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새생활교회 당회장 박주동 목사

예배/말 씀

주를 경외하는 신앙 - 시편 25편 14절 • • • 박주동 목사

예배하는 사람 2026. 5. 24. 00:47

박주동 목사

 

 

260517말씀 주를 경외하는 신앙 - 시편 25편  14절  • • • •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25편 14절 말씀입니다.
시편 25편 14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으며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아멘 주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경유하는 신앙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시편 오늘 이 말씀 14절 말씀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으며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우리가 요즘 전도서를 읽고 있습니다. 시편을 그동안 읽어왔었고 지난 금요일 토요일부터 전도서를 잠언을 읽고 있죠.
잠언을 공부하고 있는데 잠언에서 우리가 경외한다고 하는 이 단어를 가장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잠언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시편에서도 많이 등장하고 또 성경 전체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이런 말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우리가 성경을 이렇게 창세기부터 쭉 읽어 나갈 때 대단히 이제 인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그런 사건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이 놀랍고 우리를 때로는 놀라게 하고 감탄하게 하는 그런 사건들이 많은데 어 아브라함이 자식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그 사건은 대단히 사실 충격적이고 그 시점에서는 그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모를 수 있는데 우리가 특히 이스라엘의 왕조사를 이렇게 점검해 보게 되면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재물로 이렇게 바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분이시고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그것을 가정히 여기시는가 하는 것이 잘 드러나거든요.
이제 아직까지 그 후대의 그런 이제 의식들이 아브라함 시대 때에 이렇게 명확하게 하나의 중요한 가치로 중요한 어떤 진리로 체계 있게 존재하는 것은 아닌데 어쨌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 하고 정말 놀랍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한 그 대표적인 사건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받고 나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대단히 그 하나님의 명령에 머뭇거림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아브라함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가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본적으로 대단히 믿음이 있는 분이신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처음에 오셔서 아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이렇게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서 순종해서 가나안 땅으로 이렇게 직행하는 것을 볼 수가 있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아브라함이 대단히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그 먼 거리를 여행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아브라함이 이제 본래 아버지 고향이 갈대야 우르 쪽인데요.
갈대야 우르에서 하란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죠.

아마 거기에서 어떤 그들의 어떤 신앙적 정체 현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곳에 살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내가 너희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이렇게 명령하시는데 사실은 이제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은요.
오랫동안 그곳에 살면서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뭘 원하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그 곳에 머물면서 그들이 다시 그 우르 땅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우르라고 하는 땅은 그 당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어떤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발전된 그런 도시였습니다.
그러니까 도시에 목욕탕이라든지 목욕탕이라든지 공공 도서관이 있을 정도로 우리 현대 시대에 중요한 어떤 그런 행정기관이라든지 관공서라든지 이런 것들이 이미 그 시대에 다 있었어요.
대단히 발전한 도시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아브라함의 과거에 이제 믿음의 과거의 선조들이 삶의 뿌리를 내리고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제 그쪽으로 가는 게 훨씬 좋은 거거든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쪽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제 거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하랑까지 와서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오랜 세월을 이제 보내게 되는데 그곳에서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버티는 거죠.
버티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제 나이 75세였습니다.
적은 나이가 아니죠. 그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가지고 내가 너희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이렇게 명령했을 때 아브라함이 주저하지 않고 그 가족들 전체를 이끌고 이동합니다.
약 거리를 이렇게 지금도 이렇게 재 보면요. 직진 거리로 직선 거리로 한 천 킬로 정도 되는 거리예요.
서울에서 부산 갔다가 다시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그 정도 거리거든요.
그런데 그 거리가 이렇게 길이 잘 닦여진 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보통 그렇게 먼 길을 갈 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가 우리가 느헤미야서 같은 데 에스라서 같은 데서 잘 드러나죠.

