걸 재미있게 잘 읽거든요. 우리가 이제 그 생각보다 우리 친구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쉽지 않고요.
그리고 어떤 분들이 그걸 잘 맞추느냐 하면은 그 아이들과 계속해서 이렇게 놀아보신 분들 보면은 생각보다 수준이 그래서 이제 아기를 키울 때 부모님들이 감각이 제일 좋으시다가 이제 애들이 한 20대 30대 되면 이제 감이 없어집니다.
손주 키우기 전까지는 근데 저도 우리 기운이 연상이 5살 3살 때 그때는 뭘 했냐면요.
이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해서 글을 남겼는데요.
그렇게 해서 만든 책이 있습니다. 출판할 수 있는 책이 있어요.
너무 이렇게 귀한 책이기 때문에 출판을 안 해요. 아까워 가지고 네 그 책을 딱 엮어놨어요.
거기에 보면은 기웅이 현상이 기웅이 현상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 그때 책을 쭉 이렇게 한 번씩 읽어보면요.
내가 정말 대단히 뛰어난 유아 교육과구나 하는 것을 깜짝 놀랍니다.
근데 지금은 그 감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 아이들의 동작이 예를 들면 이렇게 있잖아요.
우리 애들의 동작은 단순하잖아요.
이렇게 단선 요렇게 요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보게 하거든요.
근데 그런 동작들이 예전에는 수십 가지를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동작을 하면서 한 30분씩 1시간씩 막 놀아주고 그랬거든요.
근데 지금 생각이 잘 안 나요. 우리가 이제 이렇게 집중하고 관심 가지지 않으면요.
마음을 다 쏟지 않으면 그 눈높이를 못 맞춰내거든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보면요. 대단하세요. 그 눈높이를 착착 맞추는데 이게 성경은 이렇게 딱 보면요.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읽어도 재미가 있어요. 이해가 되고 그래요.
대표적인 그런 사건들이 많죠. 출애굽 같은 경우는 보면 너무너무 재미있거든요.
이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어도 너무 재미있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계시를 해 주셨고 또 우리가 가장 뛰어난 어떤 신학자라고 하더라도 성경을 보면 늘 또 모르는 게 많고 어려워요.
그 두 가지가 다 이렇게 공존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정말 놀랍거든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결국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제 말씀해 주셨는데요.
1차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 수준에 맞게 정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그런 방식으로 말씀해 주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가끔은 되게 감탄도 하고 그래야 됩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하고 그러면서 이제 성경을 우리가 들여다보게 되는데요.
들여다볼 때 우리한테 조금 요구되는 그런 반복해서 훈련해서 습득돼야 되는 어떤 자질이 필요하다 자질의 어떤 부분이 있다는 거죠.
그 얘기는 뭐냐 하면은 이 묵상하는 그런 자질을 갖춰야 됩니다.
이 묵상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옥졸이다 이런 뜻이거든요.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1차적으로는 뭐냐 하면 묵상하는 묵상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을 이렇게 훈련해 가야 되고 또 묵상하는 사람으로 어떤 면에서는 더 성장해 가야 되는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본적으로는 뭐냐 묵상한다 하면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 내어서 이렇게 쭉 읽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히 이 시편 같은 경우 물론 시편만 그런 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이 사실 그러한데요. 이렇게 소리를 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됩니다.
이 소리를 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되는데 읽어보면은 이게 하나님의 말씀 특징이요.
모든 면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읽으면 대단히 이렇게 아름답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모든 소리를 내어서 표현할 수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최대치가 있지 않습니까?
아름다움의 최대치 그것을 그대로 사용해서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읽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아요.
큰 소리로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 너무 좋고요. 조금 부드럽고 이렇게 작은 소리로 내도 너무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하게 확 와닿는 아주 놀라운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완전하심도 이 언어적 완전함으로 드러나고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말씀들은 어떤 또 면이 있냐면은 이 말씀 자체가 이렇게 대단히 아름다운 언어로 사용이 돼서 표현되어져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눈높이에 맞춰서 말씀하시긴 하는데 이 말씀을 우리가 쭉 읽어보면요.
문학적으로도 이렇게 더 뛰어나기가 어려울 정도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이렇게 계시하실 때 하나님이 무엇을 이렇게 고려해서 이렇게 계시하냐면은 하나님이 우리가 이렇게 사용하는 어떤 면에서는 최대치라고 하는 그런 언어 있지 않습니까?
그 언어를 다 사용하셔가지고 하나님의 그 아름다움을 아주 다양하게 이렇게 표현해 놓으셨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은 어떤 부분을 느끼냐 하면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언어가 많다는 거죠.
