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907말씀 부활하신 예수님 박주동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16절부터 19절까지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6절부터 19절까지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며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주 앞에 경배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고 이 시간 주님의 말씀 청종하는 시간 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고린도전서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 각 사람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난번에 데살로니가전서 공부했던 기억나시죠?
그때 어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또 지지 말고 기도하라 이 세 가지에 대해서 공부를 했었었는데 주로는 이제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또 범사에 감사하라 하는 두 주제를 중심으로 해서 공부를 했었었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제 세 번째 기도에 관해서 이제 말씀을 나눴으면 좋겠다 하는 얘기가 있었었는데 실질적으로 오늘 이 말씀 살펴보려고 하는 이 말씀과 기도와의 어떤 연관성은 대단히 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많이 얘기하는데 이것이 이제 어떤 우리 사변의 어떤 영역에서 머물러 있을 어떤 위험성이 늘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 이제 교리적인 것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특히 우리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라든지 대소요리 문답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성경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를 이렇게 이제 배우려고 그래요.
열심히 그것은 정말 중요하고 또 사실은 성경을 짧은 시간 안에 가장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걸 사실은 권장해야 되는 거죠.
우리가 교리를 배우려고 하는 것은 어떤 이렇게 쉽게 성경을 배울 수 있는데 그것을 뭔가 더 이렇게 고상하고 그렇죠 뭔가 더 있어 보이게 하면서 성경을 배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교리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이제 교리를 공부하는 것은 어떤 그런 느낌이 자꾸 이렇게 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고 우리가 교리 공부를 통해서 성경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능하면 작은 시간 안에 그렇죠 효과적으로 파악을 하려고 한다는 거죠.
그래서 사실 이런 그 교리 공부를 신앙의 어떤 연륜이 오래된 분들이 이렇게 그분들도 물론 늘 또 해야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우리 주일 학교 아이들 같은 경우에 오히려 이 교리를 통해서 성경 전체를 가르치는 것이 사실 대단히 효과적이기 때문에 이제 그렇게 하려고 그러는 건데요.
우리가 이제 그걸 강조를 하다 보면 강조를 하다 보면 또 문제가 생겨요.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부활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데 이 부활에 관한 신학적인 어떤 설명들을 우리가 이제 하게 되면은 생각해야 될 게 사실 굉장히 많거든요.
그래서 이제 구원에 관한 구원에 관한 이제 도 구속에 관한 신학인데 그 부분을 사실 전체적으로 사실 다 다뤄야 되는 그런 사실 숙제가 남겨져 있는 건 맞습니다.
그것을 이제 배우는 것도 좋고 오늘 다루면서도 그런 부분을 조금은 이렇게 다뤄보려고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성경을 배울 때 항상 조심해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성경을 이렇게 배우다 보면은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 계속해서 공부해 가는 것을 내가 하나님과 실질적으로 이렇게 교제하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성장해 가는 어떤 걸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그렇죠 우리가 공부를 많이 해야 되죠.
그런데 그것을 열심히 하면 그래서 실질적으로 그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렇게 쭉 증가하면 내가 신앙이 성장해 가는 걸로 이렇게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근데 그게 이제 아니구나 하는 것을 저도 사실 시간 오랜 이렇게 공부하고 또 신앙생활을 점점점점 해 가면 갈수록 내가 그런 어떤 함정에 빠질 때도 많았고 또 그것이 정말 아니구나 하는 것도 이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저만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성경을 잘 가르쳤던 우리 과거에 이제 좋은 선생님들이 있지 않습니까?
신학자들이나 목사님들이 계신데 그분들도 그런 얘기를 해요.
그걸 보면은 그분들도 이렇게 신학을 공부하고 또 그걸 또 가르치고 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들이 어떤 오류에 탁 빠졌는지를 인직을 했다는 거죠.
그 이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을 이렇게 믿고 사는 것이 하나님에 관해서 성경에 대해서 많이 공부해 가는 것과 꼭 이게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항상 뭘 이렇게 생각하면서 돌아와야 되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지금 이미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우리 가운데 이미 임재해 계신 그렇죠 그 하나님과 우리의 인격적인 만남이라는 거죠.
그래서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보통 우리가 베드로서 베드로후서 이런 말씀을 통해서도 힌트를 얻는데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그래요.