그러니까 그들이 바벨론의 포벨 포로로 끌려가서 다시 돌아올 때 그들이 어떤 군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렇죠.
그 곳으로 안전하게 이동한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그런 상황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다 이렇게 예상하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해서 순종하는 그 모습을 보게 되는데 아브라함이 나중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 주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식을 주겠다는 약속이 있거든요. 그리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하는 그 외에도 이제 아브라함에게 몇 가지 땅과 관련돼서 또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 주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해 주세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그 하나님의 약속을 딱 이제 믿고 가는데요.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제일 컸던 기대가 한 가지죠.
뭐 다른 거는 사실 별로 관심이 없고요. 자식을 얻고 싶은 거예요.

자기를 대를 이어서 상속할 수 있는 그게요.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아브라함은 일반적인 어떤 한 가정의 가장이 아니고요.
한 민족의 가장이거든 한 민족의 왕적 존재입니다.
이제 족장인데요. 이게 그 사람들에게는 왕적인 존재예요.
아브라함이 그러니까 주인과 종의 관계 속에 그들이 설정돼 있는 거죠.
여기서 자식을 얻지 못하게 되면은 이게 이제 대가 끊어지는데 이 대가 끊어진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이전에 아브라함의 선조들이 있지 않습니까?
선조들에게 이제 그 선로 가면 노아까지 가요. 쭉 노아까지 가는데 그 선조들에게 주신 그 언약의 말씀 약속의 말씀이 이게 하나님께서 후손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상속시켜 주시는 분이시거든요.
근데 그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내가 너희와 너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 하는 그거예요.
너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게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그 복의 말씀이 후손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후손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복의 단절을 말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이제 자식이 없는 것도 문제인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은 최고거든요.
뭘 받아도 다 최고죠.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 한 하나님이 언약 맺은 사람과 언약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 하는 아버지가 되어 주겠다고 하는 약속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복하고 비교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이 아닙니다.
근데 그런 복이 있잖아요. 중단될 어떤 위기 가운데 놓여진 거예요.
사실은 아브라함은 살아가면서 소원이 한 가지 아마였을 겁니다.
제발 상속자를 달라.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그 자식 준다고 하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데 24년이 지나도 자식을 하나님이 안 주세요.
24년 결혼을 했는데 만약에 24년 동안 자식을 못 가진다고 하면요.
힘들 것 같아요. 한 요즘 한 3년만 지나도 그렇죠.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되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이 한 10년 정도 견딥니다.
대단한 거죠. 약속을 직접 받았어요. 누구한테 받았냐 하면요.
하나님한테 직접 받은 거예요. 어떤 분이 와가지고 보니까 너 저기 당신은 한 10년 안에 자식 낳을 것 같아요.
그렇죠 맥 짚어가면서 나을 것 같아 그런 차원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직접 말씀하신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10년을 이제 견디는 겁니다.
그래서 10년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엘리에세를 자식 삼으려고 해요.
안 되는가 보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는데 1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하나님의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고 거기에 대해서 추가적인 반응이 없으신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잘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엘리에서를 자식 삼으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죠.
자식을 누구를 줍니까? 이스마엘을 줍니다.

그래서 얘가 그건가 보다 그 후 후사인가 보다 하고 생각할 만한 그런 어떤 상황이 펼쳐지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내가 너의 몸에서 날짜 그리고 너의 아내를 통해서 후사를 주겠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해라 하고까지 말씀해 주세요.
그러고 나서 이제 아브라함이 그 사라와 함께 한 1년 정도 시간을 보내고 나서 나이 99세에 이삭을 얻게 되는 거죠.
네 그러니까 정말 소중한 아들을 얻은 거예요. 14년 동안 그리고 그런 우여곡절 그걸 겪으면서 그 믿음의 열매로 그렇죠 최종적으로 그들의 그 믿음의 열매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아들인 하는 것은 우리가 좀 어느 정도는 생각해 볼 수가 있죠.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힘들게 아들을 딸을 얻지 못해서 충분히 다 공감하기는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 한번 생각을 해보는 거죠.