이게 지금 우리가 한글로 번역되어져서 이제 이렇습니다.
원어로 물론 본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다 이런 뜻을 가지고 표현되어져 있는데요.
이 한글 성경은 대단히 번역이 잘 되어 있습니다. 네 더 주석서를 안 봐도 될 정도로 잘 돼 있어요.
다 이것을 번역하신 분들이 최고의 주석가들이 주경 신학자들이 번역한 거예요.
예 그래서 어떤 것은 조금씩 의역돼 있어요. 그래서 우리 이제 교회에서 가끔씩 목사님들이 그 의역되어 있는 것에 어떤 원 뜻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이렇게 설명도 해주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도움도 되기는 돼요.
그런데 나중에 이렇게 설명하다 보면 결국은 뭐냐 하면 의역한 게 그게 잘 어역 의역한 거예요.
그 의도까지 감안해서 그 직접적인 그런 어떤 본 뜻을 잘 드러낸 대단히 뛰어난 작품입니다.
네 그래서 이 한글 성경만 우리가 보더라도 그런 것들을 느끼는데요.
그것이 그래서 소리를 내서 이렇게 딱 읽을 때 그 많은 언어는 우리 이렇게 내리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맴돌면서요.
우리의 지증의 전체를 형성하는 요소들로 작용을 해요.
그래서 이거는 이제 좀 그거 저기 하이데크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하이데크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그분이 하는 말 중에 아주 멋있는 말이 있는데 뭐냐 하면 언어는 우리 존재의 집이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게 이제 다 이렇게 맞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그걸로 다 표현되어지지 않는 언어로 다 표현되질 수 없는 그런 영역도 우리에게 분명히 있습니다.
분명히 있는 것은 맞는데 그래도 우리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이 언어의 영향을 거의 절대적으로 이렇게 받는다고 말해도 또 괜찮은 거죠.
그래서 우리가 결국은 이제 어떤 우리 존재가 결국 지증의 전체 영역에서 계속해서 뭔가 이렇게 변화가 일어나고 또 성장이 일어나야 되는 사람들인데요.
우리가 이 지정의 영역 속에서 다 각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언어들을 다 갖고 있어요.
내가 익숙하고 많이 사용하고 많이 접하는 언어들을 갖고 있는데 그 언어들을 이렇게 종합을 해보면요.
그게 이제 말은 하나님이 어떠하심을 표현하기에는 좀 이렇게 부족한 그런 언어인 경우도 많습니다.
예 그러니까 표현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언어만 갖고는 그래서 이것이 이제 더 풍성해지고 확장이 돼야 되거든요.
그런데 제일 괜찮은 방법이 좋은 방법이 뭐냐 하면 성경을 소리 내서 일단은 계속 쭉 읽어나가는 거 그러면서 이 성경에 나오는 이 언어들에 우리가 사실은 좀 더 익숙해지고 이 성경에 의해서 우리가 교육되어져야 될 면들이 있다는 거죠.
그런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준에 맞춰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데 그 수준이 어떤 수준이냐 우리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렇죠.
한 발 앞서서 우리를 인도하는 그 정도 수준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계속 읽으면서 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 언어에 익숙해지면서 언어에 익숙해지면서 이제 그 언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그 하나님에 대한 인식들이 있지 않습니까?
언어를 통해서도 지성적으로도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고 때로는 아주 직관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거든요.
우리의 영적인 눈이 활짝 떠지면서 그것을 이렇게 우리가 보통은 뭐냐 하면요.
특히 신앙생활 처음 하시는 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게 해석이 안 돼요.
뭔가 반짝이는 걸 봤는데 영광을 봤는데 이게 저게 뭔가 한 번도 그런 것을 내가 생각한 적도 없고 또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가 아직까지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게 당황스러운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성경을 쭉 읽으면서 그게 내가 이렇게 경험했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영광을 이 언어로 이제 해석해 나가는 거거든요.
그 해석이 이제 많이 이루어지면서 그것이 실질적으로 나한테 뿌리내려서 지속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떤 지식으로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탁 느낀 것은 금방 이렇게 싹 사라지거든요.
분명히 기억에 남아 있는데 그것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가 하나님의 이 말씀에 의해서 그렇죠 해석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내 어떤 지성의 영역에서 하나의 체계로 내 사상과 사고의 체계로 다 형성이 되면 그것은 지속적으로 이제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점점 더 풍성해지면 좋겠죠. 그렇죠 풍성해지는 데 있어서 제일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성경을 이렇게 소리 내서 계속해서 읽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이제 어떤 경향이 있냐면요. 우리 강의 설교가 이제 많이 우리 한국 교회에서 좀 퍼지면서요.
