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새생활교회 당회장 박주동 목사

예배/말 씀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예레미야 14:7-9)..... 류성민 목사 250810

예배하는 사람 2025. 8. 15. 00:38

류성민 목사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예레미야 14:7-9)..... 류성민 목사 250810

성경 말씀 읽겠습니다. 예레미야 14장 7절에서 9절입니다.
예레미야 14장 7절에서 9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 구약 성경 1073페이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 구약 성경 1073페이지 예레미야 14장 7절에서 9절 말씀입니다.
찾으신줄 알고 제가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오.
고난 당한 때에 구원자시오.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까.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을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아멘 아멘 일단 새 생활 교회에 설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부족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될 때 큰 은혜가 있으시길 소원합니다.
네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내용을 오늘 말씀드릴 텐데요.
좀 우울한 내용을 말씀드릴 테니까 뭐 잘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좋은 얘기입니다. 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일단 예레미야 14장 쭉 펴놓으시고요.
제가 앞뒤로 제가 말씀드릴 테니까 따라오시면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예레미야가 지자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 자체로 매우 침울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로 두 개로 쪼개졌죠.
그중에 열 지파에 해당하는 북이스라엘은 이미 아수르에 의해서 BC 722년에 멸망해서 사라졌습니다.
어 그리고 남유다만 남은 상태였죠. 그 상태가 지금 예레미야가 예언하던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은 남유다마저 없어져 버릴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어 예레미야의 역사를 보면 없어졌어요.

이번에는 바벨론이라는 엄청난 강대국이 그들을 압박했습니다.
남유다는 다양한 정치 군사적 묘책을 내면서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때로는 속이고 때로는 옆나라와 동맹을 맺어 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남유다는 더욱 몰락의 길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유린된 남유다는 왕이 교체되고 또 유력한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등 상당한 혼란을 겪은 이후 결국 나라가 멸망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제일 유명한 사람이 누구였죠? 다니엘과 세친구였죠?
예레미야는 이렇게 몰락하는 남유다의 마지막을 함께 지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유다 백성들에게 남유다의 환란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13장에 보시면 한장 앞에 보시면 허리띠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허리띠는 무엇이죠? 허리띠는 옷을 고정하는 거죠.

그리고 옷을 고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 역도 선수들 허리띠 하는 거 보면 아 요즘 또 피티 헬스 하시는 분들 다 아시죠?
허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허리띠는 몸에 몸을 지탱하고 힘을 쓰게 하는 아주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이 허리띠는 몸을 힘쓰게 하고 지탱해 주는 중요한 것인데요.
11절 보시면 13장 11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하나님의 허리띠로 사용하려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힘을 지탱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셨던 것이죠.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그 계획을 무시했습니다.
듣지 않았습니다. 13장 7절에 보시면 예레미야는 그 띠를 유브라데 물가에 두었죠?
어떻게 되었을까요? 썩었죠? 당연히 썩고 맙니다.
그런데 그 다시 물가에 두었다가 다시 가져와서 그 띠가 썩었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버려야죠. 쓸모가 없습니다.

썩은 티로는 허리를 동여 맬 수도 없고 옷을 고정할 수도 없고 힘을 낼 수도 없습니다.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 됩니까? 쓰레기통에 쳐 넣어야겠죠.
그렇게 더럽고 썩어 기능할 수 없는 띠는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유다 사람들은요.
그 허리띠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들이 버려지는 것은 너무 마땅하고 당연했습니다.
쓸모없고 가치가 없으니 버려야죠. 안 그렇고 쌓아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집안이 쓰레기통이 됩니다. 다 버려야 됩니다. 그래야지 깨끗해지죠.
구체적으로는요. 남유다라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셨던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서의 기능은 더 이상 할 수가 없어요.
북이스라엘은 너무 갈 때까지 가버려서 이미 망해버렸고요.
남유다만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셨는데 남유다도 이제는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싹 없애버려야죠. 회복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예레미야의 메시지였습니다.