그렇죠 아 정말 그 자녀는 단순하게 한 또 아들이면서 어 그 족장 그러니까 그런 왕적인 그 통치를 계승할 수 있는 계승자로 또 언약의 상속자로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그 이삭이라고 하는 아들은 너무나 소중한 아들인 거죠.
그래서 한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그 이삭을 키우고 양육하면서 그 늦게 그렇죠 자녀를 얻은 그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찾아오셔가지고 그 너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치라 딱 그런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그 이해하기가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거의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런 명령을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딱 주신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한번 생각해 보면요.
이렇게 소화가 잘 소화가 잘 안 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돼요.
어떤 상황에도 사회에서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죠.
우리 그걸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거죠. 내가 죽는 한이더라 그런 게 우리 우리 미나입니다.
일반적인 이제 우리의 반응 인데요.

아브라함이 그때 어떻게 반응하냐면은 바로 일어나서 그다음 날 장작하고요.
중 조흥 둘이 데리고 또 이사하고 해서 칼 챙겨서 하나님이 지시한 산으로 갑니다.
3일 동안 먼 길을 가죠. 먼 길을 갑니다. 가면서 생각할 수 있는 충분히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거리 아닙니까?
정말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런 충분한 시간이면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그 3일간 있잖아요.
얼마나 그 긴 세월인지 자식을 죽이러 가는 시간이기 때문에요.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죠. 그런데 그 돌아가지 않습니다.
가장 가가지고요. 거기에서 종을 놓고 두리를 놓고 이제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이 모리아 땅에 모리아 이제 산이라 불리는 곳이죠.
그곳에 나중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성전이 세워지는데요.
그 모리아 산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서 바로 올라가는데 그때 올라가는 길에 이삭이 묻죠.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는데 아브라함이 번제할 양은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신단다 하고 이제 얘기해요.
그러고 나서 이제 도착해서 하나님이 도착하자마자 아브라함이 도착하자마자 그곳에 단을 재단을 만들고요.
그 자리에서 이삭을 바로 결박하고 그 대단 위에다가 올려놓아요.
그리고는 이제 뭐를 하는 겁니까? 불을 붙이려고 그래요.
불을 그냥 그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면 머뭇거림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불을 탁 붙이려고 그래요. 생각만 해도 감당이 안 되는 그런 믿음이에요.
사실 딱 붙이려고 하는데 너무 그걸 아브라함이 순종을 너무 잘해가지고 하나님이 뭐 이렇게 말씀하고 뭐 이렇게 할 겨를이 없었어 바로 이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그 행동을 딱 그 자리에서 긴박하게 중지시키죠.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 뭐냐 하면 너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 그렇게 얘기해요.
그러니까 이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제 그 사건을 통해서 뭘 이제 생각하게 되냐면요.
오늘 우리가 이제 하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는데요.
그 경외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믿음의 조상 그렇죠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잘 보여줬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저런 거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줘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의 그런 보는 이제 오고 오고 오는 그런 모든 그 믿음의 후손들에게 하나의 믿음의 본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거거든요.
아브라함의 모든 삶의 믿음의 족족들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 아브라함의 그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그 아이삭을 바치려고 하는 그 순종을 보면서 뭐라고 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평가하냐면 너가 이제서야 나를 경외하는 줄 내가 알겠다 이렇게 얘기하는데요.

그 상황에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경외하는 신앙이 뭔지를 딱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되냐면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대신할 수 있는 그렇죠.
그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서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딱 명령하시면 우리가 그 어떤 것에도 토를 이렇게 달 수도 없고 변명할 수 없고 하나님을 이렇게 실질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이 아니다 하는 거죠.
아브라함의 그 모습은 하나님의 명령은 어떤 명령이냐 내 자신을 드릴 뿐만 아니라 그렇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은요.
사실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거죠.
그렇죠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보다 귀하거든요.