사도 베드로가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어떤 증가가 우리 신앙 성장에 대단히 중요하다 하는 것을 생각은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칫하면은 그 지식을 탐구하는 쪽으로 우리 신앙이 자칫하면 가버리거든요.
그런데 우리 교회의 역사를 이렇게 잠깐 들여다보면요.
이제 1600년도에 우리 교회는 가장 어떤 면에서는 풍성한 신학적 자산을 갖게 됩니다.
1500년 대에 이제 종교 개혁이 이렇게 쫙 칼빈과 루터 이런 여러 이제 종교 개혁자들을 통해서 일어났는데 1600년도에 들어서면서 그들이 가르쳤던 카톨릭과 대항하면서 이것이 어떤 점에서 오류가 있고 성경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를 잘 드러냈는데 그것을 1600년대에 오면서 신학을 정교화시켜요.
우리가 어 가지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같은 경우는 1640년 정도에 그때 이렇게 학자들과 장로님들이 모여서 오랜 시간에 걸쳐서 우리가 표준적으로 우리 교회가 가르쳐야 될 내용들이 뭔가를 이렇게 쫙 가르쳐 준 거예요.
이제 그때가 또 신학적으로 가장 정교하고 풍성해진 시대를 지나는데 이 교회에서 보면요.
1600년대 후반으로 이렇게 들어가면서 교회가 신앙에서 떠나요.
그렇게 좋은 신학적 유산을 가지고 있는데도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에서 떠나고 어떤 그 고민을 하게 되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전통 신앙을 가지고 사는데 우리의 신앙이 죽어 왜 죽 죽는다는 거죠.
정통 신앙을 신학을 또 내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신앙이 죽어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믿는 정통 죽은 정통이다 이런 말을 써요.
그러면서 그 속에서 이렇게 종교개혁 다시 어떤 면에서는 개혁적인 요소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거기서 강조하는 게 지금 뭐냐 하면은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이 부분하고 같은 내용이거든요.
지식적으로 우리가 같이 노는 공부하고 토론하고 이렇게 제가 왜 이 얘기를 이제 말씀드리냐 하면요.
우리가 이제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빠졌잖아요. 그러다 보면 우리의 문제가 뭘까 혹시 우리가 어떤 성경에서 뭔가 신학적으로나 어떤 이제 교회 역사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줬던 것 중에서 우리가 뭔가 상속하지 못한 것이 있는가 하면서 이렇게 탐구하게 돼요.
그것도 확인해야 됩니다. 근데 그걸 하다 보면은 자칫하면 우리도 그런 어떤 어떤 모습이 이렇게 나타날 수가 있어요.
공부하고 탐구하고 하는 것을 이제 우리가 그동안 잘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하는 생각도 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하다 보면은 그 유익이 분명히 큽니다. 네 종교 개혁 때 그 유익이 컸던 것처럼 그런데 그런 그런 식으로 이렇게 빠졌을 때 또 나타나는 이 부작용도 생각보다 빨리 나타나요.
천천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이제 역사적으로 보면 평가를 하기는 더 해야 되는데 독일 같은 데서는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경건주의 운동을 사실 많이 비판을 해요.
근데 어쨌든 경건주의 운동이 왜 일어나냐면 우리 신앙이 너무 메마르고 죽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정말 그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 감격이 있는 신앙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런 몸부림이 독일에서는 그렇게 일어났던 거예요.
근데 이제 우리가 네덜란드 같은 경우 우리가 이제 우리 합신 같은 경우도 네덜란드 쪽에 어떤 신학의 영향을 받은 교회예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는 그 합동측하고 다르게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을 우리는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는 거거든요.
저쪽에서는 합동 측에서는 어떤 우리 교회 교육의 표준적 문서로 하이데베르크 요리 문답을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냥 웨스트민스트 신앙 고백서만 얘기해요. 우리는 이제 그것 하고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까지 2개를 해서 표준적 문서로 삼겠다 하는 게 우리 합신의 그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근데 그 화란에 영향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 화란에서도 그런 문제가 발생해 가지고 화란에서도 이 신앙의 회복 운동이 막 일어나요.