남유다의 멸망은 그들의 악한 짓에 대한 마땅한 보응이었고, 그 결과 온갖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 발생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치와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13장 27절의 끔찍한 표현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의 죄악이 얼마나 컸던지, 그 더러움이 얼마나 끔찍한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영적 간음을 행하는 자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도대체 예루살렘이 언제쯤 깨끗하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을 지녔습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하나님만을 따라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 계획하셨던 게 그겁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타락하여 버린 거죠. 탈락 이후 그 목적을 잃어버렸는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한 사람, 한 민족을 선택하시고 말씀과 법을 주심으로 그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를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누구를 선택하셨죠?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허락된 놀라운 특권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창조 때 계획하셨던 일을 이스라엘에게 이루신 것이죠.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다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냥 보기에도 이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더러움에 빠졌습니다.
이제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을 꿈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남유다가 처한 영적 현실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눈물로 예언한 것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니네들 다 썩었다. 니네들 다 완전히 쓰레기통에 쳐넣어야 할 악한 죄인들이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얘기야 자 오늘의 이야기는 좀 더 끔찍한 얘기입니다.
정치적인 현실 나라의 멸망에 대한 임박한 위기는 대외적인 상황으로 인한 것이라 아 그래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느냐 이런 의심을 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바벨론이 이스라엘보다 선한가요 악한가요?

더 악해요. 객관적으로 왜냐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없어요.
그나마 이스라엘은 형식으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가려고 했죠.
앗수르랑 바벨론은요 그런 것도 없어요. 더 악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사 이자들이 오려고 할 때 아 이게 하나님이 그렇게 심판하실까 이런 의심을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마지막에 보호하시지 않을까 이렇게 의심하면서 물어봤던 선지자가 있죠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하바국 선지자 있습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은 이 왜란의 시기에 내부에서도 무너질 만한 상황을 주심으로 사실은 남유다에 처한 상황이 그냥 우연한 결과가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그 내용이 이제 14장에 나오는 가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뭄은 바벨론이 가져온 환란입니까? 아닙니다.
바벨론이 무슨 능력이 있어 가지고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있어라 비 오지 말라 이렇게 할 수가 있어요.

없죠 누가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유다는 국가 멸망이라는 정치적 위기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가뭄이 왔을 때 아 이게 하나님이 주신 거구나 그렇게 알아야 돼요.
내게 불행이 닥치고 내게 고난이 닥치고 아픔이 닥쳤을 때 아우 저 놈이 잘못해가지고 어 저 xx가 잘못해 가지고 내가 이런 꼴을 당하고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합니다.
아닙니다. 누가 잘못했다고요? 내가 잘못했다.
유다가 잘못해서 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위기를 그러면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 벌을 우리 때문에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찾아야 돼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유다의 죄악 때문에 그 처벌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뭄이 그 증거입니다. 메마르게 목마르게 아무도 할 수 없겠다.

가뭄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아 발생하지요. 비를 주시는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시죠? 그렇다면 유다 사람들이 이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물론 이미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이 해결책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원인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배제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있구나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냥 하나님을 배제하고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우리 안에서만 찾죠.
그냥 가뭄은 우연히 발생한 자연재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들이 믿는다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어요.

무슨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가 발생했을 때, 아 이 일에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바라시고 기대하시는 거 아니 우리에게 뭔가 돌이키기 원하시는 것이 있는가 찾아보는 것이 마땅한 것이죠.
네 가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주신 자연재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재앙입니다. 이스라엘은 바깥에서 외적으로 인해 안에서는 자연재해로 인해 매우 심각한 위험에 처했습니다.
가뭄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이 보여주는 또 다른 의미도 있죠.
하나님은 가뭄을 통해 남유다 백성뿐 아니라 그들이 거하는 모든 삶의 환경을 저주하셨습니다.
보통 자연재해는 대처가 가능한 사람들, 그러니까 부유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피해가 덜하고 여러 삶의 정황이 어려운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피해를 많이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뭄은 좀 달랐어요.