내 생명보다 더 귀한 이삭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그 속에는 이미 나를 하나님께 이미 겠다고 하는 그 고백이 아브라함의 그 고백이 전제되어 있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상황 그런 어떤 명령조차도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그 명령조차도 거부해서는 안 되는 그런 명령이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거든요.
우리는 잘 그것이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우리는 그것이 감당이 잘 안 되는 거니까 아예 안 되죠.
감당이 안 되는 거 그런데 하나님께서 탁 명령하실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 경위 하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더 옳다고 하는 거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더 옳고 선하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것을 내가 믿겠습니다 하고 이렇게 적어도 결단할 수 있는 그 정도 거기에서부터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시작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은 이제 이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그 신앙 정도 돼야 경외하는 신앙인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그 모든 아브라함의 25년 동안의 그 삶이 전체가 내가 너가 나를 경외하는 신앙이었다는 나를 경외하는 삶이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어떤 평가에 더 가까운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이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도요.
이렇게 제대로 잘 못 살 때 많아요. 죄를 짓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거슬리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은 그 뿌리가 뭐냐 하면요.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딱 만나면 만나는 사람들만 갖게 되는 아주 독특한 그런 정서거든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우리 신앙의 이렇게 정수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경외심 이 경외심은 뭘로 구성되어 있냐 하면은 이 경외라고 하는 단어가 경자가 존중하다 이런 경자죠.

왜 하면 두려워하다 경외할 때 외자가 두려워한다 이런 뜻이고요.
경하면은 존중한다 인정한다 존경한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거를 원래 이제 히브리어로 보면은 경외라는 말이 야레라는 말인데요.
그것을 우리 유교에서 많이 썼던 불교에서도 넣지만은 경외라고 하는 이 단어로 표현을 했는데 경외라는 단어가 아주 딱 맞아요.
그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을 정도로 그 히브리어의 야래라고 하는 그 표현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가 경회라고 하는 단어인데 우리는 이제 경외라고 하는 이 단어의 의미를 성경을 통해서 정확하게 이제 이해하게 되는데요.
이 경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렇게 인정하고요.
거기 이제 믿음이 포함되는 거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또 자비로우신 분 사랑이 충만하신 분 이 하나님의 두 속성이 하나님께 있어요.
그 하나님은 이렇게 어떤 때는 이렇게 뭐죠?

사랑의 어떤 하나님으로 어떤 때는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이렇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은 온전히 사랑이신 분이시고요.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세요.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딱 하나님과 마주하게 되면요.
하나님에게서 그걸 동시에 다 이제 봐요. 우리는 그걸 한꺼번에 다 못 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동시에 우리는 한꺼번에 탁 있잖아요.
다 받아들이지 못해요. 안타깝지만 그게 우리 이제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온전히 갖고 계세요.
그 실질적으로 뭐냐 하면 하나님의 그 온전한 거룩하심에 하나님의 온전한 그 선하심과 자비로움과 사랑이 같이 이렇게 뿜어져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가장 충만한 사랑을 보게 돼요.
그 충만한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충만한 그 거룩하심을 또 보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 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은 어떤 우리가 반응이 나타나냐면은 이 시편의 말씀과 같은 반응이 나타납니다.
이 시편 말씀 보면요. 우리 오늘 읽었던 말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다고 그랬죠.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이 언약이라는 말을 여기서 표현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제 이 언약 의 하나님이시고요.
하나님은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예요.
그렇죠 언약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자녀 장자요 자녀요.
백성이라고 불리는 그 관계 속에 들어간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러니까 그 관계라고 하는 것은 어떤 관계입니까?
조금 더 이렇게 쉽게 보면요. 그냥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대단히 친밀한 관계 속에 이미 이스라엘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스라엘을 보면은 하나님과 그런 관계성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어떤 모습이 나타나냐면요.
하나님을 대단히 두려워해요.

그러니까 이게 이제 두 모습이 이스라엘에게서 이렇게 나타나는데요.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밖에 반응할 수 없게 하는 그 어떤 하나님을 본 거예요.
우리가 이제 보면 출애굽의 역사에서 그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는지를 잘 이렇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애굽에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실 때 그렇죠 얼마나 좋아요 구원해 주실 때 너무 좋죠.
그냥 그 하나님은 우리만 편해하는 하나님이죠. 우리는 정말 특별히 사랑하는데 그 특별하다고 하는 것이 그냥 좀 더 많이 사랑하는 이 정도가 아니고요.
이렇게 그냥 보면요. 하나님이 애굽은 미워하고 자기네들만 사랑하는 이것은 사랑이 아주 보면요.
뒤쪽으로 치우쳐 있고 기울어져 있는 그런 사람 같아요.
그러니까 하나님 보면 그냥 우리 아버지인 거죠. 어떤 순간에도 우리 편 나를 변호해 주고 나를 대신해서 싸워줄 그런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만한 그 사건이 출애굽입니다.