이제 그런 분이 있어 보라켈이라는 이런 분들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데 교회의 역사에서도 사실 그게 이제 나타나는데 우리가 사실 이렇게 신앙생활 한 인생 살면서도 그 어떤 계속해서 그 문제가 때로는 이쪽으로 우리가 우리가 갔다가 성경과 어떤 신앙에 대해서 지식적인 부분에서 어떤 체계가 부족해서 우리가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고 또 그것으로 이렇게 이렇게 박았던 우리가 실질적으로 어 하나님과 현재적으로 교제하고 하나님과 사귐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 가는 이 부분을 또 이렇게 놓칠 수 있는 그 문제가 같이 항상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조금 우리가 이제 염두에 두면서 이제 우리 모임을 섬기는 게 필요하다는 것도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해야 되고 저는 이제 뭐냐 하면은 이 부분을 좀 더 말씀드리고 싶은데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그냥 지식적으로 성장하는 것 성장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전인이 그렇죠 전인이 성장해 가야 되는데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아는데 잘 안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게 다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그렇죠 관심이 깊어지는 거죠.
그래서 지금 우리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사실 무슨 의미냐 하면은 하나님에 관한 그런 지식과 그렇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들을 잘 이렇게 인식하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이 어떠한가를 결국은 이해하려고 하는 거겠죠.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충만하신 분인가 정말 얼마나 믿을 만한 분이신가 하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렇게 배우고 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 이러한 분이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사랑을 받는 거죠.
그래서 사랑을 받으면 어떤 일이 발생하냐면 행복하지 않습니까?
기뻐요. 행복하고 기쁘거든요. 그 사람은 언제 성장하냐 하면 이 내면이 행복감을 많이 공급받은 사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 그래서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성장하는 거예요.
우리 마음이 그렇게 그렇죠 그게 성장하는 거예요.
성장하는 그 핵심은 사실 거기에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를 성장시킬 수 있는 분은 사실 뭐냐 하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우리를 성장시키실 때 우리를 뭘로 먹이시냐 하면 우리는 그냥 이제 말씀으로 먹이시죠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게 말씀으로 그럼 뭘 먹이시려고 하는 거냐 하나님의 사랑을 먹이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얼마나 정말 자비로우신 분인지 진실하신 분인지를 그 하나님의 모든 인격적인 부분들을 우리가 알고 그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거죠.
그 교재 속에서만 우리가 사실은 정상 정상적으로 신앙이 성장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정상적으로 성장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냐면은 사랑을 많이 받으면 있지 않습니까?
사랑을 많이 받으면 사람이 겸손해져요. 착해진다니까요.
정말 사랑이 많이 사랑을 많이 받으면 착해져요. 사람이 계속 해 안 착해질 수가 없습니다.
사랑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한테 우리가 막 인상 쓰고 화내고 이렇게 하기 정말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실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선하심에 닮아간단 말이죠.
사랑을 닮아가는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이제 이렇게 쑥 성장하는데 그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착해진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 앞에서 이제 그렇게 나타난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냐 하면 굉장히 겸손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겸손하고 심령이 가난해요. 그러니까 팔복에서 나타나는 그 사람의 모습 있지 않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 팔복에서 말하는 그 사람의 모습이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한테 딱 나타나요.
그래서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면서 어떤 마음이 생기냐면 애통한 마음이 딱 생기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냐 하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는 이렇게 가난하고 애통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게 놀라운 신비로운 모습이죠. 기쁨을 하나님 때문에 기쁨이 가장 충만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기쁨이 가장 충만한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해서 가난함과 애통한 마음이 같이 되게 있다는 거죠.
이게 이제 그 모습이 우리에게 이렇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잘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향해서 그 기쁨 애통함이 있고 또 그 상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 그렇죠 구원에 대한 확신 때문에 마음에 큰 기쁨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떤 또 이제 모습이 나타나냐 하면 그 구원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어 가는 내 모습이 나타나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게 진짜 중요한 건데 뭐냐 하면요.
이렇게 신앙생활 이렇게 하다 보면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좀 칭찬받을 만하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 자꾸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해서 내가 내 구원을 확신하려고 하는 그 누가 그렇게 얘기 안 해도 내가 그렇게 확신해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뭔가 좀 제대로 열심히 하려고 하다 보면은 내가 사실은 나의 의에 탁 빠져요.
나도 모르게 저도 늘 그런 것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걸 경험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제 은혜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우리한테 뭘 가르쳐 주느냐 하면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을 계속 가르쳐 주고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의지하고 있던 거 있잖아요.
그나마 조금이라도 의지하는 것들을 점점점점점점 없애요.
이거 없애기 때문에 어느 순간이 되면 내가 정말 구원 받았나 싶은 생각이 딱 듭니다.