이 가뭄은 좀 특별했어요. 2절에 보시면 성문의 무리 곧 백성의 지도, 성문에 앉는 사람들은 백성의 지도자다라는 뜻입니다.
이 백성의 지도자들도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부위가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여력을 사용해서 물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우물을 파기도 하죠.
그러나 그런 노력 자체가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동일하게 모든 계층이 물이 없어서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이제 할 일이 없습니다. 밭이 다 갈라져서 씨앗을 심을 수가 없습니다.
심는다 해도 물이 없으니 자라지 않죠. 이제 미래의 삶에 대한 소망이 없어질 정도로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이는 비단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암사슴이 자기 새끼를 버렸습니다.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요?
그런 일은 자연 상황 가운데 발생하기 어렵죠.

메말라 생명 활동을 할 수 없어 이제 미래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 잘 견딜 수 있는 동식물이 있죠.
예를 들면 들나귀 같은 동물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가뭄은 이 동물들에게도 답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견딜 수 없는 재앙이다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가뭄은 그들 모두에게 주신 그 재앙이었고,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의 큰 저주였으며, 이 정도는 이후의 삶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고 땅의 모든 동식물들에게 적용되는 저주였습니다.
그러니까 남유다는 한마디로 저주의 땅이 된 것이다.
그 땅은 하나님의 저주가 퍼부어지는 땅이었습니다.
바깥에서 남유다를 위협하는 군사적 세력이 있었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가뭄을 통해서 그 어떤 대처도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남유다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죠.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상황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악입니다. 우리의 타락이 심각합니다.
우리가 주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안타까운 사정을 보고 이런 상황까지 이르게 된 정확한 원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처한 상황이 중요하지 원인이 중요하냐 이렇게 하시는 분들이 있죠.
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끔찍한 상황까지 이르게 하셨는가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부르짖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듯 빨리 해결해 달라고 빨리 좋은 것 좀 내놓으시라고 하나님께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오히려 우리가 이런 비참한 상황을 당할 만한 자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니까 우리의 죄악의 결과가 바깥에서는 왜적의 침입이요 내부에서는 자연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우리의 탓임을 인정합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이후로 그는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일로 아담은 죄를 경험적으로 알게 되면서 타락하게 되었죠.
타락의 결과는 즉각 드러났습니다. 잘 아실 겁니다.
먼저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존재로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붙어 있던 온전함, 하나님과 함께 있는 그 온전함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보면 볼수록 부끄러워요. 그러니까 가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하나님께서 동산에 서늘할 때에 동산에 가시니 그가 도망쳤어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을 향한 선의 방향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던 삶의 방향성, 하나님 앞에 살면서 아름다운 선을 행하는 그 삶의 방향성이 사라지고 이제는 숨을 쉬고 생각을 하고 움직이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쪽으로 즉 죄를 짓는 방향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성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제대로 된 방향성 하나님을 향한 것이 무엇인가 어느 쪽으로 향해야지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식과 감정과 의지 다 잃어버렸어요.
그렇게 그는 완전히 타락했으나 그의 자손들은 오직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그의 죄성을 날 때부터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 니다.
그리고 아담과 동일한 죄를 항상 짓게 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원자입니다.
원주 타락의 결과인 원주입니다. 이제 타락에 대해서 좀 말씀드릴 텐데요.
타락은 오염과 무능으로 나눌 수 있어요. 오염은 뭐냐 하면 더러워졌다라는 거고요.
무능은 선을 행할 수 없다라는 능력의 문제입니다.

먼저 오염에 대한 얘기를 말씀드렸는데 이것을 인격적 관점, 인격이라고 얘기할 때 보통 설명하는 건 지식과 감정과 의지, 이 세 가지 관점으로 설명하거든요.
이 세 가지 관점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타락으로 인해서 먼저 지식입니다.
우리는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명하셨는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온갖 방식으로 신적 전제를 찾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지식과 감각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라고 표현하지만 우리는 시공간에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경험과 인식에 기반해서 초월적 존재를 상상합니다.
그래서 피조물에 기초해서 창조주를 추론합니다.
이런 사고들은 100% 오류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신을 섬기죠 동물을 섬긴다든지 뭐 그런 식이죠.
가장 고상한 종교는 뭘 섬기냐면요. 아무것도 없는 걸 섬깁니다.
이게 진짜입니다. 옛날 불교도요.