그런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 신외산에 도착해서요.
물론 이제 그전에도 계속 있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시내산에 도착해서 이렇게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니까 그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니까 그 하나님 가까이 막 가고 싶겠죠?
네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데 하나님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요.
그게 그렇게 하면서 그 산에서 뭘 이렇게 하나님이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냐 하면은 이렇게 지진이 있고 땅이 흔들리고요.
나팔 소리가 들려요.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나팔하고 친숙해진 이유가 있습니다.
나팔 소리가 산에서 들리는데 그게 산에서 이렇게 누가 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떤 그 신현이죠.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하심이 그 나팔 소리와 이렇게 함께 나타나는데 그의 나팔 소리는 어떤 우리가 이제 듣고 감상하라고 이렇게 들려지는 나팔 소리가 아니고요.
그 나팔 소리가 들려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도무지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들이 수 다가갈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해요.
그 어떤 분위기 속에 만약에 우리가 탁 처해 있었다면은 우리는 어떤 거냐 하나님의 어떤 호기심 호기심을 가진다든지 궁금해하든지 그런 것은 상상도 못해요.
이 두려운 상황이 빨리 없어져서 평안했으면 좋겠다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뭔가 하나님이 어떤 자기들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어떤 분노하시면 진노를 내리시면 우리는 다 멸망할 수밖에 없겠다 하는 그런 두려움에 그들이 사로잡힌 거거든요.
근데 그 나팔 소리가 보면요. 출애굽기 20 2장인가 그렇습니다.
20 21장 점점점점점점 이렇게 커지거든요. 점점점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와만 관계 맺으세요.
그래서 모세와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하나님 사실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렇게 말씀하고 싶은 분이세요.

그냥 모세하고만 말하고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하고는 그냥 좀 이렇게 차별하는 그런 분 아니세요 모세와 나중에 이렇게 하나님 친밀하게 관계 맺으시는데 그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하고 다 관계 맺고 싶어 하세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거룩하신 분이셨어요 그 하나님 앞에 나 제대로 나아가 가지 않으면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제대로 그렇죠 하나님이 내신 어떤 방도 에 따라서 나아가지 않으면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분이세요.
하나님 그게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 과 이 죄인이 딱 이렇게 마주쳤을 때 이 죄인들에게 나타나는 그거 그냥 당연한 현상이거든요.
그 현상이 뭐냐 하면 그냥 죽음입니다. 죽음 거룩하신 하나님을 죄인이 이렇게 딱 맞닥뜨리게 되면요.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실은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내산에 이렇게 계시는 거예요.
같이 계시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이스라엘이 다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보호하기 위해서 신앙 산에 계시고 아무도 올라오지 말게 해라.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만 아까 여기 하셔서 이렇게 교제하시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모세도 뭐냐 하면 자기의 그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사람도 아니거든요.
모세도 뭐냐 하면 나중에 장차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의가 전제되어져서 그 의에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겁니다.
네 그래서 이제 그 모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건가 하는 것을 하나의 그 예로 샘플로 보여주는 거죠.
그렇죠. 그렇게 관계 맺고 싶어 하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그런 모세와 같이 또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친구처럼 대하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관계 맺고 싶어 하세요. 그런데 그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사람의 모습이 요구된다고 하는 거죠.