네 모든 정황을 봤을 때 성경에서 구원에 관한 말씀을 비추어서 내가 나를 딱 봤을 때 구원에 대한 확신이 딱 들거든요.
지금 딱 들어요. 근데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정말 구원 받았는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딱 든다는 거죠.
이런 사람들이 신앙이 가장 건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는 거를 이제 먼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신앙이 가장 건강한 사람의 모습에 그 모습이 동시에 딱 있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은 너희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라 이 그래요.
그 구원의 확신 가운데 있는 사람한테는 그런 말을 사실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물론 이제 확신에 있다가 또 연약함에 떨어졌다 하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는 것도 있는데 사실은 뭐냐 하면 구원의 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수록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뭔가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그런 것 가지고 내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게 없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게 사실은 아무것도 없고 아직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느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탁 붙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다시 마음에 큰 감격이 생겨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이런 부분을 우리 칼빈주의가 얘기해 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요. 칼빈주의자들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렇게 얘기를 많이 했어요.
칼빈주의자는 만들어지는 게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아주 관건적으로 그 칼빈주의자를 탁 만드셔야 된다는 거죠.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값없이 은혜로 거듭나는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정말 그러하구나 하는 것을 눈 뜨게 되고 우리가 이제 성경에서 이렇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할 때 그것이 금방 딱 이해가 돼요.
그렇죠. 제가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공감이 되시지 않습니까?
네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이게 이거에 딱 공감이 되는 분들은요.
이 칼빈주의자들이에요. 벌써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분들인 거거든요.
근데 이게 어 우리 칼빈주의자들 우리 칼빈주의자들이 강조하고 싶은데 그래서 진정한 이제 칼빈주의자들은 그야말로 성경을 성경주의자들 성경을 사랑하는 오직 성경을 얘기하는 분들인데 그런 분들이 그걸 얘기를 하려고 하는 이유가 지금 방금 말씀드린 이 부분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적인 이제 여러 관례들이 나오는데 그 신학적인 특히 알미니안 아르미니우스 같은 그런 분들은 알미니안 우리 감리교하고도 관련이 있는 그런 분인데 카톨릭의 어떤 그런 칭의에 관한 그런 교리들도 이제 반 펠라기우스라고 라고 그러는데 그런 어떤 것들이 우리가 되게 안타깝게 생각하고 문제 삼는 것은 뭐냐 하면 성경에 대해서 사실 많은 얘기를 해 줍니다.
그래서 도움이 되는 것도 많아요. 근데 가장 중요한 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도록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살게 하는 그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속에서 살게 하는 부분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되게 사실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슬퍼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분들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게 아니고요.
그분들 보면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그렇게 그게 아니다는 거죠.
하나님의 은혜는 그래서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가를 잘 생각하면 우리가 이렇게 일상 속에서 우리 진정한 우리 칼빈주의자들이 느끼는 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정말 마르지 않는 샘처럼 솟아나는 그런 은혜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정말 그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이렇게 던져진 사람들이구나 그 물을 그냥 이렇게 받아 마시는 분이 그런 존재 그 정도 차원이 아니고 우리가 생수의 강이 그 배에서 흘러넘친다고 그랬잖아요.
그런 그 하나님의 은혜 그 강에 이렇게 풍덩 빠진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그런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려고 할 때 어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그런 부분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고 신앙이 건강하고 정상적이면 이 두 요소 믿음에 대한 확신 그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마음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가난함과 애통함과 그렇죠.
그래서 주님을 그 순간에도 간절히 이렇게 붙들 수밖에 없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 서 있게 되고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해 주시냐 하면은 그 충만한 은혜를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경험 누리도록 해 주시면서 우리가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그렇죠.
그 어떤 면에서는 우리 애통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 자리거든요.
우리 인간적으로 보면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다시 우리를 일으켜 세우세요.
그게 뭐냐 하면은 오늘 말씀드린 부활의 능력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거죠.
예수님의 그 부활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나타나는 거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이 다시 살려가지고 하나님의 어떤 위치에까지 우리를 높이세요?
그건 정말 엄청난 일이거든요. 높이는데 그게 어느 정도 높이냐면요.
하나님하고 우리가 이렇게 같이 밥상에 앉아서 교제하고 이렇게 식사할 수 있는 정도까지 우리를 높이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시는 거죠. 그 역사를 부활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할 때 우리가 그런 부분을 생각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실제로 우리와 함께 함께하고 계신 그 주님 부활의 주님 그렇죠.