그 불교도 불상이 생긴 게 이게 최근의 유입입니다.
최근에 최근이라고 얘기하면 뭐 그 최근이 아니지만 어쨌든 맨 처음에 불교라는 게 생겼을 때는요.
뭔가 고상한 존재를 섬겨야 된다라고 얘기할 때 그 고상한 존재는 없어요.
왜냐하면 그 고상한 존재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할 때도 아 인간을 초월한 존재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존재지 표현할 수 없는 존재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근데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에이 그래도 아무것도 없으면 우리가 좀 섬기기가 어렵잖아 그래도 좀 고상한 존재 짐승을 하든지 하나님이 힘이 셀 것 같으니까 힘 센 동물 하나님은 무서울 것 같으니까 무서운 동물 이런 식으로 하는 거죠.
하여튼 100% 오릅니다. 잘못된 거예요. 창조주는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에 피조물이 피조물로서 어떤 하나님은 어떤 존재일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거는 틀린 겁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서 유추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 충분한 지식이 사람에게 없어요.
타락한 이후로는 그 온전한 지식이 사라졌어요.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뭐 제가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오직 성경이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주셨거든요. 이게 계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주시지 않았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거나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네 자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타락을 통해서 잃어버렸죠.
그다음은 사람에 대한 지식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죠.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요. 일단 하나님은 일단 사람의 영적 육적 구성을 파악하고 그것에 가장 적합하게 행동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영적인 부분이 있고요. 육적인 부분이 있어요.

하나님의 피조물이 온전하게 존재한다라는 것은 그 존재의 구성과 목적에 적합하게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몸이 어떠함을 완전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릅니다. 몰라요. 여러분 몸에 대해서 완전하게 아십니까?
저보다 다 거의 연배가 다 많으실 텐데 저도 몇 년 전부터 이게 앞머리가 올라가면서 왜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빠졌 몰라요. 그리고 제 아들도 좀 저보다 키가 컸으면 좋겠는데 이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키가 잘 안 크더라고요.
고민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몰라요. 제가 이제 저도 배가 좀 며칠 전에 아팠는데 제 딸이 이제 배가 아파가지고 오늘은 교회를 못 갔어요.
왜 아픈지 음식 때문에 아마 그랬을 거다 하는데 어떤 음식이 어떻게 돼서 개만 문제가 생길까 모릅니다.
여러분 항상성이라는 거 들어보셨어요? 아시죠?

몸이 몸이 항상 우리 우리는 이제 그 정온 그러니까 그쵸?
아니까 정 36.5도라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 몸이 막 이것저것 막 움직여요.
이걸 지키려고 하는 게 항상 성이거든요. 그런데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혹시 아십니까?
몰라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는데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막 기작을 하는데 몰라요.
심장이 하루에 몇 번 뛰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왜 지금도 뛰고 있는지 몰라요.
그냥 뛰고 있어요. 소화가 되고 있죠? 점심 잘 드셨죠?
소화가 되고 있는데 몰라요. 왜 그런지 몸 아세요?
모른다 아담은요.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알았을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그 백성이 어떻게 자신의 몸을 유지하는지 인간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잘 알게 하셨기 때문에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타락하지 않은 사람 아담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잘 알고 있었겠죠.
그런데 우리는 그 인간에 대한 지식도 사라졌어요.

타락 이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잊어버렸습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단순한 지식의 지식 단순한 대상적 지식이 아니라 우리 몸에 대한 정상적 조절도 이루어버렸습니다.
아담은 몇 년 살았습니까? 타락한 이유지만 900년 넘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90년만 살아도 제 생각에 자연 환경 변화도 있지만 우리 몸이 뭔가 죄로 인해서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뭐 정확한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 가서 이렇게 하나님한테 좀 자세히 좀 들어야겠지만 분명한 변화가 있었을 겁니다.
지적 능력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담은요 모든 동물이 쫙 자신 앞에 올 때 어땠습니까?
너 코끼리 넌 딱 보니까 본질이 코끼리야 그다음에 어 너는 그렇지만 뭐 바퀴벌레 이런 식으로 보면 압니다.
다 알아요. 다 본질을 꿰뚫어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릅니다. 저는 애가 많습니다. 애가 많은데 애가 다섯이거든요.