그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살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나아오지 못하도록 이렇게 하시는데요.
어떤 분이 예수님을 안 믿다가 하나님을 안 믿다가 하나님을 탁 믿지 않습니까?
믿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이 사랑과 거룩하심을 동시에 만나게 돼요.
신앙이 이렇게 겨자시 않을 만큼 있잖아요. 작아도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 사랑의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과 이 자비로우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동시에 이 탁 그 하나님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인식을 하든 인식을 못하든 간에 그래요.
그 믿음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에는 그 하나님의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그 지식이 담겨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우리의 믿음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우심까지 포함되 있죠.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사랑이 우리의 믿음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성적으로 이렇게 이해를 못하더라도 그 진리의 빛이 그 믿음 속에 담겨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우리가 하나님을 딱 믿는 믿는다는 것은 선물을 받는다고 그러잖아요.
그 선물을 딱 받을 때 그 우리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에 대한 인식이 이미 들어와 있어요.
그것이 있기 때문에 뭐냐 하면요. 성경을 딱 읽으면 그거를 바로 지각을 합니다.
신앙이 처음에는 이제 없을 수가 있어요. 하나님 믿는 것 같은데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요. 어느 순간 이제 이것이 맞다 하는 거 왜 예수님을을 보면서 제자들이 그렇게 반응했는지 이제 예수님이 그렇죠 이렇게 배 우편에 그물을 던져라 하고 그물을 막 잡았을 때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베드로가 그 상황에서 뭘 딱 깨닫냐면요.
내가 우리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그게 좀 이상한 반응이거든요. 그러니까 믿음이 딱 있으면요.
그 주님과 이렇게 관계 맺을 때 그런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는 믿음이 있는 사람 믿음을 가지고서 우리가 그 성경 말씀을 이렇게 읽으거든요.
그게 이해가 돼요.

왜 베드로가 저렇게 반응했는지 공감이 된다는 거죠.
그리고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우리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도 생각해도 그렇고 또 성경에서 이렇던 사건 속에서 우리 주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나타내신 것이 아 저렇게 나타내셨으니까 저렇게 반응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하고 우리 동일하게 어떤 고백에 이렇게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실 뭐냐 하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사랑이 그렇죠 사랑과 이 두려움을 다 포괄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습니다.
그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이렇게 하나로 딱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건 뭐냐 하면 이 믿음이 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점점점점 더 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까지 성장하기를 원하시냐 하면은 아브라함이 이상을 받지는 그 정도까지 성장하기를 원해 우리는 이제 그 정도까지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근데 우리가 교회사를 이렇게 보게 되면요. 비슷한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자식을 바친 그 사건은 없어요 없어요 없는데 비슷한 사건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 역사 속에서 믿음 때문에 고난 받고 박해받고 순교하시는 분들에게서 우리가 그것을 어느 정도는 보내게 되고요.
사실 뭐냐 하면 우리는 이제 그 신앙의 여정 속에 이렇게 쭉 계속해서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 이렇게 모습들, 우리 이제 우리가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제 말씀 앞에 나아가려고 조금 더 한 번 더 결단하고 한 번 다짐하고 또 한 번 때로는 반성하고 그렇죠 내가 잘못했습니다.
인정하고 또 돌아와서 다시 주님께로 또 나아가고 주님께로 이렇게 등 돌리고 달아났다가도 다시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거죠.

말씀으로 돌아가는 주님이 주님 앞에 우리가 나아가기 위해서 기도의 자리로 다시 이렇게 돌아가는 그것을 우리가 끊임없이 일생 동안 사실 반복하는데 그것이 이제 사실 뭐냐 하면은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게 이제 우리가 사실 매일의 삶 속에서 매 순간 사실은 우리 주님 내가 믿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주님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그렇게 돌이키고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내가 실질적으로 느끼면서 이렇게 인정하면서 사는 사람들 사람이기 때문에 그 주님을 내가 경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을 이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그렇게 나아가면서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신앙이 계속해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보여줬던 이 신앙을 향해서요.
계속해서 성장해 이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 경외하는 이 신앙에 대해서 우리가 좀 이렇게 생각을 하고자 하는 것은요.
이 신앙이 우리에게 있고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우리의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믿음인가 하는 것을 좀 잘 이렇게 기억을 하면 좋겠다 하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신앙이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입니다.
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때로는 이렇게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보게 되면요.
이렇게 두려움에 말씀 앞에 떨림이 있어요. 어떨 때는요.
말씀을 보면서 막 떨어요. 그게 말씀이 무서워서 떨린 게 아니고 그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에 떠는 거거든요.