그 부활의 주님과 우리가 함께 있으면서 그 부활의 주님의 그 부활의 권능이 역사 그죠 능력이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 그렇죠.
내 삶 가운데 역사하는 약동하는 그 신앙의 상태 속에서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아가야지 그게 정상적인 사람인 겁니다.
그런데 이제 교회를 보면 너무너무 이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이 내면의 아까 기쁨과 감사함과 그다음에 그런 선한 착함이 있어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만약에 정상적이면요.
이렇게 만나서 교제하잖아요. 그럼 막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요.
그냥 이유도 없이 너무 좋아요. 천국에서 가서 이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건데 그거를 딱 알아요.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교회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교인들끼리 교제하면서 이제 성도의 교재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것도 다 그것 때문에 그런데 이렇게 탁 보면은 그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맞고 있는 이 벽이 굉장히 강하거든요.
실질 생각보다 실제로 우리가 서로 신뢰하고 믿고 이렇게 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우리 우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렇죠.
이 벽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단단하고 견고하거든요.
사실은 이제 이게 다 죄의 죄로 말미암아서 그렇죠.
이게 상대방이 오지 못하도록 친 굉장히 큰 벽이죠.
근데 그런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 벽이 쫙 무너지면서 우리와 우리의 관계가 다시 이렇게 벽이 허물어지고 회복되는 것을 이렇게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정상적이면 우리가 딱 만났을 때 서로에 대한 깊은 어떤 이해와 사랑이 금방 보자마자 다 이렇게 생깁니다.
이제 구약에 보면은 모세가 막 나는 이런 이런 이유 때문에 안 됩니다.
이렇게 할 때 아론을 나중에 소개시켜 주잖아요. 그래서 아론이 너를 보면은 마치 너를 하나님처럼 이렇게 대할 거다.
그러니까 아론을 탁 보면서 그 두 사람 사이에 사실은 이 그렇죠 보자마자 이게 완전히 하나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됐는데 이것이 우리 성도들 사이에 이게 하나 됨으로 이렇게 그대로 즉각적으로 이렇게 나타난단 말이죠.
굉장히 이제 놀라운 거죠. 이것을 신학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들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해요.
어려운 말을 써요. 그리스도의 연합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예수님 혼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보니까 나중에 우리도 그때 2천년 전에 그때 같이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한 그 역사에 참여한 사람이구나.
예수님만 역사적으로 죽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도 역사적으로 그때 죽고 부활한 그 참여한 사람으로 성경이 분명하게 얘기를 해요.
아 그러니까 정말 이제 놀라운 거죠. 이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닌데 하나님께서 시간을 초월하신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렇게 한꺼번에 탁 이루신 거거든요.
그래서 그 교회가 그리스도와 이렇게 실제로 생명적으로 생명적으로 연합되어져서 우리가 교회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우리가 다 이렇게 한 몸이라고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생명적으로 우리가 서로 하나 되어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습니까?
이제 그게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연합의 관계를 아마 그것만큼 잘 표현해 준 게 없을 것 같아요.
어떤 건축물로도 이렇게 표현해 주지만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한 생명이라는 거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우리가 한 생명체로 이렇게 같이 말하자면은 서로 이렇게 머리를 공유하고 그렇죠 장기를 공유하는 한 몸인 사람들인 거죠.
그러니까 그런 놀라운 이제 존재 속에서 우리가 이제 살아가는데 그것을 사실은 가능하게 한 것이 이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그 부활의 하나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과 또 예수님 스스로도 뭐냐 하면 공생애 기간 동안에 내가 나를 살리겠다 하는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단독적인 사역인가 예수님과 함께한 사역인가 이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면은 분명히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너희가 성전을 허물면 내가 다시 이렇게 일으키겠다 세우겠다 하는 예수님의 의지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셨고 그 부활의 그리스도께서도 신성으로 함께 하셨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이제 인정하게 되고 우리가 거기에서 부활해서 하나님의 이제 놀라운 역사를 우리가 한 번 더 확인하게 되는데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런 부분들을 우리가 기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좋으냐 하면 예수님의 이 부활 사건은 정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이 조금이라도 흔들릴 때 우리의 신앙을 붙들어 주는 가장 강력한 그 근거예요.