근데 제가 느끼는 거는 제가 육아를 잘 못하기도 하지만 아 애들은 다 다르다 그래서 어 누구 그 뭐 첫째는 어떤 특징이 있고 둘째는 어떤 특징이고 셋째는 어떤 특징이 막내는 어떤 특징이 뭐 그렇게 유형화 시켜서 얘기하시는 분들을 들으면요.
저 사자다 이런 느낌이 저는 그렇게 유형화시키는 거 정말 싫어해요.
왜냐하면 보니까 애들이 다 달라요. 언제부터 다르냐면요.
태어나는 그날 알겠더라고요. 다르다라는 셋째 보고 넷째 보니까 달라요.
얘는 처음이에요. 다섯째 보니까 또 달라요. 이거 혹시 녹화됩니까?
저희 다섯째는 저는 넷째까지 키우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우리 애들은 들어눕는 애들이었구나 땡깡 부리면서 응 들어눕는 애가 없구나 감사합니다.
그게 아마 아빠와 엄마가 착해서 그러겠구나 아니더라고요.
다섯째가 들어 눕더라고요.

누군가는 막내라는 걸 그 본성상 알아서 그렇다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지만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어쨌든 드러눕더라고요. 그런 애도 나오더라고요.
많이 낳다 보니까 나오더라고요. 죄인입니다. 죄인이에요 인간이요 완전히 타락했어요.
애들을 보면 압니다. 애들이 순진하다고요 순수하다고요 순수하게 악하죠.
하나님을 섬기자고 교회 가자 그러면 아침에 성경 보자고 보자 예배 드리자고 하면요.
아 뭔가 보상이 있지 않으면 안 합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뭐 안합니다.
네 애들 욕하는 거 거기까지 하고 여러분 가인 아시죠?
가인과 아벨 첫 번째 사람들의 자녀들이죠 어땠습니까?
형제가 둘밖에 없는데 둘이 친하게 지내면 얼마나 좋아요.
근데 첫째가 둘째를 시기해서 죽여버립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타락했어요. 인간은 인간이 누군지도 몰라요.
타락에 있어서 하나 지식을 잃어버렸는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고요.
사람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고요.

또 하나는 만물에 대한 지 이어 버렸습니다. 아까 제가 잠깐 얘기했지만 만물이 딱 나왔을 때 창세기 2장 19절에 보면 이 아담 만물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르시죠.
그 아담이 싹 다 알죠. 근데 지금은 모릅니다. 타락한 이후 만물은 저주를 받았고요.
사람에게 순종하는 관계에서 대적하는 관계로 변경되었습니다.
땅은 가시를 내었고 사람은 종일 수고하여야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이것이 타락의 결과입니다. 자 그다음에 이제 지식에 대한 얘기를 끝냈으면 이제 감정에 대한 얘기를 하면요.
감정은 어떻습니까? 감정은 뭐냐면 선호 좋아하는 것을 가리키는 거예요.
감정이라는 게 막 그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뭐 이렇게 정서적인 거 그거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게 좋아하는 겁니다.
내가 뭔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게 감정이에요.
사람은 원래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고 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거 그렇게 아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이후 사람은 어떻게 되었냐면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명하신 거 순종하는 거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하면 대번에 왜 내가 그대로 따라야 됩니까?
나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습니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나의 행복을 추구하면 안 됩니까? 이렇게 얘기해요.
여러분 자녀들 다 키워보셨죠? 다 아시죠? 부모들은 다 경험해 봐서 아는 거잖아요.
야 그때는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이렇게 하는 게 맞은 거야.
근데 또 부모들은 성격이 급하니까 지름길을 알려줍니다.
근데 이 아이들은 꼭 알려주면 부모가 얘기하는 거 반대로 꼭 해 봐요.
부모님을 못 믿는 거죠. 애들을 보면 사람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네 우리는 그렇게 순종하는 거 싫어합니다.