성경을 처음부터 이렇게 쭉쭉쭉쭉 이렇게 공부해 나가요.
체계적으로요. 이건 되게 이제 좋은 방법입니다.
성경을 빠뜨리지 않고 다 읽자 다 공부하자 그게 강해 설교의 어떤 중요한 취지거든요.
그런데 단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를 들면 마태복음을 공부하는데 한 3년을 공부해요.
3년 동안 마태복음만 계속 공부하고 있어요. 물론 이제 다른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 다른 것도 공부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함께 우리는 성경을 읽어가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자칫하면 성경을 한 3년 동안 마태복음만 계속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읽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런 이제 교회들은 그러면 안 되는 게 아니고요. 강해 설교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고 그런 분들은 교회가 추가적으로 성경을 따로 읽는 그런 시간을 가져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설교 일주일에 한 번씩 이렇게 해서 성경에서 전체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렇게 계속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제 성경을 부지런히 이렇게 빠르게 읽어가는 분들이 그런 어떤 지식의 체계를 가지고서 성경을 좀 더 잘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 속에서 이렇게 생활하면서 성경을 이렇게 부지런히 읽는 계속해서 읽어나가는 이런 노력이 우리에게 잘 있어져야 된다는 것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는 이제 리딩 듀서를 하게 되었어요.
이게 쉬운 게 아닌데 우리 교회가 리닝 지도서를 하면서 이렇게 열심히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읽으면서 이렇게 계속 글도 쓰시는 분들도 있으시고요.
글을 써가면서 더 깊이 생각하면서 읽는 분도 있으시고 그냥 좀 빠르게 그냥 쭉 읽어가는 분도 있고 또 어떤 여건이 지금 잘 안 돼서 우리가 함께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성경을 개인적으로 또 부지런히 읽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면은 너무나 감사한 것 같아요. 그래서 성경을 우리가 지금 이게 상당히 빠른 속도로 우리도 계속해서 읽어 가고 있는데요.
이것은 우리 교회가 제가 이제 소망하기는 계속해서 이런 모습이 우리 교회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계속해서 읽어서 이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 언어들에게 우리가 조금 더 익숙해지고 또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이제 읽다 보면은 그 단어는 단어는 알겠는데 내용은 모를 수 있거든요.
성경에 보면요. 단어는 알겠는데 전체적으로 뭘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괜찮거든요. 그건 그건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뭐냐 하면은 우리가 성경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거의 이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감사하게도 웨스트미드 신앙 고백서라든지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이라든지 벨직 신앙 고백서라든지 대소 요리 문답 이런 것을 통해서 성경 전체가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뿐만 아니라 그 성경을 통일성 있게 성경을 통일성 있게 있게 읽도록 충분히 도와줬다는 거죠.
너무 감사해요.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가 만약에 웨스 민트 신앙고백사나 대소요의 문답을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는다면 만약 한국 교회가요.
우리는 이 성경이 전체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소화하고 성경을 읽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지금 심각한 거죠.
왜냐하면 우리 한국교회가 이 장로교 교회는 대소열의 문답을 우리가 믿고 있는 바에 표준적 문서로 삼겠다 하고 교회가 다 모여서 공의회에서 결의를 한 거예요.
이것을 우리가 우리의 신앙의 표준으로 삼아서 우리가 이것에서 이탈하지 않겠다 주로는 어디로 이탈하냐면요.
우리 시대에는 좀 그런 면이 없지만 처음에 1600년도에 그런 것이 명확하게 세워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금방 천주교로 가버려요.
천주교에서 계속 살았기 때문에 그게 굉장히 익숙하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게 몸에 배어가지고 자연스럽게 이렇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교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 믿어 신앙고백서를 사용 이제 써서요.
우리가 왜 계속해서 장로파 교회로 개혁파 교회로 종교 개혁을 우리가 그 정신을 따라서 계속해서 살아가야 되는가 하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가르쳐 준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 이제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 걸고 그렇죠 그걸 우리한테 작성해서 물려줬어요.
그러니까 별직 신앙고백서만 해도 기도도 브레라는 분이 작성을 했거든요.
한 분 목사님이 거의 다 작성했어요. 도와주신 분이 있는데요.
또 프랑스 신조 프랑스 신앙고백서를 기도드브레가 참조해서 이렇게 벨릭 신앙 고백서를 만드는데요.
그거 해가지고 그거 만들고 가르치고 하다가 결국은요.
그 교회들은 다 거의 다 돌아가시다시피 순교하시고 그랬어요.