그 근거다. 그래서 어 그 뭐 과학이 발달하고 이러면 이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어떤 내용들을 뭔가 이렇게 자꾸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그럽니다.
우리는 이제 그렇게 하지 않지만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뭐 어떤 사건에 대해서 그걸 변명할 만한 것들을 자꾸 찾으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부활 사건은 딱 우리에게 이걸 너가 믿을 거 믿을지 안 믿을지만 딱 2개만 요구합니다.
그거를 뭔가 이렇게 변명하고 뭔가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있는 걸 찾기가 불가능해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면이 있냐면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창조하셨지 않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이 다시 한 번 더 나타난 사건으로 이렇게 보면 무방합니다.
그러니까 물론 이제 사실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많이 나타내셨죠.
사실 그게 부활의 능력과 관련돼서 사실 연속성이 다 이제 있기는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뭐냐 하면 구약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한 겁니까?
구약에 있는 사람들도 그 약속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로 말하면 거듭난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그 속에 사실 창조의 능력이 사실 나타난 건데 그것이 이제 그 결국은 뭐냐 하면은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 그 일들이 효력을 발휘한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에 보면 만약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헛것이고 또 너희 아니 저 잠자는 자도 망하였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전에 구원받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분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도 그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전 인류의 앞으로 미래에 이제 구원받을 사람까지 해서 그 모든 전 인류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딱 부활하는 그 시점에 역사적으로 보면요.
그 시점에 다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근데 그 완성되는 그 하나님의 역사에 근거해서 구약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을 받은 것이고 미래에 있는 사람들도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에 참여하면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 구원받는 원리는 다 똑같은 거거든요. 네 그래서 하나님이 구약의 시대는 구약 시대는 어떻게 했냐하면은 하나님이 이제 어떤 언약의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그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사람들로 삼아주신 거예요.
예 뭐 우리도 마찬가지죠. 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것이 일어나는 사실 일어나기 때문에 그 전체 속에서 뭐냐 하면 사실 하나님의 창조에 새로운 창조자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딱 나타나는 곳 그게 그 사실은 완성이 된 겁니다.
완성이 된 건데 우리가 이제 역사적으로 그렇죠. 이렇게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뭐라면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이렇게 살아나는데 그 살아나신 예수님이 이전에 우리의 몸하고 다른 새로운 몸을 입고 나타나세요.
그러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역사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자가 살아난 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이에요.
엘리사를 통해서도 그렇죠.
엘리야를 통해서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에녹이 올라가고 엘리야가 올라가고 이런 것을 이해하고 믿는 사람들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근데 그 사람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그 부활하신 주님이 그냥 나사로가 살아나는 그런 어떤 그렇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그런 부활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의 부활이라는 거죠.
이 세상에 없는 거예요. 없는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네 그 부활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잘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정말 우리의 어떤 상상할 수 있는 한계 그렇죠.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그 한계를 완전히 넘어선 새로운 어떤 역사를 우리에게 다시 딱 보여주신 겁니다.
이 부활 사건이 그래서 부활 사건을 딱 보면은 거기에서 우리가 사실 잘 들여다보면 아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 창세기 말씀이 정말 그 말씀이 믿어지는 동시에 창조의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부활도 물론 믿어지죠.
근데 부활하는 사건을 우리가 쫙 보면 근데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이 너 그거 봤냐 그러잖아요.
너 봤냐 너 그거 그거 너가 뭘로 증명할래 그러고 따진단 말이에요.
진짜 창조의 그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가 거의 뭐 동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건 이쪽은요.
이렇게 어떻게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정말 그야말로 믿어야 되는데 이 부활 사건은 뭐냐 하면 그냥 믿어라 이게 아니고요.
부활의 여기 그렇죠 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사복음서에서 그렇죠 이렇게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서로 막 내용이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사복음서 보면 예수님 부활 후에 이렇게 맨 처음에 누가 예수님 만납니까?
여자들이 만나요. 근데 예수님을 직접 본 처음으로 본 사람은 누구인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마리아가 봐요.
마리아가 막 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 들렸던 옛날에 그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제 그다음에 제자들도 보고 다른 여성들도 보고 그리고 또 뭐 엠마오로 가던 친구들도 보고 그렇죠.
그래 그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제 제자들 다 보고 예수님이 40일 동안 부활한 후에 계시면서 많은 사람들 봐야 될 사람들은 다 봐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부활에 대한 이 증인들이 엄청납니다.