정답을 알려줘도요. 그 정답을 알려준 것 자체를 싫어해요.
왜 나를 그렇게 얽매게 하느냐 이렇게 싫어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명하시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과 독립하여 독립되는 것을 소원하는 그것을 원하고 바라고 좋아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감정의 타락에 극악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래 사람 원래 사람은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맨 처음 봤을 때 뭐라고 얘기했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다. 어 넌 나야 나야 너무 좋다.
내가 나를 보는데 어찌 안 좋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내게 있어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귀하다라는 거죠.
그렇게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타락 후에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사람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합니다. 그리고 어떤 우위를 점해서 상대방을 억누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이기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매우 왜곡되었습니다.
스토킹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일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죠.
더하여 타락한 감정을 따라 사랑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요즘 드라마 보면요. 무서워 죽겠어요. 마음이 안 간다고 막 사랑 얘기하고 결혼 관계에 있는데 부부 사이에서 이제는 당신한테 가슴 가슴 마음이 뜨거워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
두근두근 거리지 않는다 이런 헛소리를 하면서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니까 이게 헤어져야 된다 이런 미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죄인인가 타락했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현실입니다.
여러분 아시잖아요 사랑이 그런 감정 가슴의 두근거림 그거 아니잖아요.
이성 관계에서 어느 정도는 필요할 수 있겠지만 그런 감정이 식었으니까 사랑이 아니라고 나는 진짜 사랑 두근거리는 사랑을 찾았다고 다른 사람을 쫓아가는 거 이거는 불륜입니다.
불륜이에요. 어리석은 짓이죠.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없는 존재예요.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행한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지켜가는 것이지, 사람의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어떤 타락한 감정으로 인해서 지켜가는 것이 아닙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거 들으면 진짜 아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감정에 타락했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완전히 어긋나 있습니다.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지도 타락했어요. 의지는 뭐냐 하면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내가 이것을 선택할 것인가 저것을 선택할 것인가 오늘 음료수를 아주 맛있는 걸 하나 주셨는데, 제가 그 설교단에서 이 물을 마실지 음료수를 마실지 여러분 선택할 수 있는 거 이게 의지의 능력이에요.
이게 의지입니다.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충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바른 행위를 선택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어요.
이웃을 사랑하려는 선택에 대한 의지도 없습니다.
만물을 지키고 누리는 것을 선택하려는 의지도 없습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결론적으로 타락한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마땅히 사람, 그 타락의 행위는 사람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지 못했고, 만물에게 있어서 왜곡된 관계 가운데 파괴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과 정상적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항상 떠나고 싶어 하고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네 아니에요.
우리의 본질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고자 합니다. 사람과 관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 질서들을 남겨두셨어요.
그래서 망하지 않게끔 하셨어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사실은 교회가 그 마지막 날까지 보존되어서 구원할 자들을 교회로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이 땅은 사실은 극악한 사람들이 정치 세력을 잡고 있고 사회 모든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어서 악과 악이 부딪혀서 망해야 맞는 시스템이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악과 악이 만나가지고 악과 악이 이 사회를 악과 악이 충돌하더니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게끔 버티고 있어요.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기이한 기적입니다. 솔직히 생각해 보십시오.
자본주의가 무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경제 시스템입니까?
아니죠 사회주의는요 아니죠. 그런데 그 시스템들이 다 뭉치더니 오 하더니 어떻게 맞아 돌아가서 이 사회가 그나마 의롭게 그나마 좀 공정하게 그나마 살 수 있게끔 버티고 있어요.
이거 정말 기적입니다.

정말 기적이야 원론적인 것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학자들의 그런 주장을 보면 기독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지금 그들은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의미의 특별히 관심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놀랍게 은혜를 주셔가지고 이 사회 시스템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 살리시는 일들을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죠. 그러나 마지막 날에 이 모든 것들이 싹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온전한 공의를 이루시는 그날이 옵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경험할 것입니다.
어쨌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이웃 사랑의 원리를 강조하셨죠.
그런데 그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은 이 땅에서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진짜 내 몸처럼 누군가를 혹시 사랑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없습니다.