기도도 그래도 순교해요. 그렇게 그걸 우리가 믿고 믿어야 되는 바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교회가 이렇게 붙들려고 하는 그 과정에서 그런 역사적인 아픔이 있었구나 하는 거 그것을 우리에게 주는 이 교훈을 우리가 잘 생각하면서 우리가 믿어야 되는 바가 뭔지를 우리가 잘 알아가도록 얼마나 힘써서 노력해야 되는가를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요.
또 그것이 그들의 어떤 목숨과 바꿀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다면요.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우리가 이제 좀 알고 거기에 눈 떠 가는 그런 모습이 우리 교회 속에 조금 더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소율이 문답도 같이 공부하고 있잖아요.
너무 감사한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교회가 굉장히 좋은 교회가 되고 되는 것 같은데 왜냐면 이렇게 좋은 교회를 다녀본 기억이 잘 없어요.
네 그러니까 성경을 계속해서 읽어가고 또 성경을 그래서 제가 이제 목사입니다.
교회 목사에 성경을 안 읽으면 안 돼요. 압박을 받으면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밤에 1시에도 숙제를 하고 잡니다.
그래서 제가 리딩지 전사 할 때 아직까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글을 다 썼어요. 네 개가 냈습니다. 그런 데다가 우리가 소율이 문답을 같이 이렇게 공부하는데 이렇게 교회가 전체적으로 이렇게 강론하는 식으로도 좋지만은 그래서 이게 소그룹으로 한 세 그룹으로 만들어 가지고요.
지금 소율이 문답을 같이 공부하고 있는데 너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제 사실은 뭐냐 하면 우리 장로 교회는 이렇게 하는 것이 정상적인데요.
이제 이렇게 하려고 막 이렇게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은 지금은 어떤 분들이 볼 때는 막 놀라기도 하고 그렇게 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가 하는 얘기를 또 할 수 있는 그런 부분도 있어요.
그만큼 우리가 이렇게 멀어진 면이 있는데요.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이 묵상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전체적으로 계속해서 반복해서 읽어가는 것과 그다음에 뭐냐 하면 이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를 그렇죠.
우리가 배우면서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반복해서 계속 생각하면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우리가 점점 더 눈 뜨고 그 지식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에서의 성장이 계속해서 되어질 때 우리가 사실 여기서 말해주고 싶은 시편 기자가 정말 복되다고 하는 그 사람의 자태가 다 드러나는 거거든요.
기본적으로는 뭐냐 하면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이에요.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 받은 사람들이고요. 그 복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제 참 충만히 드러나고 실제로 우리가 그 복에 우리도 뛰어들어서 참여해서 그것을 실질적으로 만끽하면서 사는 사람의 모습, 그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거지 않습니까?
그 모습이 나타나려고 할 때 우리에게 이렇게 잘 묵상하는 것이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오늘 이제 한번 딱 기억을 한 번 더 하면 좋겠어요.
우리는 지금 잘하고 있으니 잘하고 있는데 더 잘하려고 그런 거예요.
그래서 같이 성경을 우리가 같이 읽어가는 그렇게 해서 이 성경의 말씀을 많이 묵상하는 모습 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걸 이제 묵상을 열심히 안 하면 다른 걸 묵상해요.
다른 걸 묵상해요. 막 이렇게 옛날에 이제 트로트 가요 이 들으면요.
되게 은혜롭잖아요. 그것도 그것도 은혜로 와요.
어떤 때는 막 지시보다도 은혜롭나요? 눈물이 나고 그래요.
감동을 받아가지고 근데 그건 너무 묵상하면 안 된단 말이죠.
너무 묵상하면 안 돼요. 그래서 우리는 결국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어야 되고 또 성경에서 우리가 가르쳐 주고자 하는 그것을 계속해서 배워가면서 그것을 말씀과 함께 이렇게 묵상해 가는 그런 모습이 우리 속에 이제 잘 드러나게 된다고 하면 그야말로 이 시편 1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복된 사람의 모습이 우리 속에 이렇게 충만하게 드러 날 걸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시편 1편 말씀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살피면서 참으로 복된 사람들로 주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드리게 되고 또 우리가 주님의 이 복에 참여하는 사람들 되기 위하여서 우리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것이 우리 삶의 한 부분이 되기까지 우리가 계속해서 훈련해 가야 되는 것도 생각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 세상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묵상해 가는 그 모습을 주 앞에 나타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리게 되고, 저희가 이것을 조금 더 힘을 들여서 또 인내해서 잘 감당해 가고자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이런 작은 수고를 주님 앞에 잘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그 복 우리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 놀라운 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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