그래서 이제 부활에 대해서 부인하고 그렇죠 그게 어떤 제자들의 속임이나 이런 걸로 막 이렇게 만들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이제 있었었거든요.
그런 분들 어떡하겠어요 그래도 안 믿는 사람들 어떡하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제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의 제자들의 삶, 제자들의 인생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40일 함께하고 예수님 승천한 이후에 그 예수님 제자들 모습 그들의 삶 보면 이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예 그 제자들만 봐도 믿겨져야 돼요. 사실은요.
제자들만 봐도 이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않았으면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다 도망간 사람들이지 지금은 그 제자들이 다 어떻게 됐습니까?
다 순교해가지고 이제 우리 카톨릭에서는 다 이 앞에다가 성 자를 붙여가지고 이 성 베드로라고 그러고 성 야고보라고 그러고 그렇게 이렇게 칭송하는데 그게 뭐냐하면 제자들이 삶을 이렇게 보면은 주님이 사셨던 삶하고 비슷하게 살아요.
제자들이 우리가 우리가 이제 잘 아는 역사를 그래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사도 바울이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도 다메색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요.
그래서 나도 마지막에 나도 봤다고 이 고린도전서에 나와요.
그렇죠 나도 부활의 증인이다. 그래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핍박하던 바울이 갑자기 어느 날 바뀌어가지고 복음 전도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신의 생명 존재 전체를 던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얘기하고 그걸 위해서 일생을 살았던 사람으로 이렇게 바뀐 자기 그들의 많은 증인들 증언들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에 충분해요.
근데 그것만 사실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실제로 예수 믿고 뭘 다 경험한 분들입니까?
그 부활의 권능을 다 경험한 사람들이에요. 그리스도의 그 부활이 여전히 지금도 역사에서 성령께서 그 십자가와 부활을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사실은 창조의 역사죠.
그것을 우리가 다 갖고 있습니다. 누가 아무리 얘기해도 그렇죠.
내가 때로는 이렇게 이런 사건들을 성경을 잊어버려도 그렇죠 뭐 나중에 우리가 연세 많이 드시면 치매 이렇게 좀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기억력이 사라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게 우리의 어떤 인식의 어떤 차원을 넘어서서 주님께서 주님께서 단독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행하신 거거든요.
우리가 그거를 확인한 사람들인데 그걸 한 번 확인하는 분들은 이게 우리가 그 그 놀라운 구원을 부인하고 싶어도 있잖아요.
그걸 나는 괜찮습니다. 이거 안 받아도 됩니다. 아무리 이렇게 얘기해도 그거를 내가 거부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예수님 믿고 사는 게 너무 이제 고달파가지고 어떤 때는 아 이거 좀 이렇게 안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이렇게 보면 너무너무 감사해요.
그러니까 실제로 살다 보면은 예수님 믿고 사는 게 힘들단 말이에요.
그래서 마음으로는 약간 안 믿고 살고 싶은 마음이 막 생길 때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안 믿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막 들어 그런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내 그런 의지와도 상관없이 내가 여전히 하나님 자녀로 이렇게 존재해 있는 것을 보면은 너무 놀랍고 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정말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이루어진 거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참 다시 감격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에 대해서 나중에 고린도서에도 쭉 나중에 읽어보시면 좀 더 우리가 생각해 볼 부분들이 좀 더 있지만 오늘 이제 이 예수님 부활과 관련해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부활하신 그 주님과 현재적으로 우리가 함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실제로 그 삶을 계속해서 누려가는 그 포인트를 있지 않습니까?
놓치지 않아야 된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렇게 함께 공부하고 예배드리고 그렇죠 노력하고 또 실제로 이 부활 신앙 부활의 어떤 생명이 우리 삶 속에서 약동하는 사람들다운 모습이 우리 속에 나타나서 실제로 우리가 그 모습 속에서 살아가는 그래서 우리의 삶이 정말 하나님 나라 가서 지금 이렇게 살겠구나 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거죠.
그런 모습이 우리 속에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속하시고 또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 가운데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은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함께 참여한 사람들이고 성령께서 우리를 그 부활에 동참한 사람들로 실질적으로 살게 하시고 또 실질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살아가면서 부활의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와 친밀한 사귐 속에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잊어버리지 않게 해 주시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그 부활을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나타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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