채우는 제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피곤, 아침에 일어나서 잠에 썩 꼈을 때, 저녁에 잘 때 피곤할 때 제 아내가 뭘 얘기하면 아 그냥 안 하고 싶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네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거요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100% 완전한 선을 행하신 적이 있으실까요?
저는 확신컨데 저에게는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 자체가 워낙 높아서 그래요.
만물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요즘에 날씨 이상하죠 아 요즘에 좀 서늘해지셨으니까 알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무 더웠잖아요.
제가 볼 때 한국 날씨가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독일에서 팔 년 공부하면서 있었는데 지금 제가 온 지 팔년이 됐거든요.
근데 제가 독일에 얼마 전에 이렇게 물어보니까 독일도 날씨가 많이 바뀌었대요.
그 짧은 시간 가운데 엄청나게 바뀌었던 거예요. 여름이 엄청나게 더워졌어요.
예 기후 변화 있습니다.

이 기후 변화가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탄소 연료를 많이 써서 그렇대요.
뭐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느 정도의 영향을 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기층의 온실 효과로 인해서 지구 온도가 올라가는 일들이 있고 북극의 얼음이 녹고 해수면은 높아지고 바닷물의 흐름도 달라지고 기후도 바뀝니다.
그래서 많은 동식물들이 죽습니다. 누구 때문이죠?
사람이 죄인이라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고 서로 부정적인 영향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타락의 영향입니다. 이처럼 타락은 사람의 인격적 특성을 따라 지성과 감성과 의지 모두에서 타락했습니다.
그 예가 바로 예레미야 본문에서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전쟁과 국가의 멸망이라는 끔찍한 외부적 혼란과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가뭄이라는 내부적 재앙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타락이 크고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이 일을 당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특히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를 주셔서 바른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에 대한 지식을 주시고 바른 감정에 대해서 교훈하시며 돌보시며 바른 선택을 하도록 의지를 북돋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역사가 가르키는 바가 그거거든요. 선지자들, 왕들이 와서 한 일들이 그것이거든요.
그런데 어때 했습니까? 이 일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 제사장들과 왕들과 선지자들 중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드러낸 결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전적 타락이요. 오염입니다. 그들에게 외적인 무엇이 있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고 돌보시고 경고하시고 훈육하신다 하더라도 그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썩은 허리띠였고요.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담을 수 없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철저히 실패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절망적 상태에 있었습니다.

사람의 이런 끔찍한 타락의 상황에 대한 고백은 마땅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나라고 다를 것이다 아니에요. 똑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남유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차이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겠는가 저 아무리 우리가 악하다 하더라도 저 이방 나라들보다는 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망할 염려는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시련을 주시다가 종국에는 구원하시겠지 이렇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푸신 호의를 자신들의 생존의 근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리 말씀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기들에게 마지막 날에는 평안이 있을 것이다.
승리가 있을 것이다. 거짓을 교훈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예레미야가 그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자신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자라는 것은 그들의 자만이 되었고요.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알지도 원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았으면서 언제든지 자신들에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쉽게 자신이 행하면 하나님은 당연히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셔야 한다라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다 사람들의 속마음을 모르셨을까요?
다 아시죠 그들의 교만을 아시고 그들의 불경건을 아시고 그들의 지식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을 향한 적개심과 불의와 그다음에 불의를 선택하는 의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더하여 그들이 그들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께 선을 행할 능력도 심지어 죄에서 돌이킬 수 있는 능력도 없다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호소는 그리 애절합니다.



자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을까요?
이것이 우리의 처절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무능합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얘기한 게 이거예요. 아무것도 보지는 못한다.
사람 자체의 능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얘기하면서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 능력이 없으니 나를 도우사 나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만물을 사랑으로 돌보는 참 파수꾼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은 그것을 잘 따라가면 우리도 잘 할 수 있다.
이 말 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셨으니 우리는 그 예수님 믿고 따라갑니다.
이거예요.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셨으니 우리가 이것을 따라가면 상 주시겠구나 이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고 그냥 따라가라는 거예요.