그 신앙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건강하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져야 될 신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다 하는 것을 이 단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실질적으로 뭐냐 하면 하나님과 가장 친밀히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점점 더 친밀히 동행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뭐냐 하면 이 언약에 대해서 시편이 말씀하고 있는데 이 그리스도께서 그 살과 피로 우리와 맺은 그 언약이 사실 우리가 붙들어야 되는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진리고 신앙의 근거거든요.
그래서 원래적으로 원래는 매주 성찬을 해서 그것을 기념을 해야 됩니다.
사실은 우리가 이제 한 두 달에 한 번씩 하고 있는데요.

그것을 항상 이제 기념하도록 한 것은 그 속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제 잘 이렇게 들여다보게 되는데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뭐냐 하면 죄에 대해서 진노하신 그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 모든 진노를 끝까지 그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으시고 다 받아내신 그 사랑이 그 사건 속에 같이 이렇게 겹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베풀어주신 것을 이렇게 잘 들여다보게 되면 은혜를 들여다보게 되면요.
거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잘 드러나게 되고 그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 주님에 대한 경외심 가운데 이렇게 서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 있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만약에 발견하게 되면요.

우리는 이렇게 즉각적으로 우리가 정상적인 신앙에서 이탈했다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과 하나님의 경외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멀어진 어떤 신앙에 대해서 멀어진 상태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많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요. 이제 우리 개인적이면서 우리 공동체적인 이 측면을 다 생각해야 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개인적으로는 뭐냐 하면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하려고 하고요.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 하든지 순종하려고 하는 그 겸손함이 이제 있는 거죠.
그렇죠.

공동체적으로도 뭐냐 하면 어떤 모습이 나타나느냐 하나님을 우리가 경애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게 되고 그리고 우리가 이제 요구하는 서로 우리를 이렇게 섬기고 사랑하도록 하는 그 명령이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섬겨주셨는지를 우리가 경애하는 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늘 그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죠.
내가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하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이렇게 다독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은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내 삶의 중심에 또 우리 관계의 중심에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 중심에 이렇게 딱 두고요.
그 거룩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신 그 주님의 주님의 다스림과 통치 속에 이렇게 아는 그 이렇게 모습에 잘 놓여져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는 그 신앙 가운데 잘 서 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경외하는 신앙을 하나님이 끊임없이 찾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이제 주셔가지고요. 뭘 찾으세요?
믿음을 찾으시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음이 있는가를 내가 보겠다 그러세요.
우리에게 경외심을 주셔가지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를 너가 나를 참으로 경유하는지 내가 계속해서 지켜보겠다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신앙을 우리 주님께서 근본적으로는 우리 신앙을 붙드시고 인도해 가세요.
그런데 우리가 뭘 우리에게 요구하냐면 끊임없이 그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그 순종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우리 주님은 우리를 양육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우리 이제 신앙의 여정 속에 이렇게 있고요.

우리 교회가 그 여정을 향해서 계속해서 잘 나아가고 있는지도 한번 잘 살피면서 그 방향을 향해서 잘 나아가도록 기도하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 내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되는 우리 교회 공동체적으로 감당해야 되는 것들은 무엇인가 하는 것도 우리가 이제 잘 생각하면서 그것을 어 감당해 가면서요.
우리가 점점점점 이렇게 세월이 가면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우리가 경외하면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우리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고백드리는 그런 모습이 우리 속에 잘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시편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 보여주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는지 알려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가 누구라도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만나지 않을 수 없고 또 경유함 가운데 우리 하나님께 주목하게 되고 우리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우리가 다른 것을 선택하고 중요하게 생각했다가도 다시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도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몸속에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그 신앙의 모습이 충만히 나타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가 참으로 한꺼번에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그런 신앙에 이를 수는 없사오나, 우리의 매일의 일상 속에서 우리가 작은 것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계속해서 신앙이 성장해 가게 해 주시고, 하나님을 향한 경의심 속에 우리의 신앙이 점점 더 성장해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런 신앙을 통해서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시고 또 우리에게 더 충만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신 줄 잊어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시고, 그 신앙의 그 자태가 우리 가운데 잘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