부족하지만 따라가라는 거 믿음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그 본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으니 예수님께 해달라고 강구해야 하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그 아름다운 일을 행하시는 방식은 나와 하나가 되어 나로 예수님을 닮는 것처럼 만드시고 그렇게 도우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함께 행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알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열린 선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은요.
하늘나라 가서도 바뀌지 않습니다. 착각하시는 게 있는데 하늘나라 가면 우리가 뭐 예수님과 친구 맺고 뭐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절대 아닙니다. 하늘나라 가서 우리가 확신하는 건 뭐냐 하면 하늘나라에서 진짜 예수님을 의지하는 거 100% 의지하는 것으로 살아가 우리는요 교회의 이거거든요.
교회의 우두머리는 누구죠?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존재로 영원토록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참 예수님 참 하나님 나라의 복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의지로 온전한 지식으로 온전한 감정으로 다시 한 번요.
온전한 지식과 온전한 감정과 온전한 의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갑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회개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요. 아 아까 말씀드렸지만 이것 자체가 은혜예요.
회개 자체가 우리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얼마나 악한 자인가, 지식과 감정과 의지에서 얼마나 타락한 자인가 이것들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실 때 우리가 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렇게 알게 하셔서 우리로 돌이키게 하시면 그때 우리가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라는 것을 깨닫고 좌절하며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자연 재앙으로 남유다를 옥주시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그 고난에서 그들이 건져질 것인지 구원이 있을 것인지 그들의 상황에 진전이 있을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죄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요 모든 사람들에게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돌보시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타락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진정 소망이 없고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시대, 예레미야 시대 남유다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요. 우선 우리의 죄의 심각함을 깨닫습니다.

은혜가 있으면 깨닫는 게 뭐냐면 죄의 심각함이에요.
은혜가 있으면 뭔가 이렇게 좋은 것이 우리에게 나오고 이렇게 생각하시는 게 아니에요.
먼저가 은혜가 있으면요. 죄를 깨닫게 됩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우리가 죄인으로 심각한 타락의 오염 가운데 있고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무능에 빠진 것임을 깨닫고 우리의 죄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이 우리의 잘못 때문입니다. 우리의 타락은 끔찍할 정도로 너무 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사람 자체로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깨닫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이신 그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불현듯 깨닫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 의지해야 되는구나,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야 되는구나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모습을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머물지 않으시고 마치 나그네가 잠깐 머물다 떠나는 것과 같이 떠나시는 것이라고 보게 됩니다.
예레미야 상태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아요 하나님만이 능력 있는 구원자이신데 그분이 우리를 떠나고 우리를 버리신 것과 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선지자가 외칩니다.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9절 마지막에 호소가 그렇죠.
하나님 우리를 버리지 마세요. 우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우리를 버려두지 마십시오. 우리를 우리의 타락 가운데 빠져 온갖 죄 가운데 죽음 가운데 던져져 아무 소망 없이 죽게 마십시오.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백성 삼으신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시오.
나는 아무 소망이 없으니 나는 아무 능력이 없으니 하나님은 근데 능력이 있지 않으십니까?
도와주십시오. 나를 봐서는 아무런 기대도 소망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런 이런 이런 저런 끔찍한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 당하는 것 모두 다 다 내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 그래도 구원이 하나님 밖에 없다라는 거 그거 하나 붙잡고 있다.
하나님 구원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
예레미야의 호소였다. 예레미야의 호소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백성은 자신의 타락을 알고 인정하며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멸망했죠. 그러나 곧 하나님께서 70년 후에 그들을 다시 바벨론에서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400년 후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모든 죄악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을 역사적으로 드러내 주셨어요.
그리고 2천년이 지나 우리에게도 이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께 호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의 죄로 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셔도 마땅하고 끔찍한 죄악의 형벌을 받아 분명히 죽어 마땅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그러나 오직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으니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며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고하며 나아옵니다.
하나님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다시 예배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더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